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240.운적자, 검을 들다-1
운적자는 재빨리 중앙 공터로 몸을 날렸다.
쿵
한가운데 착지한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자 수많은 청성의 제자들이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장 머리를 들어 올려라!"
운적자는 그들을 바라보며 분노가 가득 담긴 호통을 터트렸다.
그는 지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명문대파라고 불리우며 구파의 일원으로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청성이었다.
수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극심한 재정난에도 결코 부정을 저지르지 않으며 학처럼 고고히 살아가던 청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청성의 제자들이 모두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혹여 다른 이가 아닐까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아도 그들은 청성의 제자였다.
남색 바탕의 학이 수놓아져 있는 도복을 입고 있는 청성의 제자 말이다.
화가 났다.
그것 어마어마하게 말이다.
그들은 청성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이리 쉽게 머리를 박는단 말인가?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단 말이더냐! 어서 머리를 들어 올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는 다시금 일갈을 내뱉었다.
그의 분노어린 외침에 머리를 박았던 청성의 제자들이 하나둘 머리를 들어 올리기 시작하였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정녕 청성의 이름을 먹칠할 셈이더냐!"
운적자는 여전히 머리를 박고 있는 청송과 청길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운적자는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을 듣지 않겠다면 강제라도 말을 듣게 할 속셈이었다.
어마어마한 내력이 그의 몸 주위를 감싸기 시작하였다.
"용서하겠습니다. 그만 머리를 드세요."
그때 뒤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청성의 제자들이 하나둘 머리를 들어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본 운적자는 더욱더 분기탱천하였다.
자신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던 주제에 어찌 저 여인의 말을 듣는단 말인가?
이 배분조차 무시하는 기사멸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머리를 들어올린 청송은 눈앞에 있는 운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살기가 가득 서려 있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꿀꺽
청송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청성제일검이라는 칭호를 가진 청성 최고의 고수.
그런 고수가 죽일 듯이 내려다보는데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살기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청송은 그저 사죄를 할 뿐이었다.
청성의 이름을 먹칠을 한 자신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송구한 마음으로 잘못을 빌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사과가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란 말이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청길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호라...좋다. "
청길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눈을 빛내며 그에게 말하였다.
"대신 나를 납득시키지 못할 경우 네놈들 모두 기사멸조의 죄목으로 엄중히 처벌할 것이리라"
그는 살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협박하듯 그를 쏘아보았다.
덜 덜 덜
그의 살기에 노출된 청길은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하였다.
화경을 바라보는 경지에 이른 그의 살기는 고작 절정에 이른 청길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우....후우...후우.."
청길은 심호흡을 몇 번이고 하고 나서야 간신히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몸을 진정시킨 그는 천천히 운적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청성의 제자가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청성의 모든 이들이 사과를 한단 말이더냐!"
"아미의 제자인 설향 소저와 아미파 전체를 모욕하였습니다."
"뭐라!?"
그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놀라 되물었다.
어찌 정파의 동량이라는 그들이 그런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더구나 설향을 모욕하였다니!?
그녀는 아미의 장문인인 구월신니의 제자가 아니던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건드린단 말인가?
"그 추문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더냐!"
"설 소저와 장 소협간의 염문설입니다."
"부족하다! 염문설만으로 청성의 모든 제자들이 머리를 박는단 말이더냐! 청성의 이름이 그리 가볍게 느껴진단 말이더냐!"
그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소리를 치며 반박을 하였다.
물론 염문설 자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수치스럽고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춘 남녀가 같이 있다 보며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이 염문설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자잘한 일로 청성의 제자들이 전부 머리를 박는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염문설이 끝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 둘이 야밤에 몰래 빠져나가 음행淫行을 벌였다는 추문마저 퍼트렸습니다.
"..........뭐..뭣이!?"
그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찌 아미의 제자를 그런 추문에 엮는단 말인가
그것도 이미 정혼자가 있는 당가의 사위와 말이다.
이는 아미파와 당가의 후계자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던가.
중원에서는 여인의 정절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오죽하면 수궁사까지 찍어 그 처녀성을 확인까지 하겠는가?
그렇기에 여인의 정절에 관한 소문은 더욱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 스스로뿐만 아니라 사문과 가문마저 불명예를 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친 일이었다.
아미파의 최고 후기지수이자 장문인의 제자인 설향과 독왕의 후계자이자 당가의 데릴사위인 장선우를 엮어버리다니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던가
"정녕 그런 이유더냐?"
운적자는 청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
청길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들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청수는 어디 있더냐."
운적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청길에게 물었다.
"이쪽입니다."
