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71. 두 여인의 기싸움-2
"잘 부탁드려요. 설향이라고 해요."
마차 안에 올라탄 설향이 능소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잘 부탁한다. 본녀는 능소화라고 한다."
"어멋, 능소화라니 예쁜 이름이네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설향은 말갛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맙구나."
그녀의 칭찬에 능소화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정말 본명이 맞나요?"
"..........."
능소화는 설향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예쁜 이름이라서요. 능씨가 흔한 것도 아니고요."
"물...물론이다."
능소화는 당황한 듯 말을 내뱉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음에 걸렸지만 가명인 것이 탄로 나고 싶지는 않았다.
"좋겠네요. 그렇게 예쁜 이름도 있고 말이에요."
설향은 그런 능소화의 반응을 보고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 못하네.`
그리고 속으로 생각을 하였다.
거짓말을 못 하는 아가씨라고 말이다.
"설향이라는 이름도 예쁘구나."
능소화는 딴에는 말을 돌리려는 것인지 급히 그녀를 칭찬하였다.
"고마워요."
그녀의 칭찬에 설향은 말갛게 웃으며 답하였다.
"저는 본명이랍니다."
"............."
능소화는 이어지는 설향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설향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비꼬는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말이다.
능소화는 미묘한 기분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생전 처음 느껴지는 이 기분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능소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 설향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밝은 미소를 띤 설향이 능소화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다.
"본녀는 스물 여덟이다."
그녀는 짤막이 대답하였다.
"우왓! 저보다 언니시네요?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능소화에게 물었다.
"저는 이제 막 약관이 되었어요. 언니"
"..........."
미묘했다.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향은 분명 맞는 말을 하였고 호의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는 말마다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눈앞의 여인이 이상한 것일까
"나는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능소화는 짐짓 위엄 서린 적안으로 설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위로 오라버니들만 있다 보니 저보다 나이 든 언니만 보면 저도 모르게 신나서..."
능소화의 말을 들은 설향은 짐짓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태도는 능소화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못해도 약관 이전에 정혼을하고 약관에 혼인을 하는 것이 관례인 곳이 바로 중원이었다.
그런 중원에서 능소화는 혼인이 다소 늦은 편인 무림의 기준으로 봐도 꼼짝없이 노처녀에 속하는 나이였다.
그런 자신에게 자꾸만 나이를 언급하니 신경이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언니라는 말은 삼가거라. 난 예의를 차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불쾌한듯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설향은 다시금 죄송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뭐라고 부를까요? 능 부인? "
"본녀는 미혼이다!"
설향의 되도 않는 말에 화가 난 능소화는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남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처녀에게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부인이라니!?
"죄송해요. 무림에서는 그 나이쯤 되면 다들 혼인을 하는 추세라 당연히 혼인을 하신 줄 알았네요."
그녀는 다시금 미안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득
능소화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왠지 모를 부아가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둔감한 그녀라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맥이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향을 쳐다보는 능소화의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능소화는 속을 식히며 말을 이었다.
아직 한참 어린 설향이랑 입씨름해봤자 자신만 우스워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해요. 능소저. 그나저나 능소저께서는 어째서 북해에 오셨나요?"
"비밀이다."
설향의 물음에 능소화는 짤막이 답하였다.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럼 원래 뭐하던 분이세요?"
"비밀이다."
"원래 그렇게 비밀이 많으세요?"
"그대는 본래 그렇게 말이 많더냐?"
능소화는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는 설향에게 화가 난 것인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 원래 영계가 잘 우는 법이랍니다."
"내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구나."
"제가 방금 지어냈거든요."
"............"
"모를만해요."
"지금 본녀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능소화는 설향의 말장난에 화가 난 것인지 언성을 높였다.
"친해질 겸 농을 한 번 건네봤어요."
"본녀는 그대와 친해지고 싶지 않구나!"
"에이, 화내지 말아요."
능소화와 설향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분명 한 명만 무시해도 단절될 대화이건만 그 둘은 누구 하나 말을 멈추는 이가 없었다.
선우와 마부장은 그런 그녀들의 기 싸움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선우는 당황하였다.
설마 마차에 탄 설향이 저렇게 성난 멧돼지처럼 거침없이 들이박을 줄은 상상도 못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장난을 빙자한 기 싸움을 걸었고 능소화와 대치를 하게 되었다.
처음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진듯싶었다.
규중심처에서 고귀하게 자란 것 같은 능소화가 아미파라는 여초 집단에서 먹이사슬 최상위에 군림하던 설향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녀는 설향의 장난을 빙자한 독설에 말려들기 시작하였고 몇 번이고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저리 당할 정도면 그냥 무시할 법도 하건만 능소화는 무시는 커녕 설향의 독설에 하나 하나 반응을 하여 놀리는 맛을 첨가해주었다.
둘의 싸움은 마차를 타는 내내 계속되었고 소리가 비는 시간이 없었다.
선우는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그곳에는 입을 턱하고 벌리고 있는 마일권의 모습이 보였다.
대략 반나절정도 기절하고 일어난 마일권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 마차에 올라탄 그는 지금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제일검 이연 장군과 함께 황궁을 지키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불리우는 그녀가
천자天子의 피를 이어받아 중원에서 그 누구보다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녀가
고고하고 도도하고 위엄이 절로 풍겨져 나오는 그녀가
이제 막 약관이 될 법한 계집과 언성을 오가며 싸우고 있었다.
