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177.천월궁天月宮-3
선우는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위화감에 정체는 과거에 겪었던 일이 그대로 보여졌기에 나타난 괴리감이었다.
선우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현대로 돌아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꽈지직
그때였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선우의 귓가를 강타하였다.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자취방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소형 냉장고, 밥상, 침대, 핸드폰 심지어 아버지까지 말이다.
챙그랑
이내 모든 풍경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다시금 넓은 평야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하아`
그 모습을 본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환영에 깜빡 속을 뻔한 것이다.
오싹
선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변환영무연진(千變幻影霧煙陳)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눈치를 채지 못했다면 그대로 환영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리라
`잠깐만, 천변(千變)?`
선우는 순간 머릿속에 거슬리는 단어가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해서 천변(千變)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주위의 환경이 다시금 바뀌어가기 시작하였다.
`시발`
선우는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환영이 끝나지 않은 듯 했다.
*********
주위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선우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바뀐 환경에도 선우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고급진 장식과 푹신한 침대가 보였고 고급 향냥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내 선우는 방안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 바뀐 곳은 당세기의 방이었다.
선우는 의아함이 들었다.
갑자기 당세기의 방이 왜 나온단 말인가?
독왕으로 변모하고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지던 곳이었다.
그런데 무슨 추억이 서려 있다고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어?"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선우의 귀를 찔렀다.
순간 선우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선우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가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내 행세는 즐거웠어?"
선우의 뒤에는 온몸을 난자하고 죽였던 당세기가 서 있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놈은 또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선우는 허리에 차 두었던 용미연검을 빼 들었다.
챠르릉
더 이상 환영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또 죽이려고?"
그 모습을 본 당세기는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죽은 새끼가 왜 또 나타나냐? 죽었으며 곱게 가."
선우는 미련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환영이었다.
그저 베면 될 뿐이었다.
벌컥
그때였다.
"기아야!"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눈매, 오똑한 코, 붉은 빛을 머금고 있는 입술 거기다 선이 고운 얼굴까지
무척이나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선우는 저 여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가려!?"
그렇다.
여인의 정체는 당가주의 부인이자 당세기의 어미인 운가려였다.
운가려는 재빨리 당세기에게 다가간 후 그를 감싸 안았다.
"제발 우리 기아를 죽이지 마세요."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선우에게 간곡히 말하였다.
"기아를 죽일 바엔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저 모든 것들이 환영이라는 것을 안다.
당장에라도 베어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손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털썩
"제발, 내 소중한 아이를 해치지 말아주세요."
당대부인은 선우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빌며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만해...가려"
선우가 당대부인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더욱 간곡히 애원할 뿐이었다.
으득
선우는 이를 갈았다.
어차피 환영이다.
천변환영무연진에 의해 생긴 환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딴 환영 따위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선우는 다시금 검을 치켜세우기 시작하였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환영들을 베어버리고 나아갈 심산이었다.
"이제는 어머니까지 죽이게?"
그때였다.
당세기가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들은 환영이야!"
선우는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맞아, 우리는 환영이야."
그의 말에 당세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네가 날 죽인 것은 사실이잖아?"
"넌 죽일 놈이었어!"
그의 말에 선우는 거친 목소리로 반박하였다.
저놈은 죽일 놈이었다.
수없이 많은 아녀자들을 강간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인하였다.
"맞아, 난 죽일 놈이었지.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아니잖아?"
"뭐..뭐라고!?"
선우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너는 어머니와 정을 통하면 안되었어, 그것도 아들로 위장하고 말이야. 아들을 죽인 살인마와 정을 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할까? 여전히 너를 사랑할까? 아니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까?"
당세기는 재밌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어머니에게 거짓된 사랑을 속삭였지. 그것도 아들로 위장한 상태로 말이야. 그 사실을 그녀가 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선우는 당세기를 바라보며 나름의 항변을 하였다.
"아니 너는 그때 어머니가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어. 아들로 위장하는 기만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어야 했어."
당세기는 그런 선우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녀를 두 번 죽이고 있는 거야. 아들과 정을 통했을 때 한 번 그리고 아들을 죽인 살인마와 정을 통한 게 두 번째지."
"그..그만해!"
"네놈이 나나 이재원과 다를게 뭐지? 아들을 죽여놓고 그 어미와 하하호호하고 지내는 너 자신에 대한 괴리감이 들지 않아?"
"달라!"
선우는 당세기를 향해 소리쳤다.
"뭐가 그리 다르지? 사리사욕을 위해 남의 가정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죽이고 거짓으로 현혹시키고 모든 게 똑같은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
".........."
"그냥 똑같아. 위선 떨지 마, 장선우, 너도 똑같은 인간일 뿐이야."
그의 날카로운 말들은 선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안고 있던 죄책감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이내 꼭꼭 숨겨뒀던 죄책감이 그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하였다.
당세기의 말 중 틀린 것은 없었다.
결국, 자신은 당대부인의 사랑하는 이를 죽이는 것은 물론 그의 아들로 위장하여 그녀와 정을 통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말이다.
숨이 턱 막혀오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이재원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 가시가 되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이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합리화를 하긴 하였지만, 자신은 결국 그녀를 기만하였다.
아들을 죽였고 위장하였으며 거짓된 사랑을 속삭였다.
문뜩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재원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그저 똑같은 쓰레기가 아닐까라고 말이다.