그의 물음에 청길은 한쪽 귀퉁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운적자는 그의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것에는 양뺨의 살갗이 터져나가 속살이 비추고 있는 청수의 모습이 보였다.
팔 또한 부러졌는지 기형적인 모양으로 꺾여져 있는 상태였다.
처참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
운적자는 얌전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수를 저렇게 만든 이가 누구더냐."
"설향 소저입니다."
"그렇군."
말을 마친 운적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설향을 응시하였다.
꾸벅
"소저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내는 바요."
운적자는 허리를 숙인 후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그 모습을 본 청성의 제자들은 경악을 하였다.
청성의 대들보라 불리우는 그가
청성제일검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제 삶의 반절도 살지 않은 계집에게 허리를 숙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을 굽혀버린 것이다.
"............."
그 모습을 본 설향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운적자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일 줄은 상상도 못 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청성 최고의 고수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는 상상을 말이다.
"........이제 충분합니다. 그만 허리를 펴세요."
그녀는 운적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운적자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다시금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였다.
"제자의 잘못은 곧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사문의 잘못이오. 깊이 사과드리리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설향은 살짝 고개를 주억거리고 담담한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운적자의 폭급한 성격이라면 분명 칼을 빼 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허리를 숙여 깊게 사과하였다.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스르르릉
그때 그녀의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놀란 그녀는 토끼눈을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에는 어느새 검을 빼어든 운적자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뜻이죠?"
그녀는 운적자를 바라보며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청성의 제자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깊게 사과한다. 내 이번 일은 사문에 보고하여 공식적인 처벌을 내릴 심산이다."
그녀의 물음에 운적자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느냐?"
"해결해야 할 일이라뇨?"
"청성의 명예회복이다."
그녀의 물음에 운적자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다. 청성은 그대로 인해 불명예를 지게 되었고 나는 이 명예를 회복할 심산이다."
"어찌할 생각인가요?"
"일단 그대를 청수와 같은 꼴로 만들고 아미의 모든 제자들이 땅에 머리를 박는 꼴을 봐야겠다."
운적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아미의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의 말을 들은 설향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아미에게 용서를 받고자 한 청성의 행동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걸 어찌 그대로 돌려받는단 말인가?
"말이 안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너희들이 청성에 그대로 행한 일일 터인데."
"그건 청성이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과정이 아니던가요?"
"그걸 왜 네가 정한단 말이냐?"
"뭐라고요!?"
"그런 일이 있다면 사문에 보고하고 직접적인 사과를 받아야 마땅할 터인데. 어찌 네가 멋대로 판단하고 멋대로 다른 청성의 제자를 병신으로 만들고 멋대로 청성의 제자들의 무릎을 꿇린단 말이더냐!"
그녀의 반문에 운적자는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운적자는 알고 있었다.
청수가 심각한 중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려 아미와 당가를 적으로 돌릴 정도의 중죄를 말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청수를 만신창이로 만든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은 달랐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는 어마어마한 울화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청성의 제자가 잘못을 했다지만 이는 청성에 직접 항의할 문제다.
결코 그녀 혼자서 독단적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청성의 제자를 처벌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청성의 제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다는 말인가?
수색대의 파견된 이들은 모두 청성에서 유망하기로 소문난 제자들이었다.
차세대 청성을 이끌어갈 후학들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이들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다.
아마 수십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슴에는 이날의 치욕이 남을 것이다.
청성은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청성을 이끌어갈 인재들이 자존심 굽히고 무릎을 꿇었으며 땅에 머리까지 박는 수치를 기억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검을 빼 들었다.
적어도 이 수치를 무마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요?"
설향은 그런 운적자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큰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똑같이 받아낼 뿐이지."
설향의 말에 운적자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스르릉
운적자의 말을 들은 설향은 옆구리에 매여있는 검대에서 검을 뽑았다.
더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미 입장에서는 한없이 큰일이랍니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청성에게 치욕적인 사과를 받아낸 것은 이번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부분의 제자들이 설향과 선우가 얽힌 추문에 대해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유야무야 넘겨버린다면 문파의 위상이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무림 문파에서 명예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오로지 이 명예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인이었다.
이는 아미파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렇게 유야무야 넘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아미파는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설향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떨어진 문파의 위상을 다시 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청성의 수치스러운 사과를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하였다.
이 정도라면 아미파에서도 넘길 수준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갑자기 등장한 운적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다짜고짜 칼을 빼 들었기 때문이다.
설향은 골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된다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검은 매서울 것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운적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흉흉하기 짝이 없는 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향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치켜세웠다.
마냥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주위에 황금빛 기운들이 일렁이더니 중앙 공터를 뒤덮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