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 247.아량을 베풀다.
"하하...하하.."
선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운적자는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이룩한 모든 도가적인 수양을 내던지고 오직 파괴만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검환을 만들었다.
오직 선우를 이기기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검환이 그저 깨져버렸다.
너무나도 손쉽게 말이다.
어찌 웃음외에 다른 표현을 할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는 그저 허탈함만이 가득 차기 시작하였다.
"하나만....물어도 되겠나?"
어느새 웃음을 멈춘 운적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선우에게 물었다.
"얼마든지요."
그의 물음에 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하였다.
"어찌 내 검환이 깨져버린 것인가? 분명 검환의 크기는 내 것이 더 컸거늘……."
운적자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저 강기가 가진 힘의 차이지요."
선우는 운적자를 바라보며 담담히 답하였다.
"그럴리 없다네! 분명 강기의 크기는 내 것이 더욱 컸다는 말일세!"
선우의 말에 운적자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크기가 다가 아닙니다. 검환의 위력은 강기를 얼마나 압축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크기만 하다고 실속마저 갖춰졌다고 할 순 없지요."
선우는 그런 운적자를 쳐다보며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무언가 깨달은 듯 탄식을 내뱉었다.
순간 선우가 한 말이 단박에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검환은 그저 크기만 키운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선우가 만들어낸 검환은 그 안이 꽉 찰 정도로 압축이 돼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하..하"
그의 말을 깨달은 운적자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더 무리하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건만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닿기에는 선우는 아득히 높은 경지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을 휘감고 있던 패배감과 열등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수준이 맞아야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낄 것이 아닌가?
이미 자신보다 아득히 위에 있는 경지에 도달한 선우에게는 그런 감정조차 생기지가 않았다.
그저 논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검황 양태산이나 절대무신 이재원처럼 말이다.
그의 눈에는 허탈함과 회한의 감정이 서리기 시작하였다.
심마心魔가 사라지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은 연맹원이자 수색대원인 선우를 질투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무림의 선배로서 명문대파의 명숙으로서도 추하기 그지없는 행태를 벌인 것이다.
부끄러움과 치욕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최악이었다.
그저 청성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아집을 부렸으며 종국에는 추한 열등감에 휩싸여 연맹원인 선우를 진심으로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 어찌 추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무공에서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잠깐이나마 사도邪道를 걸었던 것이다.
온몸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미친 듯이 후회가 되었다.
자신의 모든 선택들이 말이다.
운적자는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털썩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니!?"
"사숙!"
"어찌 무릎을!?"
"사숙 대체 무슨!"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을 본 청성의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고작 청성의 삼대제자밖에 안되는 자신들과 다르게 운적자는 청성의 자랑이자 청성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한낱 후기지수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쿵
운적자가 그대로 머리를 땅에 박았기 때문이다.
청성의 제자뿐만 아니라 장내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청성의 제자들이 머리를 박았다는 이유만으로 검을 빼 들고 설향에게 달려들었던 운적자가 아니던가
그렇게 사문에 대한 명예를 중시 여기는 그가 어찌 선우에게 머리를 박는다는 말인가?
쿵
끝이 아니었다.
쿵
그는 몇번이고 머리를 들어올린 후 다시금 땅에 머리를 박는 것을 반복하였다.
어찌나 강하게 박아대었는지 그의 단정히 정리된 머리는 산발이 되었으며 이마에는 살갗이 까져 피가 철철 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용서라는 말로 해결하기엔 내가 저지른 죄가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운적자는 쉴 새 없이 머리를 박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장에라도 팔을 잘라 그대에게 바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수색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할 걸세!"
운적자는 애절한 어조로 선우에게 소리를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내 부탁함세. 수색대로서의 임무가 끝난다면 내 팔을 스스로 자르겠네. 아니 목숨을 달라 해도 주겠네. 그러니 제발 처벌을 유예해주세나."
운적자는 선우에게 부탁을 하였다.
그의 부탁은 용서가 아닌 처벌 유예였다.
북해를 수색하여 제자들을 찾을 때까지 처벌을 미뤄달라는 부탁 말이다.
선우는 그런 운적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냥 빚을 지워둔 채 유야무야 넘길 생각이건만 운적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심마가 든 것이라고 자신은 휘둘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는 심판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무림의 명숙으로서 무림의 선배로서
금기를 범한 자신을 말이다.
선우는 고민에 빠졌다.
정면에서 깨부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 차렸을 경우 작열독으로 조져버릴 요량이었다.
제자들 앞에서 똥오줌을 전부 지릴 때까지 수치를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더러운 흙바닥에 머리까지 박으면서 잘못을 인정하니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진심이었다.
선우는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인간인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을 해오고 있었다.
그것도 잘못의 용서가 아닌 유예를 말이다.
고루하고 융통성 따위는 전혀 없는 인간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쿵
쿵
쿵
쿵
그때 선우의 귓가로 이질적인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선우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릎을 꿇은 채 더러운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청성의 제자들이 보였다.
쿵
쿵
쿵
그들은 쉴 새 없이 땅에 머리를 박기 시작하였다.
"대협! 부디 사숙을 용서해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성의 제자들은 목이 터져라. 언성을 높이며 선우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사숙인 운적자가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을
그들이 평생토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혼자서 모든 비난과 규탄을 감수하는 불명예를 각오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머리를 박을 수 있었다.
세상에 더없는 하나뿐인 사숙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오직 청성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남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란 말이다!"
운적자는 머리를 박으며 외치고 또 외쳤다.