털썩
선우는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억지로 숨겨뒀던 죄책감이 강건하기 짝이 없는 몸을 짚단보다 나약하게 만든 듯싶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냥 죽어. 선우야, 죽으면 편하다니까? 너를 옥죄고 있는 죄책감은 죽음 이외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어, 죽어서 모두에게 사죄하는 거야,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말이야."
어느새 다가온 당세기가 선우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매혹적이었고 선우는 몸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만약 죽는다면 사죄가 되지 않을까?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이재원과 같은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가다간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선우는 손에 쥐고 있는 용미연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날을 바라보았다.
날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제대로만 베기만 한다면 단번에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다시금 부정적 감정이 증폭되었다.
선우는 용미연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쫙!
용미연검이 빳빳하게 펴지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천천히 목에 날을 가져다 댔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퍽
무언가 선우의 턱주가리를 강타하였다.
"윽!"
선우는 턱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비명을 질렀다.
퍽
"으윽"
이번에는 가슴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가슴을 강타한 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였다.
그리고
짝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뺨에 날아드는 용미연검을 말이다.
짝
짝
용미연검의 칼 면이 선우의 뺨을 쉴 새 없이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윽!"
선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용미연검에는 생각보다 상당한 내력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황급히 내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활개를 치며 선우를 가격하던 용미연검이 흐느적거리는 연검으로 변하였다.
"개 같은 새끼야!"
선우는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천변환영무연진(千變幻影霧煙陳)으로 데려온 것도 개 같은데 뺨까지 때리니 화가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너 임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용광로에 넣어버릴 거야!"
선우는 용미연검을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내력이 없어진 용미연검은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멋대로인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아쉽게 흐름이 끊겼네, 그래도 하던 건 마저 해야지?"
당세기가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순간 선우는 의아함이 들었다.
그전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이성이 마비되진 않은 것이다.
"허어"
선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천변환영무연진에 의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변환영무연진이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던 죄책감을 증폭시켜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선우는 시선을 내려 용미연검을 바라보았다.
만약 용미연검이 자신을 후려갈겨 주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뭐해, 어서 목을 그어버려!"
당세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선우에게 소리쳤다.
"내가 왜 그래야 되냐?"
선우는 당세기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네가 이대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너는 나나 이재원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다! 그런 네 자신이 삶을 영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썩뚝
툭
"응?"
그때였다.
열변을 토하던 당세기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끄아아아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네 목을 그으라고!"
"이재원하고 나하고 다른 게 뭐냐고 물었지?"
선우는 비명을 지르는 당세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도망치지 않을 용기였어"
"뭐라고!?"
"나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거야. 죽음은 그저 도피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난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아. 그저 떠안을 뿐이야."
선우는 결연의 의지가 담긴 눈으로 당세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합리화하지마! 너는 결국 편해질 것이고 이재원과 마찬가지인 괴물이 될 뿐이다!"
서걱
툭
선우를 향해 소리치던 당세기의 목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멋대로 정하지 마, 정하는 것은 나야."
선우는 당세기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아야아아아아!"
그때였다.
무릎 꿇고 있던 당대부인이 당세기의 머리통을 껴안고 울부짖었다.
"이 악마! 이 괴물! 기아를! 기아를 죽이다니!"
그녀는 선우를 바라보며 온갖 저주를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아마 선우가 당세기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반응을 하였을 것 같았다.
선우는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래 죽여요! 기아도 죽이고! 나도 죽여요! 기아 없는 세상은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폐부를 찔러대었다.
"가려, 평생 지고 살아갈게."
샤악
서걱
말을 마친 선우는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머지않아 당대부인 또한 당세기 위에 포개어 쓰러지게 되었다.
선우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영인 걸 안다.
거짓인 걸 안다.
하지만 그녀를 베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하아"
선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개 같은 진법이었다.
사람 마음을 이리도 심란하게 하니 말이다.
콰지지직
이내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갈라지고 있는 것은 당세기의 방이었다.
환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팟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주위가 넓은 평야로 바뀌었다.
`시발`
선우는 짜증이 치밀었다.
천변환영무연진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끝도 없겠어.`
선우는 고심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천변환영무연진은 원리는 모르겠지만, 시각은 물론 촉각, 청각,미각, 후각마저 속이는 환영을 보여주었다.
이제 고작 두 번이었다.
고작 두 번의 환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진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짓거리를 구백구십팔 번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골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는 없지.`
선우는 방법을 고심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만약 이 정도의 환영이 더욱 들이닥친다면 선우는 감당치 못할 것이다.
두 번째 환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뻔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환영을 겪는 것은 위험했다.
선우는 턱을 쥐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번뜩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이는 느낌을 받았다.
선우는 손에 쥐고 있는 용미연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입고 있는 흑룡포를 보았다.
귀물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환영에 걸려들지 않지 않은가?
거기다 스스로 움직이는 물리력까지 발휘할 수 있으니 이끄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었다.
선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음양조화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의 몸 주위에 음양조화기가 일렁였다.
선우는 일렁이는 음양조화기를 용미연검과 흑룡포에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용미연검이 몸부림을 쳤고 흑룡포가 휘날리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그들에게 의지를 전하였다.
`이곳을 벗어나게 해줘.`
그러자 용미연검과 흑룡포에 힘이 실리더니 선우를 이끌었다.
선우는 몸에 힘을 뺀 후 그들이 이끄는대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선우의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