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208.서열 정리-1
"잊지 않아. 어떻게 너처럼 사랑스러운 여자를 잊을 수가 있겠어."
선우는 그녀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마. 네가 날 배신하지 않는 이상 내가 너를 버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야."
"정..말인가요?"
선우의 말을 들은 당대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내게 운가려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중 하나야. 그런 소중한 이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흐극"
"물론 살다보면 싸울 수도 있고 서로 화를 낼 수도 있고 속상한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너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을거야.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당대부인은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흑..흑...흑"
한 번터진 울음은 봇물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녀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울음에 선우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분명 자신은 그녀를 위로 한 것 같은데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하였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흐아아아아앙!"
그리고 그가 생각에 빠진 사이 당대부인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선우는 난감함을 느끼며 일단 그녀를 달래자는 생각을 하였다.
"가려..미안해..내가 또 무슨 말실수를 한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우는 당대부인을 바라보며 일단 무작정 사과를 하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를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떄문이다.
"흑,..흑,.,아니에요...흐극...선우..탓이..흑..아니에요."
산우의 사과에 당대부인은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슬..퍼서..가..아니라..기뻐서..그래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우에게 말하였다.
"기쁘다고?"
그녀의 말에 선우는 의아한 듯 물었다.
"버리지 않겠다고....잊지않겠다고.....미워하지 않겠다고...약속해주셨으니까요.."
당대부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행복감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우의 약속은 버려질까 두려워하던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중 하나란다.
옥령에게 은근한 열등감을 느끼던 그녀였다.
이미 남편도 있었고 애도 둘이나 낳은 그녀 입장에서는 아름답고 현숙한 옥령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선우의 말은 마치 옥령과 동등하다고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해요...상공....세상..누구보다..사랑하고..또..사랑해요."
당대부인은 선우의 가슴팍에 더욱 파고든 후 사랑을 속삭였다.
"나도 마찬가지야....사랑해.가려."
선우 또한 그녀를 더욱 따스하게 안아주며 사랑을 속삭였다.
둘은 그렇게 오래도록 부둥켜안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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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상공 결국 저 때문에 모든 일이 꼬인거네요...전 그것도 모르고..."
선우에게 속사정을 들은 당대부인은 눈물을 글성이며 사과를 하였다.
자신을 달래주느라 옥령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고 결국 그 일이 시발점이 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야, 애초에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내 잘못이 제일 커....너와 옥령 모두 충분히 화나고 서운할 만한 일이었어,"
당대부인의 자책 어린 말에 선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을 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 모든 일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선우의 업보였다.
"옥령 소저와는 잘 푸셨나요?"
"응, 살짝 언성이 오가긴 했지만…. 어찌어찌 잘 풀었어."
"그렇군요...."
선우의 말을 들은 당대부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고심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고 선우를 바라보았다.
"상공."
당대부인은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응?"
"옥령 소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갔다와."
그녀의 말에 선우는 시원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마 그녀와 있었던 오해를 풀고 싶은 듯하였다.
"아니요. 상공까지 포함해서 삼자대면으로요."
당대부인의 선우의 말에 도리질 치며 말을 이었다.
"............뭐?"
그녀의 말에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서로 껄끄러운 관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뭣 하러 자신까지 대동하면서 삼자대면을 한다는 말인가?
"이번 기회에 그녀와 확실히 관계 정립을 할 생각이에요."
선우가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자 당대부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관계 정립?"
"네, 두 여인이 한 남자를 정인으로 두고 있어요. 불화가 생기지 않으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겠죠. 그리고 그 불화의 원인은 보통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당대부인은 확신에 찬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불화가 커지고 커지다 보면 불만이 될 거고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파국이 되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옥령 소저와 저 사이의 관계 정립이 필요해요."
"그...그런가?"
당대부인의 말을 들은 선우는 모르겠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진짜 몰랐기 때문이다.
현대인인 선우가 어찌 두 여인을 정인으로 뒀겠는가?
바람 한 번 펴본 적 없는 그였다.
애인 간의 기 싸움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네, 그렇게 해야 해요. 이래 봬도 당가의 안주인이랍니다."
선우의 물음에 당대부인은 얕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하였다.
당대부인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했다.
정실 부인만 다섯명이 있던 당가였다.
그리고 이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들과 수도 없는 기 싸움을 벌였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관계 정립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선우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인간은 서열화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본능적으로 상대를 재본다.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얼마나 똑똑한지 말이다.
그다음 판단을 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아래에 있는 존재인지 말이다.
그리고 확립된 서열에 따라 행동양식을 달리한다.
서열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다른 이와 비교를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찾는 것을 말이다.
처첩 사이에도 이 서열화하는 과정은 무척 중요하였는데 이 서열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을 경우 집안에 큰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제대로 정하지 않는다면 불화가 쌓이고 이 불화가 어느 순간 도를 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심각한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첩을 여럿 두는 남편을 둔 본부인의 경우 제일 먼저 서열화를 통해 위치를 지정해준다.
그리고 이 위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곧바로 규탄하고 비난하며 심하면 그대로 쫓아내 버린다.
그만큼 본부인의 권력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당대부인은 부인만 다섯이나 되는 당진철의 본부인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서열 정립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해박하였다.
