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123. 공갈을 치다-1
선우는 가슴이 터질 듯한 죄책감이 몰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혼자 객잔에 보내지 말았어야했다.
그녀를 혼자 보내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정파의 후기지수들과 시비가 붙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멍청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안일하였다.
사실 선우는 지금껏 요랑에 외관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녀를 절세미녀라고 칭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탈피하기 전부터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선우 입장에서는 한 눈에 반할 정도의 절세미녀라는 느낌보단 흉악하기 그지없는 인면지주라는 느낌이 강하였다.
그렇기에 모두가 요랑을 절세미녀라 칭해도 코웃음치며 그들을 비웃었다.
그녀의 본질은 인면지주라는 흉악하기 그지 없는 괴물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적자가 그녀에게 반하여 당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도
선우는 그의 취향에 의문을 표했을 뿐 요랑의 미모에 관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저 요랑이가 이쁘긴 한가보네 하며 남일처럼 넘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안일한 생각이 결국 이 사단을 내고 만것이다.
객관화의 오류였다.
자신이 요랑을 절세미녀로 인지하지 못하니 다른 이들도 비슷할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것이다.
요랑은 미녀였다.
그것도 절색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어마어마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사단이 난 것이다.
착각을 깨달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요랑의 손에 은자를 쥐어주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은 어째서 그리도 안일하게 요랑을 대하였는가
다른 사람이 입을 턱벌리며 그녀를 쳐다볼 때
왜 단 한번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는가
짜증이 났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짜증이 났다.
요랑에 대한 미안함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요랑이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각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은자를 쥐어주니 기쁜 마음에 객잔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약속을 지키겠다며 빈사가 될때까지 그저 당하기만 하였다.
저 자존심 높은 포식자가 자신보다 한없이 약한 이에게 말이다.
으드드득
이빨이 절로 갈려왔다.
멍청하기 그지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아마 이 모든 사태에 원인은 마음 속 깊은 곳 자리 잡은 오만이었을 것이다.
화경이라는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경지에 오른 것은 물론 당가라는 거대 세력까지 얻었으니 인지는 못하였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오만이라는 감정을 품게 만든 것이다.
오만은 방심을 불러왔고 방심은 안일함을 불러왔고 안일함은 위기를 불러왔다.
두근 두근 두근
선우는 미칠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금껏 그를 두렵게 한 것은 절망이라는 감정이었다.
어떤 짓을 해도 극복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나온 감정말이다.
처음 검황 양태산을 만났을 때도 그러하였고 이재원을 만났을 때도 그러하였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을 느꼈고 무엇하나 할 수 없는 자신에게 좌절을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절망이라는 감정 대신 오만이라는 감정이 그를 두렵게 하였다.
언제 자리를 잡은지 기억도 안나는 음습 스며든 감정.
그 음습함으로 내 주위 사람이나 내가 이룩한 모든 것들에 천천히 스며들어 한순간에 모든 것들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감정.
두려웠다.
이 짧은 방심으로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하였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되돌려야했다.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발생한 이 모든 것들을 말이다.
선우는 어떻게든 상기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진정해야했다.
"후우"
선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도록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일단 사태 수습이 먼저였다.
여기서 대처를 잘못했다간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은 물론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야"
선우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진짜 뒤질래? 그딴 이유로 저 여자를 저렇게 만들어놔?"
선우는 그들에게 짐짓 살기를 흩뿌리며 말하였다.
움찔
그 기세에 용봉들은 몸을 움츠렸다.
선우는 품 안에서 무언가 뒤적거렸다.
당가를 떠나기 전 당서윤이 호패가 없는 선우를 위해 신분증패 대신하라며 챙겨준 물건이었다.
설마 여기서 쓰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썩 괜찮은 수였다.
선우는 이내 동그랗게 생긴 무언가를 손으로 붙잡았다.
선우는 천천히 동그란 모양의 패를 품안에서 꺼내었다.
챙그랑
그리고 그들 앞에 던졌다.
제갈지아는 선우가 암기를 던지는 줄 알고 몸을 움찔하였다.
