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8. 용봉지회-2
"여기 있는 음식들 전부 줘!"
풍천루에 들어선 요랑은 손에 있는 은자를 흔들며 크게 외쳤다.
은자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몰랐으나 이정도 크기면 객잔의 모든 음식을 시킬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은자의 가치는 그 정도면 충분하였다.
"........."
"........."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객잔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여기 점소이 없어!?"
요랑은 침묵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크게 소리 질렀다.
이따금 선우와 몇 번이고 객잔에서 주문을 시켜본 적 있는 그녀였다.
점소이가 객잔에서 주문을 받는 사람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한 앳되보이는 소년이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여협, 오늘 풍천루는 저분들께서 통째로 빌리셔서 일반 손님을 상대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요랑에게 다가간 소년은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였다.
오늘 풍천루를 빌린 이들은 무림인들이었다.
만약 그들의 심기를 거슬렸다간 이 아리따운 여인이 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천루 앞에 써있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풍천루 앞에 분명히 금일은 일반손님을 받지않는다고 대자보를 걸어놨었다.
아마 이 여인은 그것을 보지 못한 듯 싶었다.
"그런거 못 봤는데?"
물론 글을 모르는 요랑이 입장에서는 알턱이 없었다.
그녀는 심기가 불편하였다.
주린 배를 틀어쥐고 겨우겨우 도착한 객잔에서 음식을 팔지 않는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저기에도, 저기에도 자리가 많잖아 조용히 먹을게 한 자리만 줘!"
요랑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안됩니다. 이미 저분들께서 통째로 대관을 하셔서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요랑은 볼을 부풀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빈 자리가 저리도 많은데 어찌하여 단 한 자리도 내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럼 저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지?"
말을 마친 요랑은 보무도 당당하게 그들이 모여 있는 이 층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네!?, 잠..잠깐만요!"
점소이가 다급히 말려보려고 하였지만 언제 이동한 것인지 이미 그녀는 이층에 도달해 있었다.
저벅 저벅
요랑은 위풍당당하게 이 층 상석에 앉아 있는 이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이에게 다가갔다.
요랑의 기준에서는 비슷한 놈들 중에서는 덩치가 가장 큰 동물이 우두머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여기서 먹어도 되?"
그 말을 들은 황보악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여기 있는 음식들 전부 줘!"
처음 풍천루가 열리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만 해도 용봉의 후기지수들은 무척이나 불쾌하였다.
오늘 풍천루는 비싼 돈을 들여 자신들이 대관하지 않았던가
풍천루는 균현에서도 맛좋기로 소문난 주루이기때문에 하루 대관 비용만 한 두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봉의 후기지수들은 대관을 고민치 않았다.
자신들보다 급이 낮은 이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술을 즐긴다는 것은 명문대파의 제자들과 명문세가의 자제들로 이루어져 있는 그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돈이 없는 자들도 아니고 매년 걷는 연회비 또한 상당한 액수였기에 무리한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리한 금액이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돈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자신들만의 편안한 축하연을 위해 모인 자리가 저 여인의 한 마디로 인해 불쾌하게 바뀐 것이다.
이 층 상석에 앉아 있던 자들은 자리에 일어나 풍천루로 들어온 여인을 살폈다.
누가 되었든 크게 호통을 쳐 혼내줄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 어떤 이들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흑단처럼 윤기가 넘치는 검은 머릿결, 사슴보다 더욱 진한 눈망울 그리고 오똑하기 그지 없는 코, 앵두보다 붉게 빛나는 분홍 입술 그리고 백옥보다 뽀얀 피부까지
절색(絕色)
그렇다.
감히 입에 절색이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미모를 가진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남녀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의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외모 속에 빠져들었다.
천하에 저리도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모든 용들은 그녀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고 봉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절로 수긍을 하였다.
자신들이 남자라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근 두근
특히 황보악의 가슴은 그 누구보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였다.
스물 여섯 평생 저리도 아리따운 여인은 처음 본 그였다.
