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7.뒷수습-1
"당가 전체를 이잡듯이 뒤져, 잔당들을 모두 제거하라!"
선우는 승리에 자축하고 있는 당가 무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그러자 대전 안에 무인들 모두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들은 검을 들고 하나 둘 대전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혹시 숨어있을지 모를 잔당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가 무인들이 모두 떠나자 대전 안에는 오로지 선우와 당서윤만이 남게 되었다.
당서윤은 천천히 선우에게 다가갔다.
스륵
그리고 두르고있던 흑룡포를 벗어 그대로 선우에게 걸쳐주었다.
"보물은 아껴, 함부로 남 주지 말고."
물론 뼈있는 한마디 또한 잊지 않았다.
"우리가 남은 아니잖아?"
선우는 능글맞게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남이 아니면 뭔데?"
"음, 친구?"
"친구도 남이야."
"그럼 친구인 건 인정하는 거네?"
"미친놈."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경지에 올랐는지 엄청난 신위를 보이던 그였다.
분명 그만큼 큰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여전히 실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꾸벅
"고마워."
"뭐가?"
"구해줘서"
당서윤은 허리를 숙인 후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는 비록 독정을 훔치기 위해 당세기를 죽이고 당가에 들어온 살인마였지만 모순적이게도 당가의 멸문을 막은 은인이기도 하였다.
그가 없었다면 당가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까?
무리였을 것이다.
명문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아쉬운 소리 한 번 해본적 없이 자라온 그녀였다.
초절정이라는 경지에 이르고 난 뒤 숙이기 보단 숙임받는 위치에 서게 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망설임없이 선우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
"........."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감사를 표하자 선우는 뻘쭘한 듯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괄괄한 그녀가 얌전히 감사를 표하니 어색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됐어 그만 일어나 , 어색해"
선우는 팔을 벅벅 긁는 시늉을 하며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은인의 뜻이라면."
선우의 말을 들은 그녀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마친 목련꽃이 만개한 것과도 같은 고귀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선우는 멍하니 그녀의 미소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존나 예쁘네."
선우는 속에 있던 마음을 그대로 내뱉었다.
가감없이 저 말 그대로였다.
예쁘다는 말외에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미소였다.
"알아."
그녀는 더욱 밝게 웃으며 선우에게 답하였다.
딱딱하게 반응하던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두근
선우는 가슴이 한 구석이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격하게 흔들었다.
지금 옥령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헛된 생각이란 말인가
선우는 못난 심장을 탓하기 시작하였다.
시도때도 없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왜 그런거야?"
선우가 복잡한 심경에 당황하였을 때 당서윤이 말을 걸어왔다.
"응?"
"어째서 당가주의 모습으로 당가를 구해준 거야? "
그녀는 선우가 행동에 의문을 표해왔다.
독정만 챙기면 되는 선우 입장에서는 혼란한 틈을 타 독정을 훔치는 것이 낫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당가주의 모습을 빌려 혈궁대를 몰살시키고 그녀와 당가를 구해주었다.
이는 그녀로서는 이해가 안될 일이었다.
번거로워도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독정이 목적이라면 마교와 당가가 양패구상하는 그림을 그리는게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경지에 이른 무공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은 잔당들을 정리하고 당가를 뒤져보는 것이 더욱 수월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뭣하러 이렇게 번거로운 일은 택한단 말인가
"내가 구한 것은 당가따위가 아니야."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진지한 눈으로 답하였다.
"그러면?"
"내가 구한 건 너야. 당가따위가 아니라."
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하였다.
이미 그녀를 친우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친우가 위험에 빠졌는데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녀가 아니였으면 당가따위는 망하던 말던 상관 안했을 것이다.
"........."
선우의 대답에 당서윤은 일순간 말을 잃었다.
자신따위를 구하고자 그런 번거로운 일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도하고 고맙기도하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쿡"
하지만 나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내 그녀는 다시금 활짝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선우에게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별말씀을"
그녀의 미소에 선우 또한 웃음으로 답하였다.