하지만 이내 암기가 아닌 바닥에 동그란 모양의 패를 던진 것을 보고 그 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패는 은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빛이 번쩍번쩍 났으며 동그란 모양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당(唐)이라는 글자와 새겨져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은색의 동그랑 형태에 가운데 당이라는 글자가 써져 있는 패는 그녀의 기억 상 단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가신패!"
그녀의 외침에 용봉들은 눈이 번쩍 뜨여지며 너도나도 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 앞에 놓여진 것은 당가신패가 분명하였다 .
당가신패가 무엇이란 말인가
당가의 은인이나 귀빈에게만 주어진다는 당가의 보은패가 아니던가
당가라고 하면 그 특성을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배로 갚는다.]
보은을 입는다면 언제고 그 배로 갚아주겠지만 원한을 살 경우 열 배로 갚아주겠다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이 말을 증명하듯 무림사에서는 당가의 원한을 사 무너져 내린 문파가 수두룩하였다.
내뱉은 말을 무조건 지키기에 당가는 정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두려움을 샀다.
반대 당가에게 은혜를 입힌 이들의 경우는 그들은 덧없는 보은을 받게된다.
당가에서는 매년 당가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은인들에게 내부 회의를 거쳐 급을 철패, 동패, 은패 이렇게 세 가지 패를 지급한다.
이 모든 패들은 당가신패라 불리우며 그 등급에 따라 당가에게 입힌 은혜의 척도를 판단할 수 있었고 그에 따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중 은패는 그 지급횟수가 당가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적은 물건이었기에 많은 이들은 사실상 동패를 당가신패 중 최고로 점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뜬금없이 은색으로 되어 있는 당가신패를 내던지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어째서 당신이?"
제갈지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은색으로 된 당가신패라니 그녀 또한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본적은 손에 꼽은 물건이었다.
매년 은인에게 지급한다고는 하지만 은패는 커녕 동패나 철패 지급에도 인색한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은패를 지급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는가
당가에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힌 대상이란게 아니겠는가
"내 이름은 장선우다. 독왕의 제자이자 당가를 구한 은인이지."
그의 거짓말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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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돼!"
그의 말에 제갈지아는 말도 안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당가의 무공은 오로지 직계혈족으로 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외인에 불과한 그가 독왕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말이 안되지?"
선우는 그녀에게 의문스러운 듯 되물었다.
"당가의 무공은 직계혈족으로 밖에 전해지지 않아요. 그런데 독왕의 제자라뇨? 지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게 아닌가요?"
제갈지아는 선우가 목숨줄을 틀어잡고 있다는 생각을 저 멀리 날려버린 듯 바락 바락 대들며 달려들었다.
고작 당가신패하나 쥐고 있다고 독왕의 제자라니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었다.
그녀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선우의 낯빛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반응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이제 밑밥은 깔아놨으니 증명을 해보일 참이었다.
선우는 천천히 음양조화신공을 운용하였다.
우우우우우웅
그의 몸 주위로 거대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의 제자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무엇일까?
바로 무공이었다.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도 누군가의 무공을 똑같이 선보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였다.
독왕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바로 만류귀원신공이 될 것이다.
선우는 곧바로 만류귀원신공을 흉내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몸에서 녹빛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아..아니!?"
"저건 당가의!?"
"설마 정말로!?"
그 모습을 본 용봉들은 당혹스러운 듯 말을 내뱉었다.
그가 독왕의 제자라고 주장할 때만 하더라더 속으로 코웃음치며 멍청한 놈이 살려고 발악하는구나 생각하였다.
오로지 혈족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당가의 무공을 당씨성을 쓰지도 않는 자가 어떻게 익힌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곧 무공으로서 그 말도 안되는 일을 증명해내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하기 그지 없는 녹빛의 기운들이 그가 익힌 무공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림사에 있었서 가장 개성이 뚜렷한 무공은 무엇일까
붉은 기류를 일렁이며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녹여버린다는 태양신공?
아니면 묵빛 기류가 일렁이며 닿는 이들을 모두 분쇄시켜버린다는 천마신공?
