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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209화 (210/1,419)

〈 209화 〉 210.조언을 구하다.

"뭐가 문제인데, 지껄여봐."

당서윤은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문제랄것까진 아니고 그냥....내가 그 자리에 굳이 있을 필요가 있었나 의구심이 들어서...내가 없어도 원만하게 해결됐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뭘 모르는 소리야."

선우의 말을 들은 당서윤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들이 애초에 모이게 된 원인이 누군지 망각한 거야? 바로 너잖아. 그런데 당사자도 없이 서열을 정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래?"

"당대부인과 옥령 선배가 너를 부른 이유는 당사자인 너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야.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그리고 어떤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도출해낸 결론인지 말이야."

당서윤은 무척이나 담담한 표정으로 선우에게 말하였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선우는 모르겠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그저 은근히 알려주기만 했어도 될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확인시켜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녀들은 소모적인 기 싸움을 한 게 아니야.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행동양식을 정한 거지."

"뭘..그렇게 까지야.."

선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당서윤이 별것도 아닌 일을 너무 거창하게 말한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야, 애초에 기강이 제대로 안 잡힌 집단은 내부가 곪아버릴 수밖에 없어."

"평등하게 대해주면 좋은 거 아니야?"

선우는 의문이 들었다.

서열같은 것은 없이 모두 평등하게 지내면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좋아 보이겠지. 하지만 네가 모르는 곳에서 엄청난 암투를 벌일지도 모르지. 현 천무맹주를 보면 알 수 있잖아?"

"이..재원?"

선우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재원의 존재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새끼가 갑자기 왜 나온단 말인가?

"현 천무맹주도 자신의 부인들에게는 서열 따윈 필요 없다며 모두 평등하게 대할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거든 그런데 그 결과는 어땠을 것 같아?"

"글쎄?"

"개판이 났어. 서로 누가 위고 아래인지 정해놓지 않으니 부인들 간의 서열이 꼬여버린 거지. 서로 반목하길 반복하였고 원수 같은 사이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졌지. 너 천무맹주의 부인이 원래 몇 명인지 알아?"

"흐음....여덟 명 아니야?"

선우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천검후 주소양과 봉황당주 강하윤 그리고 육대세가의 부인들이 있으니 그 숫자는 여덟이었다.

"틀렸어. 천무맹주는 원래 아홉 명의 부인을 가지고 있었어."

"뭐!?"

그녀의 말에 선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장삼과 기억이 동조된 그였다.

이십여 년을 천무맹에서 보낸 장삼조차 모르는 부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고인이 돼버렸지만."

"난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

"당연히 없겠지. 무림에 숨겨진 비사 중의 비사니까."

"비사?"

"그래, 십년 전쯤인가 천무맹주가 하오문주의 제자인 하수란이라는 여인과 하룻밤 정을 통한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하룻밤만에 덜컥 임신이 돼버린 거야. 하오문주는 그 사실을 맹주에게 알렸고 맹주는 그녀를 아홉 번째 아내로 들이겠노라 하오문주에게 약조를 하였어."

"그런데 왜 그 일이 비사가 된 거야?"

선우는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녀가 아홉 번째 부인이 되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거든."

"죽음!?"

그녀의 말에 선우는 놀란 듯 되물었다.

"맹주는 혼전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하수란에게 출산 후 공식적으로 아홉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겠다고 약조했어. 물론 그녀에 대한 대우는 여타 다른 부인들과 다름없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그 차별 없는 대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어."

"무슨 문제?"

"부인들의 질투를 사게 된 거야."

"질투?"

"당시 맹주의 부인들은 다들 출산 경험도 있고 혼인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난 탓에 맹주와 사이가 소원한 상태였거든 그런데 갑자기 어리고 예쁜 하수란이 임신한 상태로 덜컥 부인 자리에 들어오게 된 거야. 질투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지."

"그래서?"

"질투심에 가득 찬 부인들은 그 후로 하수란을 괴롭히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노골적인 무시나 방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가 지나쳐지기 시작했지. 방에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갖다놓는 것은 물론 머리맡에 칼을 가져다 놓기도 했지."

"아니 무슨 애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선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여자의 질투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음습하고 더러우면서 저열해. 특히 무림의 여인들은 더욱더 그렇지."

선우의 물음에 당서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걸 가만히 있었대?"

"당연히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 맹주에게 하소연도 해보고 그만둬달라고 맹주의 부인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무릎까지 꿇으면서 부탁까지 했다고 하더라고. 물론 그렇게 애절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지만 말이야."

"허어"

선우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행태가 상상 이상으로 잔인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계속되는 살해 위협과 괴롭힘에 하수란의 정신은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졌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아."

꿀꺽

"그게 뭔데?"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목을 맸어. 자신의 처소에서."

".........."

"하루하루 피가 말리는듯한 정신적인 고통을 견딜 수가 없던 거지."

"........그래서 비사가 된 거야?"

"그렇지, 애초에 맹주 뿐아니라 그의 부인들의 치부이기도 하였고 어차피 공식적으로 공표된 것도 아니라서 묻어버리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선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괴롭힘으로 강건하기 짝이 없는 무인마저 자살하게 만든단 말인가?

"너는 어떻게 알게 됐는데?"

선우는 당서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림에 숨겨진 비사를 어찌 그녀가 알고 있다는 말인가?

"하수란은 내 친우니까."

"뭐!?"

선우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당가에 박혀서 평생을 무공만 익히던 그녀에게 친구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오라버니와 하오문주가 친분이 있었거든 몇 번인가 제자인 하수란을 데리고 당가를 방문하였고 마침 또래였던 나와 친우가 되었지."

"아..."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한 친우를 잃은 그녀의 처지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이미 십 년이나 지난 일인걸?"