미인의 웃음은 언제봐도 기분이 좋았다.
**************
선우는 당서윤에게 고독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당가의 유일하게 남은 직계혈족으로서 이일에 대해 알아야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는 죽은건가."
당서윤은 눈가에 살짝 눈물이 머금어졌다.
평생 남보듯 살아왔던 남매였지만 그렇다해도 피가 이어진 혈족이었다.
인간말종인 당세기와는 달리 당진철에 대해서는 일말에 정이 있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신세를 졌어."
당서윤은 다시금 선우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이는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아준 선우에 대한 감사였다.
"진짜 괜찮다니까"
선우는 그런 반응에 난감한 듯 대답하였다.
아무리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자꾸만 감사인사를 들으니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럼 신세진 김에 한 가지만 더 부탁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응?"
선우는 의아한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신세를 더 진다니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당가주 행세를 하면서 당가를 비호해줘."
"뭐!?"
선우는 당황한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당가주 행세를 해달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지금 당가주가 죽은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당가는 망하고 말아."
선우의 당황스러운 반응에도 당서윤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가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마교에 의해 떼로 몰살 되었다.
만약 당가주마저 사라지게 된다면 당가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만약 당가주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수많은 문파들이 달려들거야, 사천의 이권을 차지하기위해서 말이지 , 특히 청성파과 아미파의 경우 기를 쓰고 달려들거야."
사천당문은 사천제일넘어 중원전체로 따져도 가장 강성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천당문이 마교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수많은 이들이 당문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무력해진 당가를 보호해준다는 핑계로 야금야금 당가를 집어삼키려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저 강제로 당문에 점거하려는 무도한 자도 있을 것이다.
무림에서 약해진다는 것은 누구든 믿을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리라.
그렇기에 당가주가 필요한 것이다.
홀로 흑갑철기병과 혈궁대를 전멸시킨 강대하기 짝이 없는 절대고수의 존재가 말이다.
독왕이 건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누구도 당가를 허투루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무림에서 절대고수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물론 세가의 수많은 고수들이 몰살된 만큼 세가 약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절차였다.
관리할 능력이 없이 세를 늘리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권리를 넘기는 것과 강제로 빼앗기는 일은 달랐다.
당가는 이권을 포기하는 대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댓가를 얻어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왕이 필요하였고 선우가 필요하였다.
"지금은 당가는 절대고수의 비호가 필요해."
"그럼 지금 나한테 허수아비 노릇을 하라는 거야?"
"아니, 섭정을 해달라는거야."
"섭정!?"
그저 당가주 행세하며 허수아비 노릇만 해달라는 줄 알았더니 그것은 또 아닌 모양이었다.
섭정이라면 당가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런 것을 자신과 같은 외인에게 맡긴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나는 외인이야."
그렇다 선우는 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가주의 얼굴을 하고 있지."
입만 다물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한테 전권을 위임해도 되냐는 의미야."
"어차피 방법은 없어, 네가 없으면 당가는 찢겨져나갈거야, 그럴바엔 너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지."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만약 당가주가 부재한 상황이라면 제일 먼저 외척가문들이 들고 일어나 당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너도 나도 달려들 것이다.
그런 승냥이들에게 가문을 운명을 맡기는 것보단 차라리 선우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너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 또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선우라는 절대고수의 비호를 받아 당가를 유지하는 대신 당가의 전권을 넘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안되는 사고방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문을 외인에게 맡기다니 말이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의에 선우는 깊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쁘지는 않은데?'
사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당가라는 거대세력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기회말이다.
지금 선우에게는 세력이 필요하였다.
이재원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어차피 자신은 이재원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몸이 되었다.
언젠가는 그와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재원이 맹주로 있는 천무맹에 대항할만한 세력이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런 선우에게 당가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비록 당가의 주 전력이 박살난 것은 물론이고 소가주 후보들까지 전부 죽어버리긴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기회였다.
