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154. 황보세가와 전쟁을 벌이다-1
뚜벅 뚜벅
선우는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별채와 연결된 청풍객잔에 들어설 수 있었다.
청풍객잔에 도착한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황색 바탕의 무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하기 그지없었으며 가슴에는 황(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선우는 단박에 그들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자체적인 개성을 발산하는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황보세가."
선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휙
선우의 말이 들린 것일까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선우를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선자가 선우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사천당문의 가주를 뵙습니다. 저는 천왕대의 대주로 있는 황보결이라고 합니다."
선우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포권을 취하며 선우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무척이나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꽤 강하군.`
선우는 그를 보며 내심 감탄하였다.
기도가 상당히 안정된 것을 보니 상당한 강자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어찌하여 나를 찾았는가?"
선우는 그의 정중한 인사를 담담히 받아넘기며 용건을 물었다.
"당가주께서 제녕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직접 모시러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황보가주의 명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황보결의 말을 들은 선우는 속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하였다.
다혈질로 소문난 황보강이라면 자신의 구역에서 깽판을 친 당진철에 대한 분노가 상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선우는 그의 성격상 다짜고짜 처들어온 후 생사결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정중히 초대를 건네니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거절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거절하신다면 저희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지요. 하지만 혹여 가주께서 동행을 거절하신다면 가주의 명예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선우의 물음에 황보결은 안타까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선우는 짐짓 모르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비록 세가 약해졌다고는 하나 정마대전의 영웅이라 불리우는 가주께서 황보세가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했다는 소문이 날까 두렵다는 말입니다."
황보결은 능글맞은 말투로 선우를 보며 말하였다.
"자네의 생각은 아니고?"
선우는 그런 황보결을 보며 말을 받았다.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당가와 황보세가가 누구보다 끈끈한 정으로 이뤄진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다른 촌부지렁이 눈에는 당가주께서 황보세가를 일부러 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피식
그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따라오지 않으면 황보세가가 두려워 도망갔다고 소문을 내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수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과연 금철방과는 다르다는 것인가?`
선우는 금철방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그들을 보며 살짝 감탄하였다.
예의를 차리면서 은근한 협박을 얹는 것이 참으로 고단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리를 옮기지."
선우는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쳐들어가야 할 곳이었다.
그런데 굳이 찾아온 사람들 내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황보결은 선우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는 무척이나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
"크하하하하 당가주 어서오게나!"
선우가 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를 반긴 것은 엄청난 거구의 사내였다.
칠척은 거뜬히 넘어보이는 거대한 키 그리고 옷 위로도 보이는 거대한 근육들 마지막으로 왠만한 사람 머리통만한 돌덩이 같은 주먹까지 갖춘 이었다.
그의 정체는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강이었다.
그는 큰 웃음을 터트리며 당가주를 반겼다.
"먼길을 오느라 수고하였다네, 난 또 자네가 내 청을 거절할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네."
그는 선우를 보며 살가운 태도로 말을 걸었다.
어찌나 살가운지 마치 수십 년지기 친구를 보는 듯했다.
선우는 그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황보세가도 눈이 있다면 그가 금철방에서 깽판을 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황보세가는 금철방을 비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금철방에서 깽판을 친 자신을 환대한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리라
"크하하하하 일단 자리를 옮기세나, 내 운치가 좋은 곳에 기가 막힌 술상을 차려놨다네."
말을 마친 황보강은 억센 손으로 선우를 잡아끌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그가 이끄는 양 그를 따라갔다.
어차피 꿍꿍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쿵 쿵
이내 그는 거대한 몸뚱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대전이 울려 퍼졌다.
선우는 그런 황보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대로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거대한 철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흐읍!"
그리고 철문에 다가간 황보강은 거대한 석문을 잡고 그대로 좌우로 벌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황보강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일까
이내 철문이 좌우로 벌어지면서 커다란 입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보강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라네."
그 모습을 보며 선우는 피식 웃었다.
노골적이어도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술상이 그곳에 있는 게 맞는가?"
"크흐흐흐 술상은 술상이지. 무섭다면 되돌아가도 좋다네."
말을 마친 황보강은 그대로 입구 안으로 걸음 옮겼다.
그의 말을 들은 선우 또한 그를 따라 입구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습을 감춘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단의 무리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황색 바탕의 무복을 입고 있는 자들이었다.
천왕대였다.
이내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선자, 천왕대의 대주인 황보결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구멍이 뻥 뚫려있는 입구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를 시작으로 천왕대의 모든 대원이 속속히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내 모든 천왕대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쿠쿠쿠쿠쿵
그러자 활짝 열어젖혀 있던 철문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닫히기 시작하였다.
쿵
이내 철문이 완전히 닫히고 입구가 봉쇄되었다.
거대한 철문은 다시금 제자리를 찾은 후 자리를 지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구멍 안으로 들어온 선우는 얼마지나지 않아 커다란 공터를 보게 되었다.
공터의 바닥에는 수많은 대리석이 깔려있었고 벽에는 난자된 핏자국들이 더러 있었다.
선우는 앞을 바라보았다.
앞을 바라보자 공터 중앙에 서 있던 황보강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곳이다."
그의 말투는 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마치 훈풍처럼 살가웠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북풍한설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아무리 봐도 술상은 없네만?"
선우는 그를 보며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못 본 새 많이 능글맞아졌구나, 당진철."
그런 선우를 보며 황보강은 코웃음을 쳤다.
그 냉막하기 그지없는 사내가 농을 친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보게, 당진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황보강은 은근한 말투로 그에게 말하였다.
"뭐가 말인가?"
