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9.거래를 하다-2
생사대적을 앞둔 무림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련된 자신의 신체?
끊임없이 수양한 내력?
만약 그 모든 것이 동일한 상대와 마주하게 된다면 승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실낱보다 더욱 미세한 차이가 그 결과를 말해주리라고 말이다
그럼 그 미세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병장기의 차이라고 말이다.
그런 그들에 말 많은 호사가들이 질문을 던졌다.
경지에 오르면 무기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나뭇가지 하나만 들어도 질좋은 무기를 가진 하수들을 제압할 수 있지 않냐고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해 과거 검 한 자루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던 검존은 말하였다.
"경지에 오른자가 무기없이 그보다 못한자들을 상대할 수는 있어도 동급의 경지에 오른자는 결코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천하제일인조차 인정한 것이 병장기라는 것이다.
검존의 발언 이후 많은 무림인들은 더욱 병장기에 목메게 되었고 철의 수요또한 급증하게 되었다.
무림인들에게 질 좋은 병장기라는 것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보물 중에 보물인 것이다.
병장기가 가진 질적인 차이로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닐 수 있는데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병장기의 질적차이를 가져오는것은 무엇일까
야장의 실력?
무구의 형태?
만드는 기간?
모두 아니였다.
병장기의 질적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바로 재료였다.
질좋은 재료가 아니라면 아무리 뛰어난 야장이 제련한다고 하더라도 그 재료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누군가 일류야장이 잡철로 만든 검과 삼류야장이 백련정강으로 만든 검 중 하나를 고르라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삼류야장이 백련정강으로 만든 검을 택하리라
이렇듯 병장기에 있어서 재료는 그만큼 극명한 차이를 낳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질좋은 금속이란 누구나 탐내는 보물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금속 중 최고의 금속은 과연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물어볼 것도 없이 만년한철(萬年寒鐵)이라고 말이다.
무림에는 수많은 금속들이 존재한다.
싸구려 잡철부터 시작하여 강철(鋼鐵) ,현철(玄鐵) , 백련정강(百鍊精鋼) 등 그 질에 따라 무인들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싸구려 잡철의 경우 워낙 금방 부숴지기때문에 전쟁터에 나가는 일반 병사들이나 농기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잡철로 만든 병장기를 사용할 경우 내력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부숴져버릴게 자명하였기에 내력을 다룰 수 있는 무인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강철로 만들어진 병장기를 맞춘다.
적어도 강철로 만들어진 병장기만이 내력을 견뎌낼 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돈이 모인다싶으면 현철이나 백련정강과 같은 질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병장기를 바꾸는 것이 바로 무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인들이 꿈에 마지않는 금속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만년한철이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
무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금속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강도를 자랑하는 금속들의 왕이면서 평생 살면서 한 번 볼까말까할 정도로 희귀하기 짝이 없는 금속이었다.
보통 철은 오랜시간 놔두게 되면 부식이 되어 녹슬기 마련이다. 그렇게 철을 보관할 떄는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정한 온도와 습기를 유지하는 것이 요하다. 너무 낮은 온도에서 보관할 경우 깨지기 마련이었고 너무 높은 온도에서 보관하면 변질되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철의 보관은 무척이나 까다로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까다로운 보관을 거친 철은 묵으면 묵을 수록 한기가 차게되는데 이를 한철(寒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한철의 경우 묵은 햇수에 따라 강도와 탄성이 바뀌게 된다. 오래 묵을 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다.
이중 만년한철은 만년이상 묵은 한철을 칭하는 명칭으로 일반적인 철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강도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수많은 무림인들에게는 만년한철이란 꿈에서 마지않은 꿈의 금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선우의 눈앞에 그런 꿈의 금속이 나타난 것이다.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두근 두근
선우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한기 가득 서려있는 표면과 검강에도 베이지 않는 강도
틀림없었다.
만년한철인 것이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선우는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만년한철이 보관하고 있는 물건이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만약 아니라하더라도 이 만년한철로 된 상자를 녹여 검을 만들면 더 할나위 없는 명검이 되리라
이정도만되도 내단에 상응하는 아니 선우입장에서는 더욱 좋은 보물이리라
"마음에 든거야? 마음에 든거지?"
선우의 품에 안긴 인면지주가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말을 걸었다.
딴에는 죽이려고 칼은 치켜세운줄 알았고 잔뜩 쫄았것만
알고보니 상자를 쳤던 것이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인면지주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선우가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척 마음에 들어."
선우는 인면지주의 머리를 거침없이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런 보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니 그간의 감정이 훌훌 날아가 버린 것이다.
"헤헤헤헤"
머리를 쓰다듬어진 인면지주는 말갛게 웃음을 지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인간은 상자가 마음에 든 듯 해보였다.
그 말은 즉슨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녀는 기분좋게 미소를 지었다.
선우는 그녀의 미소를 뒤로 하고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앗 "
선우의 품에 안겨있던 인면지주는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아늑했던 탓이었다.
인면지주를 바닥에 내려놓은 선우는 상자쪽으로 좀더 가까이 접근하였다.
그리고 상자의 생김새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외관은 투박하기 그지 없는 단순한 상자였다.