선우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눈치챈 것인지 당서윤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

그녀의 말에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동정 어린 시선이 더욱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볼 때 수란이가 왜 죽은 것 같아?"

"이재원 마누라들의 질투 때문 아니야?"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천무맹주가 서열 하나 없이 평등을 추구했기 때문이야."

"평등?"

"그래, 결국 그녀들은 천무맹주와 십년의 세월을 함께한 자신들과 평등한 대우를 받는 하수란을 질투했던 거니까."

"억측이 아닐까? 이재원 마누라들이 다 나쁜 년인 거잖아?"

"물론 천무맹주의 부인들의 행동을 합리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만약 그녀들 간의 서열이 제대로 잡혀있는 상태였더라면 질투로 인해 사람이 죽어 나가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확신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수란이도 그렇게 허망이 떠나지는 않았겠지."

말을 마친 당서윤의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선우는 의아하면서도 연민이 들었다.

담대하고 딱딱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당서윤에게 저런 슬픔이 있었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항상 강철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던 그녀가 지금은 비를 맞은 작은 새보다 더욱 연약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보자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천천히 당서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 들었다.

비록 큰 위로가 되진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진정은 되리라

하지만 그런 선우의 위로는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안으려고 벌린 손을 당서윤이 손바닥으로 내리쳐버렸기 때문이다.

"누가 개수작 부리래?"

그녀는 선우를 바라보며 짧게 으르렁거렸다.

"아니..나는 위로를."

선우는 억울한 듯 나름의 항변을 하였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갔건만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말로 해"

그런 선우의 태도에 당서윤은 짧게 일축하였다.

"이게 말보다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게 심신 안정에 좋다더라."

"꺼져."

선우의 말해 당서윤은 어림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응."

그녀의 거절에 선우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였다.

괜스레 잡음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론은 서열 정리를 안 해놓으면 개판이 난다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평등, 평등거리면서 등신같이 행동하지 말고 그녀들이 정한 서열에 맞게 제대로 대우해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모르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일 먼저 존중부터 해줘야지. 옥령 선배가 첫 번째라는 사실을 항상 강조하면서 되새겨야 해. 누군가 까먹지 않도록 말이야."

"존중이라..."

"네가 존중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도 존중하지 않을 테니까"

"그도 그렇네."

"그리고 만약 처첩을 더 들일 일이 있으면 옥령 선배께 제일 먼저 말해야 해. 그럼 옥령 선배가 알아서 서열을 정할 거야."

"무슨 소리야! 나는 정인을 더 늘릴 생각 없어!"

그녀의 말에 선우는 발끈하며 답하였다.

두 명도 벅찬데 무슨 처첩을 더 늘린다는 말인가?

"만약의 경우 그렇다는 얘기지. 뭘 그리 정색을 해?"

선우의 반응에 당서윤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거야.....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사람 일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잖아. 안 그래?"

선우의 말에 당서윤은 살짝 웃으며 답하였다.

그리고 선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당서윤의 미소는 여전히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야."

그때 당서윤이 달콤한 목소리로 갑자기 선우를 불렀다.

"응...응?!"

상념에서 깬 선우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일각 됐어. 꺼져"

당서윤은 선우에게 축객령을 내렸고 선우는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더 있다간 당서윤의 손에서 암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선우는 곰곰이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과연 서열에 맞게 대우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

"하아"

청수하게 생긴 노인이 둥그런 보름달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찌할꼬.."

그리고 탄식을 내뱉으며 말끝을 흐렸다.

노인은 진한 남색바탕에 학이 자수되어 있는 고급진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생김새만으로도 노인의 신분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적송자로 구대문파 중 하나인 청성의 장문인이었다.

무척이나 야심한 밤이지만 그는 잠에 들지 못하여 그저 둥그렇게 떠오른 보름달만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잠이 안 오십니까 장문인"

그때 뒤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적송자의 귓가에 들려왔다.

적송자는 뒤편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에는 마찬가지로 남색의 도복을 입은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운적자."

그렇다.

뒤편에서 적송자에게 말을 건 이는 청성의 장로이자 청성제일검이라고 불리우는 운적자인 것이다.

"어찌 오늘도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내 어찌 생사를 알 수도 없는 청성의 제자들을 두고 잠을 청할 수 있겠는가?"

"장문인 잘못이 아닙니다."

"아니, 내 잘못일세. 돈 욕심에 그 먼 곳으로 제자들을 보냈으면 안 됐었어."

적송자는 죄책감이 서려있는 슬픈 눈으로 운적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돈 욕심이라뇨! 그런 소리 마십시오! 장문인께서 사욕을 위해 쓰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적송자의 말에 운적자가 항변하듯 소리쳤다.

운적자는 알고 있다.

장문인인 적송자가 망해가는 청성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말이다.

장문인이라는 문파의 장이라는 엄청난 직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를 일절 하는 법이 없었으며 청성의 빚을 갚기 위해 일개 전장주에게 머리까지 숙이는 불명예스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운적자는 알고 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몇 번이나 기워입었는지

운적자는 알고 있다.

당가와 계약을 한 덕분에 재정적인 압박이 사라진 지금도 겨울에는 불조차 때지 않고 내력을 운용하여 버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운적자의 사부이자 전대 장문인인 적허자로 인해 파산 위기에 몰렸던 청성을 구해낸 영웅이었다.

비록 무명을 널리 알리거나 협명을 널리 알리지는 못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운적자를 비롯한 청성의 모든 문도들에게는 그 어떤 누구보다 존경하는 장문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문인이 자책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아닐세...내 잘못이야..전부 내 잘못이야."

적송자는 무척이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말을 되뇌이기 시작하였고 그 모습은 운적자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적송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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