"금철방에게서 약탈한 백만 냥을 내어놓으시게나. 그럼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걸세."
황보강은 위압감을 잔뜩 뿌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금철방과의 계약은 오로지 금철방과 당가 사이의 일이라네, 그런데 어찌 자네가 끼어드는가?"
"황보세가는 금철방의 뒤를 봐주고 있지, 금철방이 의뢰를 하더군. 당가가 약탈해간 백만 냥을 돌려받게 해달라고 말일세 "
"그래서 얼마를 받기로 했던가?"
"오십 만 냥일세."
"그거 참 빌어먹을 놈들이군."
그의 말을 들은 선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십 만 냥을 달라고 했을 때만해도 지랄발광을 하던 작자들이 황보세가에게는 흔쾌히 오십만 냥을 투척했다는 생각을 하니 웃겼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강제 징수하는 수밖에!"
선우의 말을 들은 황보강은 기세를 한껏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자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선우는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황보강을 보며 물었다.
독왕과 천왕신권의 경지가 동급이라 가정한다 쳐도 승패를 반반이었다
세가의 혈족은 물론 사업체까지 대부분 전부 잃어버린 당가와는 달리 황보세가는 아직 잃을 것이 많았다.
그런데 뭣 하러 이런 도박 수를 건단 말인가?
"그건 모르지. 자네는 독왕이니까."
선우의 말에 황보강은 인정한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눈앞에만 있다면 당장이라 찢어죽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긴 하였지만, 실상은 그 또한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독왕의 이름은 녹록치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자네와 내가 생사결을 나눌 때의 이야기라네."
선우를 바라보던 황보강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방적인 사냥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타탁 타탁 타탁
그때였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선우의 귓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당가주님."
만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왕대주 황보결의 모습을 말이다.
"이렇게 또 보게 되는군요."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천왕대원들이 줄지어 입장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결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
"자아, 어떤가? 이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좀 드는가?"
황보강은 선우를 바라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제 놈도 분명 당황하였을 것이다.
설마 자신이 천왕대까지 동원할 줄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천왕대는 일반적인 타격부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정예집단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절정의 고수로 구성되어있고 대주인 황보결과 부대주인 황보운산은 초절정에 이르는 고수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황보세가가 갖춘 최고의 전력이라는 소리였다.
담담한 척하고 있겠지만 아마 속은 바짝 쪼그라들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동급의 고수가 맞붙을 경우
작은 변수 하나에 승패와 완전히 엇갈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런데 동급의 고수인 자신과 더불어 세가 최고 전력인 천왕대까지 합세한다면 그에게는 승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저 냉막한 얼굴 뒤에는 겁에 질린 한 마리 토끼가 숨어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크흐흐흐흐"
황보강은 웃음을 흘렸다.
상상만해도 유쾌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선우는 그런 황보강을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합공을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일반적으로 정파의 무인이라면 자존심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렇기에 비겁한 승리를 쟁취할바엔 정당한 패배를 맞이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합공이라니!?
상상도 못 한 수였다.
"크하하하하하 그리 두려우셨소? 당가주."
선우가 그저 멍하니 서 있자 그 모습을 본 황보강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겁을 잔뜩 먹어 얼어붙은 꼴이 웃겼기 때문이다.
"황보강, 물어볼 것이 있다."
선우는 황보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뭔가?"
그의 물음에 황보강은 의아한 듯 물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뭐가 말이오?"
"날 상대로 합공을 가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냐는 말이오."
선우는 황보강을 향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당가와 달리 황보세가는 잃을 것이 많다! 그런데 뭣 하러 네놈이랑 승패도 알 수 없는 승부를 가린단 말이냐!"
선우의 물음에 황보강은 오히려 떳떳하게 소리쳤다.
그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태도였다.
직계혈족을 전부 잃은 당가와 달리 황보세가에는 돈만 없을 뿐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었다.
그런데 뭣 하러 당가와 승부를 가린단 말인가?
어불성설한 말이었다.
".............."
선우는 지금 상당한 허탈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설 속에 들어오기 전 선우는 평범한 독자였다.
그것도 수많은 장르소설에 열광하는 독자 말이다.
특히 선우를 사로잡은 장르는 무협이었다.
선우는 무협이 좋았다.
칼 한 자루로 비껴찬 후 세상을 주유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강호인들을 동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본연의 무(武)로서 증명해내는 그들이 멋있었다.
한 여자를 위해 한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하는 그들의 협(俠)은 낭만적이었다.
무협은 멋있었고 인간적이었으며 그 나름의 낭만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협을 사랑하는 선우의 입장에서 황보강의 태도는 엄청난 괴리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황보세가라는 명문정파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합공이라니?
그것도 제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아무리 개같이 쓴 소설이라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기본적인 무협의 도리조차 개나 줘버린 것 같았다.
허탈했다.
이런 인간과 정면에서 당당히 맞설 생각을 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선우는 황보강과의 대결을 은근 기대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이기기 위해 세 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죽을 똥 살 똥 건곤대나이를 익히지 않았던가
호승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또한 거짓말이리라
그런데 막상 까고보니 합공이란다 흥이 식을 수 밖에 없으리라.
선우는 천천히 음양조화기를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흥이 식은 이상 즐길 생각따윈 없었다.
그저 철저히 짓밟을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웅
그의 주위로 녹빛 독기들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당가의 비전 무공인 만류귀원신공 흉내낸 것이리라
선우의 눈이 덧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승패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이 안 되었다.
그가 황보강을 이기기 위해 건곤대나이를 익혔지만, 그의 계획에는 천왕대는 없었다.
그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황보강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