제발 자신 따위를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는 수치를 감수하지 말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제발 그만하라고 말이다.
쿵
쿵
쿵
하지만 그의 외침이 무색하게 땅은 더욱더 울리기 시작하였고 운적자의 눈가에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크흐으윽"
미안했다.
너무너무 미안하였다.
결국 자신의 그릇된 선택 때문에 자신의 수많은 후배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는 것이다.
어찌 미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운적자는 더욱더 강한 힘으로 땅에 머리를 박기 시작하였다.
살갗이 까지고 속살조차 까여 허연 두개골이 보이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선우가 용서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선우는 말없이 그런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 이마에 피가 철철 흘러내릴 정도로 격하기 그지없게 박고 있었다.
특히 운적자의 경우 살갗이 벗겨져 허연 두개골마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진행했다간 머리통이 깨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선우는 모든 이들이 들릴 수 있도록 내력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그러자 머리를 박고 있던 청성의 제자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이는 운적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 그대로 절하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운적자는 들으시오! 그대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소! 첫 째 청성에서 지원한 제자들을 이끄는 입장으로서 제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를 지었소. 나와 설 소저를 추문으로 엮은 청수에 관한 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오!"
선우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외쳤다.
"인정합니다."
운적자는 그런 선우의 말에 송구하다는 듯 답하였다.
"둘 째 그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들어 아미를 압박하였소! 물론 아미 측에서 멋대로 징벌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으나 여기서 분명한건 아미는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것이오! 충분히 참작하고 넘어갈 일을 꼬투리 잡아 명예를 회복하려는 아집을 부렸소. 인정하오?"
선우는 더욱더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인정합니다."
선우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답하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겪고 나니 나는 운적자 당신이 수색대를 이끄는 그릇으로서 마땅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소.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청성의 모든 작전 통제권을 요구하는 바요. 그뿐만 아니오. 추문을 만들어 퍼트린 청수의 경우 청성으로 보내어 직접적인 처벌을 요구하는 바요 게다가 청성의 공식적인 사과도 받겠소. 그리고 이제부터 마차를 모는 것은 물론 불을 피우는 것도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객잔을 잡는 것과 같은 모든 궂은일은 청성에서 도맡아야 할 것이오!"
선우는 진지한 눈빛으로 운적자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목소리에 내력을 담아 중앙 공터에 전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조치를 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중앙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운적자는 선우의 물음에 곧바로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운적자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뒤편에 있는 수많은 청성의 제자들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이쯤 하기로 하겠소. 다들 이마에 금창약 바르는 것 잊지 말고 푹 쉬시오."
그들의 대답을 들은 선우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끝낼 심산이었다.
"잠...잠깐!"
그때 운적자가 다급히 선우를 불렀다.
"무슨 일이오?"
선우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직 묻지 않은 죄가 있지 않소!"
운적자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선우는 하나하나 자신의 죄를 나열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가 말한 모든 죄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죄가 있었다.
바로 심마心魔에 들어 진심으로 선우를 죽이려고 한 죄였다.
그 어떤 죄보다 큰 이 죄를 어찌하여 묻지 않는단 말인가?
"무슨 죄 말이오?"
그의 물음에 선우는 모르겠다는 듯 그에게 되물었다.
"내 분명 그대를 해치려고 하지 않았소!"
"글쎄.....기억이 나지 않구려."
선우는 운적자의 물음에 시치미를 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동정하는 것이오!?"
그런 선우의 시치미에 운적자는 얼굴을 붉힌 채 소리쳤다.
운적자는 동정을 바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대로 처벌을 해주기를 원하였다.
지은 죄를 정당히 처벌받는 일만이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런 자신의 의지를 동정하며 무시한다는 말인가?
운적자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하였다.
수치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적자께서 실로 재밌는 말씀을 하십니다."
선우는 그런 운적자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은 뒤 말을 이었다.
"아까 전에는 그저 비무를 한번 나눈 것이 아닙니까?"
"무슨 소리요! 내 분명 그대를 죽일 심산으로...."
"운적자, 너무 오만하십니다."
선우는 그런 운적자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운적자께서 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뭐.뭐라?!"
"말 그대로입니다. 운적자께서 어떤 마음을 품었든 저는 생명의 위협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죄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선우는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 말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나는 분명 자네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일세!"
선우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어찌 자신의 잘못을 그런 식으로 넘어간다는 말인가?
용납할 수 없었다.
용납하기 싫었다.
"운적자, 그런 개인의 양심은 스스로 자책하거나 하십시오. 저는 생명의 위협은커녕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운적자의 죄를 묻는단 말입니까? 어불성설이지요. 다친 이가 없고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 데 말이죠."
선우는 그런 운적자를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듯 가벼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니...그래도!"
"저는 이미 할 말이 끝났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군요. "
말을 마친 선우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더 있다간 꼬장 꼬장한 운적자가 제발 처벌해달라며 우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선우는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운적자를 비롯한 청성의 제자들은 그런 선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선우가 운적자의 죄를 그냥 넘어가 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크윽"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빌미로 잡고 협박을 하여도 운적자를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리도 쉽사리 용서해준다는 말인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는 운적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진심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그걸 저리도 가볍게 용서한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 수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허리를 깊게 숙인 후 소리쳤다.
"빚을 졌소! 평생토록 잊지 않겠소!"
운적자의 눈가에는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빚을 졌습니다!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청성의 제자들이 허리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그들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허리는 선우가 자취를 완전히 감춘 뒤에도 여전히 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