〈 284화 〉 285.전부 그대 때문이다!
선우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절박한지는 충분히 이해한 그였다.
분명 벼랑끝에 내몰린 상황일 것이다.
이번에 빙정을 구하지 못하면 평생토록 유배아닌 유배생활을 보내야할 것이다.
심할 경우 정적들의 의해 암살을 당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딱하고 가여웠으며 연민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탁은 연민의 감정으로 들어주기엔 너무나도 큰 부탁이었다.
북해빙궁의 궁주인 북궁연으로부터 보호를 해달라니?
부담되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말이다.
북궁연이 어느정도 위치에 이른 무인인지 눈으로 확인한 선우였다.
절대지경이라고 불리우며 인간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는 화경을 넘어 신선으로 향하는 과정인 반선의 경지 즉 현경에 이른 여인이 아니던가
검인과 치열하게 접전을 펼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였다.
그런데 어찌 그런 그녀로부터 능소화를 지킬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었다.
차라리 검인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무리다."
선우는 단호한 어조로 거절을 하였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애초에 능력이 안되었다.
".......안되는 것이더냐?"
능소화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선우에게 물었다.
"애초에 역부족이야. 내 수준으로 그녀를 막기에는 말이야."
선우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하였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취미는 없었다.
불가능한 일에 희망을 주는 것도 싫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
"아니 충분히 가능하다."
선우의 말에 능소화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리라니까 북해빙궁주는 현경의 경지에 올라서있다. 화경 상경에 불과한 내가 상대가 될 리 없잖아."
선우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화경과 현경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차이를 넘어서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대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선우의 반론에도 능소화는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익힌 무공으로도 불가능하다니까? 검으로 어떻게 설풍을 베어버리냐고?"
선우는 답답하다는듯이 반문을 하였다.
자연 재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북궁연이었다.
그런 북궁연을 심검心劍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대는 흐름을 전환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은가?"
"..........."
오싹
순간 선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기 떄문이었다.
어찌 그녀가 건곤대나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무...무슨 말이지?"
일단 선우는 시치미를 떼며 모르는 척을 하였다.
"시치미 뗄 필요 없느니라. 본녀는 다봤느니라. 그대가 날아드는 공격을 순식간에 되돌리는 모습을 말이다."
".........."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 대처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 앞에서 건곤대나이를 선보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바로 북풍대의 부대주인 장광의 공격을 되돌렸을 때말이다.
그런데 어찌 단 한 번을 본것만으로 무공의 본질마저 꿰뚫어본다는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여인이라는 말인가
"본녀는 바보가 아니다. 본녀 또한 북해빙궁주가 반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한눈에 보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대 가진 무공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부탁을 하는 것이다. 설마 내가 그대에게 목숨을 내놓고 보호하라는 요구를 했겠는가?"
능소화는 선우를 바라보며 쉴새 없이 말을 이었다.
"특수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 무공이 현경에 이른 그녀를 막을 수있다는 보장은 없잖아. 어떻게 확신하지?"
"이미 검증이 되었지 않았느냐?"
"검증이라니?"
"북해빙궁주가 그대에게 묻지 않았더냐? 설풍을 어떻게 막아내었냐고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대의 특수한 무공이 설풍마저 막아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치가 끝나고 빙궁주는 선우에게 몇 번이고 설풍을 되돌린 방법에 대해 묻곤 하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선우에게 한 물음을 엿들은듯 싶었다.
'망할'
선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뭔가 거절하기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수락하는 것도 마음이 걸렸다.
북해빙궁주가 가진 힘이 낮에 봤던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분명 더욱더 어마어마한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 자명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맞서는 일을 건곤대나이 하나만 믿고 수락하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더구나 북궁연은 연맹의 은인이 아니던가
어찌 그녀와 대치를 할 수 있겠는가
선우는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묵었다.
깊은 고심에 잠긴 것이었다.
"선우."
선우가 말없이 고민에 빠져있자 능소화가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디 부탁한다. 지금 내겐 그대말고는 이런 일을 부탁할 만한 이가 없구나. 내 염치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기껏해야 며칠 정도 안면을 익힌 사이인 내가 그런 부탁을 해봤자. 엄청난 부담일 뿐이라는 것도 잘안다. 하지만 그대 말고는 의지할데가 없구나. 만약 일이 성사만 된다면 내 이 은혜는 황궁의 기둥뿌리까지 뽑아서라도 보상을 할터이니 부디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만약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내어줄 것이다. 군주의 이름으로 약속을 하겠다."
능소화는 더할나위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선우에게 속에 품고 있는 진심을 내보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며칠 안되는 친분에 기대어 염치없는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선우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도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금제가 되어 무공마저 봉인된 상황에서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만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직 선우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말이다.
"물론 그대가 거절한다면 나 또한 강요치는 않겠다. 모든 것은 그대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결과일터이니. 그저 뜻에 따르도록 하겠노라. "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깊은 고심에 잠겼다.
상황만 놓고보면 무조건 거절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북궁연은 강했고 자신은 모험을 걸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머릿속이 수없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제발 거절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한켠에 무언가 얹힌 듯한 답답함이 몰려들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혼자서라도 그녀를 설득해볼 수밖에."