마부장은 혹여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꼬집
그리고 이내 손을 들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그렇다면 꿈은 아니라는 소리인데 어찌 이런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진다는 말인가?
그녀들끼리 오가는 말은 황실의 안위나 중원의 정세 그리고 북방의 토벌과 같은 무거운 주제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유치하고 가볍기 그지없는 말장난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귀하기 짝이 없는 경화군주가 어찌 저런 면모를 보인다는 말인가?
이건 마치 평범한 여인들 간의 말싸움이 아니던가
마부장은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그만큼 경화군주의 새로운 일면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마부장은 멍하니 그녀들의 말싸움을 바라볼 뿐이었다.
***********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로다!"
설향이 본인의 마차에 돌아간 후 능소화는 화가 난 듯 말을 내뱉었다.
없는 사람 욕을 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한 마디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쩜 그렇게 신경을 긁는 말만 쏙쏙 하는지 본녀는 알 도리가 없더구나!"
"그런 것치고는 잘 놀던데?"
능소화의 말을 듣던 선우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놀다니!? 본녀가 그저 상대해준 것일 뿐이다!"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는 발끈하듯 소리쳤다.
"싸움이라면 본디 수준에 맞는 상대끼리 성립하는 법. 그 여인은 내 높디높은 수준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글쎄 비슷해 보이던데?"
"그대도 본녀를 무시하는 것인가!? 어찌 중원인들은 이리도 무례하다는 말인가!"
선우의 반응을 본 능소화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제 막 약관이 된 아해가 뭐 그리 말대답이 많다는 말인가!"
"꼰대."
"꼰대가 무엇이더냐?
"좋은 말이야. 딱 너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거짓말을 하였다.
"뭐,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이를 가지고 어찌나 밉살맞게 구는지, 내 무공만 멀쩡했었어도 머리통을 쥐어박을 것이다."
"그건 좀 심하긴 했지. 나도 눈치챌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에 선우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우도 나이 공격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와는 달리 중원은 결혼 적령기가 약관이었다.
그 이상 나이를 먹게 된다면 꼼짝없이 노처녀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물 여덟인 능소화의 경우 노처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노처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말이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여인이다!"
그녀는 성을 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희들 하루종일 수다 떨면서 온 거 알아?"
"모른다!"
"나는 너희들이 은근 재밌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격한 반응에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놀림밖에 안 받았다!"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는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하루종일 그 쪼그만 여자한테 놀림만 당하였다.
그것도 화내기엔 쪼잔하고 그렇다고 넘어가기엔 복장이 뒤집힐만한 놀림을 말이다.
그런데 어찌 그런 것을 즐길 수 있냐는 말인가
"그럼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할까?"
"..........."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 입이 잘 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그렇게까진 안해도 된다."
이내 능소화는 천천히 입을 열어 거절을 표하였다.
"꼴도 보기 싫다며?"
선우는 재밌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꼴도 보기는 싫으나 오늘의 설욕을 못 하였다. 내일 올 때는 눈물을 좔좔 흘리게 해주겠노라!"
그녀는 선우를 바라보며 당당히 말하였다.
그렇다.
오늘 하루종일 놀림만 받았다.
이 수모를 설욕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설욕할 기회가 없지 않겠는가?
이건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말이다.
선우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겉으로는 싫다 싫다하지만 의외로 설향이 마음에 든듯하였다.
그녀를 이리저리 놀려먹었던 설향이었지만 의외로 선을 잘 지켰던 그녀였다.
적발이나 적미 그리고 적안같이 누가봐도 이질적인 곳을 놀릴 법도 하건만 그런 것에 대한 조롱은 일절 없었다.
자신만의 적정선을 긋고 그 안에서 놀린 기분이랄까?"
그런 그녀의 독특한 화술에 능소화는 호감을 느낀듯싶었다.
물론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듯했지만 말이다.
선우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설향이 합석해서 은근 걱정을 하였던 그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능소화와 잘 맞는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는 동안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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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별로라니까! 초면인 주제에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는 대체 뭐야!"
설향은 운혜에게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 고주알 내뱉기 시작하였다.
"그래요?"
운혜는 그런 설향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워낙 과장이 심한 사저였기에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무게를 잡는지 알아? 사매가 봤어야 해!"
"그렇게 무게를 잔뜩 잡았나요?""
"그렇다니까! 나는 처음에 무슨 황족인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위엄 서려 있는 모습이긴 했어요."
"위엄은 무슨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딱 그 말이 딱 맞아! 완전 별로야!"
운혜의 말에 설향은 언성을 높이며 말을 하였다.
능소화에 대한 그 어떤 칭찬도 허해줄 수 없다는 그녀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쵸. 생각해보면 위엄보다는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긴 했어요. 특히 그 머리가...."
설향의 완강한 태도에 운혜는 나름의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매."
운혜의 맞장구를 들은 설향은 정색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네!?"
"어떻게 마음속에 부처를 품은 불가의 제자가 어찌 다른 이의 외견을 헐뜯을 수 있어? 사매는 그런 사람이었어?"
"아니...그.."
설향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운혜는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실망이야. 타고난 것을 가지고 조롱하거나 비웃으면 안 되는 거야."
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그리고 그녀에게 호되게 질책당한 운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억울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맞장구를 쳤을 뿐인데 어찌 호된 질책이 날아온다는 말인가?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고개를 푹 숙인 운혜는 천천히 입을 열어 사과를 하였다.
"알면 됐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그녀가 사과하자 설향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운혜는 그런 설향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