천검봉 이예설도 치지봉 제갈지아도 무림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인이지만 황복악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들도 저 여인 앞에서는 달빛 아래 반딧불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란 것을 말이다.
떨려왔다.
평소 사내다움을 미덕으로 삼는 그였지만 시리도록 떨리는 마음이 마치 소녀와도 같은 감수성을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저 여인은 대체 누구인가
누구길래 저리도 처연한 얼굴을 하며 풍천루를 방문하였는가
수많은 상념들이 그의 머리속을 온통 휘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여인이 이 층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두근 두근
그녀의 걸음걸이가 울려퍼질때마다 그의 심장소리도 같이 울려지기 시작하였다.
"크윽"
황보악은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잡았다.
이러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황보악의 눈 앞에서 걸음걸이를 멈춘 것이다.
"나 여기서 먹어도 되?"
그녀의 고운 입에서 나온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황보악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어떤 남자가 이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리오
그런 무도한자가 있다면 자신이 철퇴를 갈기리라
그렇게 다짐하였다.
황보악 반응을 본 여인은 말갛게 웃었고 그 미소에 장내 모든 남자들은 심장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다.
*******
황보악의 허락을 받은 요랑은 쪼르르 밑으로 내려가 빈자리에 앉았다.
"여기 있는 음식들 전부 줘!"
그녀는 다시금 점소이를 향해 큰 소리를 질렀다.
"네...네!"
그녀의 말에 멍을 때리고 있던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히히히히히"
요랑은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안된다고 급구 그녀를 말리기는 했지만 결국 허락을 얻어냈고 식사를 하게된 것이다.
선우가 알면 분명 크게 칭찬해줄 것이 틀림없었다.
이리도 쉽게 허락해주는 것을 안된다고 고집을 부린 점소이가 살짝 얄밉기도 했지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기로 한 그녀는 조용히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그녀를 떠나보낸 황보악은 심장이 터질 듯한 아픔에 시달렸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옆에서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황보악에 허락을 받자마자 쪼르르 내려가 아랫층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내려가는 뒷모습마저 아름답기 그지 없었지만 이대로 그녀를 떠나보내니 마치 반쪽을 내려보낸 듯한 공허함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황보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 다가가 합석을 권유할 요량이었다.
그때였다.
"소저, 이곳에 혼자 왔습니까?"
황보악은 당황하였다.
누군가 한 발 먼저 그녀에게는 가있던 것이다.
"저는 화산의 화운산이라고 합니다. 세간에는 저를 매검룡이라고 부르지요."
선객의 정체는 말끔하게 생긴 얼굴로 수 많은 여자들을 꼬셨던 기생오라비 화운산이었다.
"우웅, 그렇구나."
그의 물음에 요랑은 심드렁히 대답하였다.
그닥 관심이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온 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혹여 실례가 안된다면 합석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 풍천루는 저희 용봉지회에서 통째로 대관한 터라 본래라면 나가셔야 되지만, 정파의 협사로서 어찌 굶주린 이를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용봉지회의 회주로서 '특별히' 소저께서도 저희와 같이 합석하여 연회를 즐기실수 있도록 도와드리곘습니다."
화운산은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용봉지회라면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후기지수들만 모이는 무림 최고의 단체였다.
무림에 발을 디디고 있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인 것이다.
거기다 용봉지회의 회주라는 그의 지위까지 자연스럽게 언급함으로 화운산은 요랑의 호감을 살 생각을 하였다.
준수한 얼굴에 준수한 능력에 준수한 지위까지 준수하지 않은게 없는 자신을 거부할 여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 생각하였다.
"혼자가 편해!"
그의 말에 요랑은 크게 답하였다.
선우랑 둘이 나눠 먹기도 부족한 판국에 굳이 저 사람들까지 껴서 뭣하러 나눠먹는단 말인가
"하하하하 무언가 착각을 한것은데요. 소저 이곳은 저희 용봉지회가 통쨰로 대관한 곳입니다. 본래라면 외부인의 출입이 엄금된 곳이죠."
"쟤가 허락해주던데?"