높은신 양반들과 소가주 후보들이 일순간에 북망산을 건너갔으니 세가를 자신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이고 독왕이 죽어 자신보다 강한 고수 또한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거기다 당가는 전력을 잃어버린 것이지 돈이나 무공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독왕이라는 중심만 다시금 제대로 세워진다면 얼마든지 거대 세력으로 발돋음할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을 갖춘 것이다.
무조건 받아들여야한다.
그녀의 제안을 말이다.
"언제까지?"
선우는 그녀에게 기한을 물었다.
"내가 화경에 오를 때 까지"
그녀는 무심히 말을 하였다.
다른이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갖추려면 최소 화경에는 올라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너무 억지라는 생각이 엄습하였다.
사실 화경이라는 경지를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깨달음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오를 수 있는 것이 화경의 경지였지만 깨달음이 없다면 평생을 추구하여도 오를 수 없는 지고한 경지인 것이다.
사실상 무기한이나 다름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
선우는 일단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답 한마디면 당가가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흔쾌히 허락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고민하는 척을 하였다.
"미안해 무리한 부탁해서. 너도 분명 너의 삶이 있을텐데, 다른 사람의 삶을 강요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 "
선우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녀는 씁쓸한 어조로 그에게 말하였다.
지금 그녀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선우였기에 애원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처사인 것같았다.
평생 자신으로 살아왔던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라니 말이다.
"못 들은걸로 해줘."
그녀는 축 처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마 속으로 내심 절망한 것이리라
"할게."
선우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응?"
"당가주 행세말이야."
선우는 그녀를 향해 진한 미소를 지었다.
호박이 덩쿨째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
선우는 지금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가르쳐준대로 잘해."
옆에서 당서윤이 선우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냥 계속 당진철인척 하면 안될까?"
"안돼, 아무리 소원한 관계라해도 엄연히 부부관계야, 망나니인 당세기 행세랑은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당진철을 완벽하게 흉내내기 위해서는 그녀들의 조력이 필요해."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골머리가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선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선우는 당진철의 행세를 결심하자마자 당서윤의 손에 끌려 당세기의 거처로 오게되었다.
그곳에 당대부인과 삼부인인 금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서윤은 말하였다.
지금 당가에 있는 당진철의 처는 당대부인과 삼부인밖에 없다고 말이다.
고월을 죽이고 난 후 그녀들은 혹시 몰라 2부인과 4부인, 5부인의 거처를 찾아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거처는 이미 비어있었고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당가 내부에 상주하고 있던 그녀들의 외척 무사들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교와 맞서싸우기보단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는 것을 말이다.
분명 마교의 잔당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들끼리만 살겠다고 그대로 도망간것이리라
당서윤은 처음에 그 사실에 분노를 금치 못하였지만 상황이 이리되니 오히려 기회처럼 느껴졌다.
선우는 당가주 행세를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그의 부인들마저 속여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한 평생 같이 살아온 정인을 속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이 십대 청년이 오 십대 중년인을 흉내낸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2부인과 4부인 , 5부인의 도주는 무척이나 반갑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처낼 수 있는 명분을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가 남았다.
바로 당대부인 운가려와 삼부인 금적화의 존재였다.
선우와 당서윤은 선택해야했다.
사실대로 말하고 조력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그녀들까지 속일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당서윤은 전자의 의견이었고 선우는 후자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결국 선택한 것은 조력을 구하는 것이었다.
망나니인 당세기와는 달리 당진철의 행세는 금방 들통날 것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결국 그녀들이 묵고있는 당세기의 처소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선우는 걱정된다는 듯 당서윤에게 물었다.
"모르지."
당서윤은 담담히 대답했다.
사람일은 원래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럴 때는 빈말이라도 해줘야 되는거 아니야?"
"빈말을 뭐하러 해? 실없게"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선우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들으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대도 안했어."
선우는 피식 웃으며 문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여기서 그녀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당가라는 세력을 얻기위해서는 어떻게든 그녀들을 설득을 해야했다.
선우는 다시금 다짐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