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284.북해빙궁주로 부터 날 지켜다오!
"현 황제의 손녀이자 연왕의 셋째 딸이지."
능소화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익히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설마 그 범상치 않은 신분이 황족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군주라니?
황족이라니?
천자의 핏줄이라니?'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였다.
상상이상의 충격이 머리를 쉴새없이 강타하였다.
'그래. 이건 꿈일거야. 눈을 감았다 뜨면 분명 아무도 없을거야.'
선우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현실을 도피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눈앞의 고귀하기 그지없는 황족의 여인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좆됐다.'
선우는 식은 땀을 쉴새없이 흘리기 시작하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그간 능소화를 골려먹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자신 또한 꿀릴게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선우였다.
그렇기에 선우는 그녀를 대하는데 한점의 부담감도 느끼지 않았고 쉴새없이 그녀를 놀려먹었다.
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여인이라면 상관없지만 상대는 연왕의 딸이었다.
공주라는 소리였다.
그런 여인에게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을 쉴새없이 짓거린 것이다.
현대와 달리 중원은 신분이라는 것이 명확히 갈라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황족은 그 신분제의 정점에 올라서 있는 존귀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존재를 대등하게 여기고 놀림감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사형死刑'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단어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그 단어는 바로 사형이었다.
사형을 집행할 것이다.
너무 과민한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 시대의 황족의 위엄은 어마어마하였다.
무려 천자天子의 핏줄
신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자들인 것이다.
선우는 후회하였다.
저 보호본능 자극하는 아름다운 외모에 속은 과거의 자신을 말이다.
"..............."
"어찌 말이 없는 것이냐?"
선우가 말이 없자 능소화는 궁금하다는듯 그에게 범하였다.
"군주님, 그간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선우는 재빨리 허리를 깊숙히 숙이며 그녀에게 사죄를 하였다.
일단 사과부터 박고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몰랐다고는 하나 무례를 범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죄를 해야했다.
무조건 말이다.
"격식은 되었다. 평소처럼 편히 말하거라. 난 그대에게 그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선우가 저자세로 나오자 능소화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지 그의 떠받듬을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찌 제가 군주님께 하대를 하겠습니까?"
선우는 황송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신분이 엄연히 다르건만 어찌 말을 함부로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비록 군주의 신분을 밝히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그대에게 나는 능소화다. 군주로 대하지 말고 능소화라는 한 사람의 친구로서 대해주면 좋겠구나."
능소화는 그런 선우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비록 도움을 청하기 위해 신분을 밝히기는 하였지만 대접을 받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녀에게 선우는 생애 처음 사귄 친구였다.
그런 친구에게 존귀하고 떠받들어야되는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부탁이니라."
능소화는 애절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간곡히 청하였다.
두근
그리고 그녀의 애절한 눈빛을 또다시 마주한 선우는 다시금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까도 저 눈빛에 속아 신분을 토로하라는 망언을 지껄였다.
또 다시 속을 수는 없었다.
"알았어. 편히 대할게."
물론 그의 입은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지만 말이다.
'시발'
선우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본능적으로 멋대로 지껄이는 입방정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찌 주인의 마음을 몰라도 이리 모른단 말인가
"고맙구나."
선우의 말들은 능소화는 만족스러운듯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멍
그리고 선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딱딱하고 고압적인 태도만을 고수하던 그녀였지만 갈수록 감정이 다채로워졌다.
그리고 그 다채로운 감정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꾸며주는 것 같았다.
겪을 수록 더욱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쿡, 또 이 몸의 아름다움에 빠진 것이냐?"
그런 선우의 모습을 본 능소화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끄덕 끄덕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를 하였다.
세인들은 말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능소화를 보게된다면 말을 바꿀 것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이다.
"아쉽게도 감상은 그쯤해야할 듯 싶구나."
능소화는 멍한 표정을 짓고있는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좀더 보고 싶은데?"
"이러다간 날이 샐 것이다!"
선우의 능글맞은 말에 능소화는 짐짓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본녀가 진실된 신분을 밝힌 것은 이유가 있느니라. 그 이유를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뭔데?"
선우는 궁금하다는듯 그녀에게 물었다.
사실 선우도 궁금증이 일던 차였다.
별안간 신분을 밝힌 그녀의 저의가 말이다.
그녀는 분명 빙정을 얻기위해 북해로 왔다고 하였다.
제어가 안되는 화공을 제어하기 위해서 말이다.
선우는 이해가 안되었다.
황족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직접 북해까지 찾아온 까닭을 말이다.
북해에는 혹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혹독한 설풍이 불며 수많은 범죄자들과 북방 이민족들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호위 무사 하나만 달랑 데리고 온 것이다.
이해가 될 리 없었다.
비록 화경을 뛰어넘어 현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라지만 내공이 금제되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지금 그녀는 그저 일반인보다 조금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신분을 숨긴 채 북해로 왔다는 말인가
적어도 대대적인 병력을 이끌어도 충분한 군주라는 신분을 가지고 말이다.
선우는 생각하였다.
그녀에게는 좀더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시발 이래서 안들으려고 했던 건데.'
선우는 또다시 후회하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과거의 자신을 말이다.