요랑은 손가락을 뻗어 이 층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황보악을 가르켰다.
"하하하하하 소저 , 황보 형이 용봉지회의 우수회원이긴 하지만 그러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만한 권한은 없습니다. 모든 권한은 용봉지회의 회주인 저를 통해서만 결정 된답니다."
그때였다.
"화 형! 그게 무슨 말이오, 내 비록 회주는 아니나 주루에 여인하나 못 들인단 말이오?"
그 말을 들은 황보악이 발끈하여 일어났다.
저 아리땁기 그지 없는 여인 앞에서 자신을 깎아내린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보 형, 진정하시구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라오, 다같이 연회비를 걷어 대관한 풍천루인데, 어찌 황보 형의 마음대로 외부인을 들인단 말이오?"
"그건 화 형도 마찬가지인 것이 아니오? 언제부터 용봉지회의 회주가 용봉들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되었소? 이 황보악은 화 형 밑에 들어간 적은 없소이만?"
사실이었다.
용봉지회의 회주이긴 하나 그의 본래 직책은 모임을 주도하고 장소를 섭외하며 연회비를 걷는 직책에 불과하였다.
용봉들에게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전혀 없는 것이다.
"크윽, 황..보악!"
황보악에 말에 화운산의 얼굴이 붉어지면 언성을 높였다.
황보악이 한 발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용봉지회의 회주인 자신의 권리를 깎아 먹은 무척이나 무도한 짓거리였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더구나 눈앞에 절색의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치욕이었다.
화운산은 천지일기공을 운용하여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은 화산을 대표하는 후기지수였다.
자신이 치욕을 받는다는 것은 화산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치욕을 받았다면 갚아줘야했다.
그것이 무림의 방식이었다.
"황보악! 네놈은 나 화군산의 명예는 물론 대 화산의 명예까지 얼룩지게 만들었다. 결투다! 당장 밑으로 내려와라!"
촤앙
화운산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대에서 검을 꺼내어 그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풍천루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오냐! 원래부터 네놈의 그 가벼운 성정이 마음에 안들던 터였다. 어디서 쥐새끼같이 생긴 놈이 감히 용봉의 주인을 자처하는가!"
황보악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 주먹을 풀기 시작하였다.
원래부터 화운산이 이 여자 저 여자 수작부리고 다니는 것과 경솔하기 그지없는 가벼운 성정이 마음에 안들던 그였다.
그런데 자신이 첫눈에 반한 절색의 여인까지 넘보는 것은 물론 용봉의 주인을 자처하다니 이것은 패죽여도 부처님은 물론 원시천존까지 이해해주실 일이었다.
황보악은 그대로 이층에서 뛰어내렸다.
저벅 저벅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화운산 앞에 섰다.
"여기서 싸운다면 여기 이 아리따운 소저가 다칠지 모르니 나가서 싸우지."
황보악은 최대한 조근조근 그에게 말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얄미운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으나 저 한 마리 참새마냥 가련하기 그지없는 여인이 다칠까 두려웠다.
"허어 그래, 네 녀석 보잘것 없는 무공이라면 그녀를 지키면서 싸울 자신이 없겠지."
황보악의 말에 화운산이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받았다.
"뭐라!?"
"나는 말이지, 네 녀석을 상대하면서도 그녀를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게 할 자신이 있다."
화운산은 더욱 진하게 웃으며 황보악을 도발하였다.
평소에도 같은 용이라 불리긴 하나 황보악같은 무식한 놈보다는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하던 화운산이었다.
"나 또한 네놈에게서 그녀를 지키면서 싸울 자신이 있다! "
그 도발에 황보악은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끝까지 자신을 깎아내리다니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덤벼라!"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
두마리의 용(龍)들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기세를 퍼트리기 시작하였다.
우우우우우우웅
파지직 파지직
기세들이 부딪히며 번개가 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펑!
그리고 이내 화운산의 검과 황보악의 주먹이 부딪히며 엄청난 파공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싸움이 시작 된 것이다.
요랑은 그 모습을 갸웃거리며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