선우의 물음에 능소화는 체념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죽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넋놓고 있을 수는 없다."
"차라리 병력을 이끌고 다시 오는 건 어때?"
"나보고 지금 북해빙궁과 전쟁이라도 하라는 것이더냐?"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선우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최소한의 안전을 보장 받으라 이 말이지."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선우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병력을 이끌고 와서 빙정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협박이고 강압이다. 어찌 내 안위를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능소화는 선우를 바라보며 찬찬히 말하였다.
"애초에 빙정을 섭취한다고 불길을 확실히 제어할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없다. 그저 시도일 뿐이지. 그런 불확실한 일에 병력을 동원할 수 는 없다. 게다가 만에 하나 그들과 전쟁이라도 치르게 된다면 나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뭐를?"
"내 안위를 위해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죄책감을 말이다."
능소화는 올곧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멍
그리고 선우는 그런 능소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황족이었다.
천자天子의 피를 이었다고 전해지는 황족말이다.
그녀가 중원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가졌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어찌 저리 이타적인 발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분제가 확고한 이곳에서 어찌 저런 이타심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녀는 선우에게 명령을 내려도 되었다.
그만큼 그녀의 신분은 지고하기 짝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명령은 커녕 부탁을 하였고 거절조차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다.
선우는 가슴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신분만 고귀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마저 고귀했던 것이었다.
선우는 생각하였다.
그녀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만둬."
선우는 능소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이지?"
"빙궁주와 독대하는 것 말이야."
"어쨰서지?"
"죽을거다."
선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잠깐 겪어보긴 하였지만 빙궁주의 성격은 만만치가 않았다.
자존심이 강했고 성격이 드셌다.
게다가 현경에 올라와서인지는 몰라도 무미건조하고 무심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북해빙궁의 보물인 빙정을 요구하였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내겐 방법이 없다."
능소화는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빙궁주가 좀더 자비롭기를 바랄 뿐이다."
"하...하지만.."
"이제 그만 되었다."
능소화는 올곧은 눈으로 선우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거라. 그대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난 이미 결정을 하였고 그 결정에 대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
"설령 내 목숨이 위험하다고해도 말이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아"
선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능소화."
선우는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능소화를 불렀다.
"말하거라."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말. 진짜지?"
순간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꼼짝없이 거절당하는줄 알았건만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물론이다. 황궁의 기둥 뿌리라도 뽑아서라도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 군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느니라."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교섭하러 갈때 나도 같이 가지."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정말 괜찮은 것이냐?"
선우의 확답을 들은 능소화는 걱정되는듯 그에게 물었다.
자신때문에 내키지도 않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나를 따라 빙궁주와 독대하는 일 말이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했어."
"무리 할 필요는 없다. 그대는 부담을 느끼고 있지 않던가?"
능소화는 선우에게 걱정된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막상 선우가 제안을 수락하자 죄책감이 밀려든 그녀였다.
괜스레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착각하지마. 현 황제의 손녀이자 연왕의 딸인 네게 빚을 지워두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 뿐이야."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찌 빚을 지워두는게 목숨보다 중하다는 말인가"
"안죽으면 돼."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그녀는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부탁하러 온거 아니였어?"
그리고 그녀의 부정적인 태도를 본 선우는 당황한듯 그녀에게 물었다.
분명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 것이 아니던가?
희망을 잔뜩 심어줘도 모자랄 판국에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한다는 말인가
"마음이 바뀌었다. 나 혼자 가겠느니라. 그대는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거라."
능소화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버렸다.
"갑자기 왜 그러는건데?"
선우는 황당하다는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탁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며 호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갑자기 마음을 바꾼단 말인가
"그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대는 북해빙궁주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 아니던가? 만에 하나 그녀와 대치하게 된다면 그대는 은혜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되는 것이다!"
"아니 후레자식같은 나쁜 말은 어디서 배웠어!"
"설향한테 배웠다!"
"나쁜 말이야. 쓰지마."
"어쨌든 난 결심을 굳혔다. 그녀에게는 나 혼자 가겠다."
"아니 그럴거면 처음부터 혼자가던가! 야밤에 찾아와서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들어놓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선우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도와준다니까 왜 또 거절을 한다는 말인가
무슨 청개구리도 아니고 말이다.
"그건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마음이 바뀌었다. 치를 떨 정도로 거절하는 그대를 억지로 붙들고 도움을 청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내가 언제 치를 떨었는데!"
선우는 억울하다는듯 언성을 높였다.
"그대는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 내가 이야기를 꺼낸 이후 단 한번도 그대의 표정이 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내가 그대에게 부탁을 하겠는가! "
"괜찮다니까? 네 말대로 특수한 기공을 익혀서 그녀에게 맞설 수 있어. "
"그래도 싫다."
"목숨 걸린 일에 자존심 세우지마."
선우는 으르렁 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자꾸만 억지를 부리니 짜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신세면서 무슨 자존심을 세운단 말인가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전부 그대 때문이다!"
선우의 말에 능소화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