"본녀는 경화군주라고 한다. 황제의 손녀이자 연왕의 딸이지. 그리고 정이품 금오장군으로 임명받은 제국의 장군이다."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경악하였다.
금오장군이라면 황궁을 수호하는 무관이 아니던가
어찌 아녀자의 몸으로 남자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장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
현대에서조차 흔치 않은 것이 바로 장군의 자리였다.
여성인권이 신장된 현대에서도 이럴진대 남초적인 성향이 강한 중원은 오죽하겠는가?
아무리 그녀가 군주라하더라도 장군의 자리는 성향자체가 다른 관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장군의 자리에 올라버린 것이다.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장군의 자리에 오른거지?"
선우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문을 표하였다.
"공을 세웠다."
선우의 물음에 능소화는 짤막이 답하였다.
"대체 무슨 공을 세웠길래 장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거지?"
선우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현 황제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반란군을 전멸시켰다."
"허어"
이내 선우는 수긍하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 정도 공이라면 충분히 오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란군을 진압한 이후 본녀는 황실을 수호하는 장군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능소화는 짐짓 자랑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후 팔 년이라는 세월동안 본녀는 황실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많은 세력들에 대항하여 황실을 수호하였지. 모두가 본녀를 찬양하였으며 황실의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능소화는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팔 년째 되던 해 어느날 문제가 생기고 만 것이다!"
"무슨 문제?"
"경지에 오르면서 화기가 제어되지 않게 된 것이다!"
"아, 몸에 불 붙는거?"
"그렇다. 시도때도 없이 몸이 불타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도저히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그녀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결국 본녀는 잠시 금오장군이라는 관직을 반납한 후 별궁으로 들어가 불길을 제어하기 위한 시간을 보내었다."
그녀는 침중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본녀는 온갖 방법으로 불길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물 속에 들어가 있기도 하였고 땅속에 파묻히기도 하였으며 몸 안에 있는 모든 내력이 떨어질 때까지 불길을 원없이 뿜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불길은 물과 흙마저 태워버렸고 내력을 전부 소진시켜도 그 때만 멈출 뿐 내력이 차면 다시금 불이 붙었다. 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능소화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듯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불길이 잠잠할 때가 음기가 강한 약재를 먹는 것이었는데 그도 한순간만 제어될 뿐 영원한 효력을 갖진 않더구나. 그래서 생각을 달리해봤다. 만약 극음의 기운을 가진 무언가가 몸속에 있다면 불길이 멈추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빙정을 생각해낸 거군."
그녀의 말에 선우는 알겠다는듯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빙정이 가진 극음의 기운이라면 그녀의 불길도 억눌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맞다. 본녀가 생각한 것은 빙정이었다. 만약 빙정이 몸 안에서 음기를 끊임없이 흘려준다면 본녀의 몸에서 시도때도 없이 치솟아오르는 불길을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의 말에 능소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선우는 궁금하다는듯이 말을 이었다.
"직접 올 필요가 있었어? 너는 황족이잖아? 군사를 풀어 구해오라는 명도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선우는 가장 궁금했던 사안을 입에 담았다.
선우의 말대로 그녀가 북해까지 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고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어찌 무공도 제어하지 못하는 여인이 고되기 짝이 없는 북해행을 선택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군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진 그녀가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손가락만 빨며 기다리기엔 본녀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어째서? 내공을 금제하면 불길이 치솟지 않는다면서? 그냥 금제된 상태로 빙정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거 아니야?"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본녀는 황실을 수호하는 방패로서 팔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만큼 정적도 많았지."
"정적?"
"그렇다. 황족이자 황실을 수호하는 금오장군이라는 신분은 황제의 권위를 더할 나위 없이 높여주었다. 그리고 자연히 귀족들의 힘을 한 없이 낮추는 결과를 초래하였지. 그런 상황에서 본녀가 내공을 금제한다면 수많은 이들이 본녀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능소화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족을 노린다고? 천자의 핏줄을?"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놀란듯 되물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실제로도 몇 번이고 암살자가 왔으니 말이다."
"허어"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설마하니 중원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여인조차 암살의 위협에 시달릴 줄은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본녀는 폐관수련을 빙자하여 자취를 감추었고 이렇게 몰래 북해로 오게 된 것이다."
그녀는 선우에게 그간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거짓 한 점 없이 전부 말이다.
능소화의 설명을 들은 선우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였다.
분명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선우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정체를 밝힌 이유가 뭐야?"
선우는 궁금하다는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선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안간 자신에게 신분을 밝힌 그녀의 행동이 말이다.
이왕 속이려고 다짐했다면 끝까지 속여야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이렇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약점을 술술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것도 수많은 정적들이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도움이 필요하다."
능소화는 올곧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를 도와다오."
"도움?"
선우는 의문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지금 본녀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무슨 도움이 필요한데? 돈이라도 빌려줄까?"
"본녀는 중원 최고의 부자다. 돈 따위는 필요치 않다."
선우의 물음에 능소화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뭔데?"
선우는 궁금하다는듯 그녀에게 물었다.
"북해빙궁주로 부터 날 지켜다오!"
능소화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상상이상으로 부담되는 부탁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선우의 표정을 의식한 것일까?
능소화의 눈빛이 애절하게 바뀌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