모두 아니었다.
많은 이들은 말할 것이다.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뚜렷한 무공이 있다면 그것은 만류귀원신공이라 말이다.
무림사에 수 많은 무공들 중에서도 경지에 이르러서 녹빛의 기류를 흘리는 것은 오로지 만류귀원신공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봉들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지금 운용하는 것이 당가의 직계들에게만 전해진다는 비전 무공이자 최고의 독공인 만류귀원신공이라는 것을 말이다.
허풍이라고 여겨졌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은 무림이었다.
무공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고 모든 것을 이룩한다.
그는 증명하였고 그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장한 말도안되는 말들을 말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용봉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째서 독왕의 제자가 얌전히 연회를 벌이고 있는 그들을 공격했다는 말인가
"잠..잠깐만요!"
그때였다.
제갈지아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류귀원신공을 익히고 있는거죠?"
"독왕의 제자니까"
"말도...안돼."
제갈지아는 지금 머리속에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알고있는 당가에 대한 생각이 뿌리째 뽑혀나가는 느낌이었다.
오대세가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혈족중심인 곳이 당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외인에게 무공이라니 그것도 비전무공을 말이다.
눈으로 봤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었다.
"당가는 혈족중심의 세가예요. 외인한테 결코 무공을 전수하지 않아요. 당신의 그의 양아들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무리라고요."
그녀는 열변을 토해내었다.
알고싶었다.
어떻게 저자가 만류귀원신공을 익히고 있는지 말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나름 인상을 찌푸렸다.
무공을 보여줬음에도 바득바득 달려드는 꼴이 짜증났기때문이다.
하지만 장삼의 기억으로 그녀의 집요한 성격을 알고 있는 선우는 고민에 빠졌다.
아마 납득할만 이유를 대지 않는 이상 그녀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집요한 년'
확실히 당가에서 핏줄이 아닌 인간한테 무공을 전수해줬다는 것은 당위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그 어떤 세가도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면 된다.
"나는 당서윤의 정혼자다."
선우는 당서윤의 이름을 팔았다.
"뭐...뭐라구요!? 당서윤이라면 설마 독서시!?"
선우의 말을 들은 제갈지아는 너무 놀라 눈이 튀어올 지경이었다.
당서윤이 누구란 말인가
단 한번의 출도로 독서시라는 별호를 얻은 사천제일미가 아니던가
또한 여인으로서의 삶보다는 무인으로서의 삶은 택하여 수많은 여협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우상중에 우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상과 정혼이 되있다니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인가
"거..거짓말! 당 여협은 출가가 금지되어 있어요!"
제갈지아는 거짓말이라며 선우의 말을 부정하였다.
당서윤은 당가의 비전 무공을 익힌 대신 혼인할 수 없는 몸이 되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그녀와 혼인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데릴사위는 들일 수 있지."
그녀의 말에 선우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서윤은 출가가 금지 당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무공의 반출이 두려워한 결정이었다.
만약 데릴 사위를 들인다면 말이 달라진다.
그녀도 혼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그런..."
제갈지아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 납득해버린 자신을 원망하였다.
확실히 데릴사위를 들인다면 그는 당서윤과 혼인할 수 있었다.
거기다 독왕의 제자이면서 그의 무공을 전수 받은 것도 나름의 당위성이 생겼다.
데릴 사위가 직계의 무공을 익히는 일은 당가에서는 흔치 않았지만 다른 널널한 세가에서는 흔한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선우를 바라보았다.
하는 말이 전부 미심쩍기 그지 없었지만 뭔가 교묘하게 잘피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모든 말들을 뒷 받침할 증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지 않은가
만류귀원신공을 증명한 이상
그와 당가의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가 무공을 몰래 훔쳐 배운게 아닌이상 말이다.
궤변투성이 말들을 모두 뒷받침할 증거가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독왕의 제자 분께서 저희를 공격한거죠?"
제갈지아는 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독왕의 제자이자 당가의 은인이면서 독서시의 정혼자인 그가 어째서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