이 서열이 안 잡히면 기강이 흐트러지고 집안의 불화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우에게 옥령과의 서열 정립을 위한 자리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선우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옥령과 당대부인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주선 장소는 당가의 외곽 쪽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당대부인은 떨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당대부인은 굴러들어온 돌과도 같은 신세였다.
선우는 원래부터 옥령이라는 본처가 있었고 자신은 후에 들어온 후처에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분명 본처 입장에서는 자신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것이다.
"후우"
당대부인은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번뜩였다.
그녀는 오늘 본처라고 불리우는 옥령을 재볼 것이다.
과연 본처의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 말이다.
그리고 만약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서게된다면 가차 없이 잡아먹어버리리라
당대부인은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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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옥령과 정자에 오붓이 앉아 당대부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까지는 아직 일렀지만 그래도 늦는 것보단 낫다며 빠르게 도착한 그들이었다.
선우는 곁눈질하며 슬쩍 슬쩍 옥령의 모습을 쳐다봤다
옥령은 오늘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하지도 않던 화장을 옅게 한 후 꽤나 고급져보이는 백색 바탕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선계에 살고 있는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온 줄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여자는 화장빨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옥령은 그 반대인 듯하였다.
화장이 얼굴빨 받은 것이다.
꼴깍
선우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연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당장에라도 덮쳐들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기 때문이다.
또각 또각
그렇게 선우가 옥령의 아름다운 자태를 구경하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소리가 선우의 귓가를 간질이기 시작하였다.
옥령은 쳐다보던 선우는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각 또각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매혹적이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미부를 말이다.
옅게 화장한 옥령과 대비되게 색조가 있는 약간 진한 화장을 한 얼굴.
화려하기 그지없는 적색바탕의 비단옷
게다가 귀에는 금으로 된 장신구가 한 가득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강탈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인은 선우를 보며 환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늦었죠?"
"어서와요. 당대부인."
그녀의 말에 들은 옥령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하였다.
삼자대면이 시작된 것이다.
*********
`하아....망할`
선우는 속으로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분위기가 그를 감쌌기 때문이다.
당대부인의 요청대로 옥령과 자리를 마련해준 그였다.
무언가 서로 간에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리송하긴 하였지만 아무래도 현대인의 사고 방식을 가진 자신보다야 부인만 다섯을 둔 당진철의 본부인이었던 당대부인의 의견을 따르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리를 마련해주니 한 마디조차 안 하고 서로를 유심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당대부인이 도착하고 정자에 앉은 후 둘 사이에는 그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옷매무새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선우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에라도 다 때려치우고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였다.
화경에 이른 선우가 압박을 느낄 정도로 두 여인이 만들어낸 분위기는 상상 이상의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우는 고민하였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운을 띄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내 도리질을 쳤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자신이 뭣도 모르고 지껄였다가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선우였다.
애초에 역마살이 가득 껴있는 그가 아니던가
선우는 침묵을 택하였다.
두 여인 중 누군가는 입을 열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옥령 소저, 제가 왜 소저와 자리를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는지 아시나요?"
마침내 당대부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옥령에게 물었다.
선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야 일이 좀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짐작가는 바는 있으나 확신이 서지는 않네요."
그녀의 물음에 옥령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소저와 자리를 주선한 것은 바로 서로 간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예요."
"관계 정립이요?"
"서로 같은 지아비를 섬기는 몸으로서 어찌 서로 간의 관계 정립이 없을 수 있겠어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갈까 해요."
"그렇군요."
당대부인의 말에 옥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예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 두고두고 볼 사이인데 상호 간의 호칭 정리와 같은 관계 정립은 필요한 일이었다.
"옥령 소저는 연배가 어떻게 되시나요?"
"네!?"
그녀의 물음에 옥령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나이는 왜 묻는다는 말인가?
"나이요. 나이..그냥 보기에는 이립이 살짝 안될 것 같은데……."
당대부인은 말끝을 흘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꼭...아셔야 되나요?"
옥령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지천명을 넘어선 그녀였다.
비록 젊은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나이를 밝히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곳에는 사랑해마지않는 선우가 있지 않은가?
그의 앞에서 나이를 까발린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나이를 모르면 제대로 된 호칭 정리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녀의 물음에 당대부인은 담담히 물었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상당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서열을 정할 때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나이였다.
비록 자신이 후처의 신분에 가깝기는 하나 나이로 깔아뭉갠다면 본처의 자리를 넘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옥령의 나이는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로밖에 안보였다.
나이를 따지면 누가 봐도 자신이 위인 것이다.
당대부인은 기대되는 마음으로 옥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우우"
한편 그녀의 말을 들은 옥령은 울상이 되었다.
평생 꼭 꼭 감춰두려고 했던 나이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자신과 당대부인의 관계는 완전히 꼬여버리게 될 것이다.
"..지...천..명"
옥령은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였다.
"네? 뭐라고 하셨나요?"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인지 당대부인은 그녀에게 다시금 물었다.
"으으으"
옥령은 수치심에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지천명이요."
옥령은 당대부인이 들을 수 있도록 한자 한자 또박 또박 발음을 하여 그녀에게 말하였다.
"지천명이요!?!?"
이내 그녀의 말을 들은 당대부인은 경악에 휩싸인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에..."
하지만 다시금 들려온 대답은 그녀의 뇌를 일순간 정지시켰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당대부인은 벙찐 표정으로 옥령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