그리고 따로 열쇠 홈이 파져있지 않는 것을 보니 그냥 단순히 열면 되는 구조인 듯 보였다.
선우는 상자 위쪽을 잡고 서서히 열기 시작하였다.
"흐읍"
하지만 상자는 마치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역시 쉽지 않은 건가?'
선우는 집중하여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몸에 활력이 들기 시작하였다.
"흐읍!"
선우는 다시금 힘을 주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들썩
하지만 상자 자체만 들릴 뿐
열리지는 않았다.
선우는 난감하였다.
뭐 이런게 다 있단 말인가
무슨 특수한 장치라도 되있는 걸까
선우는 다시금 상자 전체를 모두 매만지기 시작하였다.
분명 독황이 마음껏 열고 닫았다고 하였으니 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매만져보아도 마땅한 개폐장치는 찾을 수가 없었고 선우는 짜증이 났다.
스릉
그리고 다시금 검대에서 검을 꺼내었다.
검으로 상자의 이음새를 슬슬 긁을 심산이었다.
슥삭 슥삭
선우는 검을 이음새에 끼워 긁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졌다해도 그래봤자 인간이 만든 상자였다.
계속 긁다보면 언젠가는 열릴 것이다.
슥삭 슥삭
.
.
.
.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챙그랑
"안해"
하지만 아무리 이음새를 긁어도 열릴 기미가 안보였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선우는 검을 그대로 내동댕이 쳤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탓이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한 듯 하였다.
그저 찾기만 하면 모든게 해결될 줄 알았것만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상자는 열릴기미가 안보였고 지치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감탄하였다.
화경의 고수인 자신이 열수 없다니 말이다.
'검환이라도 써볼까? 아니야 내용물까지 부숴질지도 몰라. 그럼 녹여서 내용물을 확인해봐야되나? 아니야 이 보물을 누구한테 맡겨.......'
수많은 상념들이 그의 머리속을 헤집기 시작하였다.
이것 보물을 어떻게 처리한단말인가
검환을 만들어 부숴버리자니 부숴질지도 미지수였고 만약 부숴진다하더라도 내용물이 상할까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녹여서 확인하자니 이것을 믿고 맡길만한 야장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된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저기"
뒤에서 인면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그녀의 물음에 뒤를 돌아봤다.
"왜?"
"왜 저 상자를 발톱으로 긁는 거야?"
인면지주는 고개를 갸웃 거리면 그에게 물었다.
별안간 상자를 왜 긁는단 말인가
"안열리니까."
선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그래도 짜증이 치밀었기에 친절히 대답해줄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거 그냥 손만 대면 열리던데?"
그녀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선우에게 되물었다.
"뭐?"
그녀의 대답에 선우는 당황하였다.
그렇게 기관을 찾아다녔는데 손만 대면 열렸다니
'그럼 그냥 내력을 흘린 거 아니야!?'
선우는 아차 싶었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을 그냥 무식하게 들이민 것이다.
한마디로 뻘짓을 한 것이다.
짜증이 급격히 치밀어 올랐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선우는 민망함에 괜시리 인면지주에게 성을 내었다.
그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누가봐도 엿먹이려는 수작이 아닌가
"안물어봤잖아!"
인면지주 또한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자기 안물어봐놓고 성질내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상자를 그렇게 만지작 거렸는데 그걸 몰랐다고?"
"난 또 네가 상자가지고 노는 줄 알았지."
"잘도 가지고 놀았겠다!"
선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랑한 양 볼을 쭈욱 잡아댕겼다.
"으아아아아아"
"너, 나 엿먹이려고 일부러 그랬지?"
"여히 머허언해?(엿이 뭔데?)"
볼이 잔뜩 잡아당겨진 그녀는 울먹이며 선우의 답하였다.
엿이 뭐길래 자신의 볼을 잡아당긴단 말인가
그리고 먹는 것이라면 자신 먹지 뭣하러 그를 준단 말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엿에 대한 원망이 치솟았다.
"아니다, 내 체력 빼놓으려는 개수작 부린거지? 이 망할 거미가!"
"아이야 아이냐고!!(아니야 아니라고!)"
그녀는 볼을 잡아당겨지는 상황에서도 바득바득 대답을 하며 억울함을 토로하였다.
별안간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녀의 눈가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이건 아파서 나는 눈물이 아니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나는 것이리라
선우는 잔뜩 그녀를 괴롭히고 난 후에야 잡아당겼던 볼을 놔주었다.
그녀를 괴롭히니 어느정도 속이 풀리는 듯 하였다.
"씨이이이"
선우에 의해 볼을 잔뜩 잡아당겨진 그녀는 자신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만히 있는 자신을 왜 괴롭힌단 말인가
'개같은 놈'
그녀는 선우를 원독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원한은 언젠가는 꼭 갚아주리라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는 무심히 상자에 다가갈 뿐이었다.
착
선우는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선우는 한기가 가득 차 있는 상자에 천천히 내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하였다.
인면지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독황은 이 상자를 내력을 열쇠로하여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음양조화기가 천천히 흘러가더니 이내 상자 전체를 뒤덮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상자가 진동하며 공명하기 시작하였다.
'열리는 건가!?'
상자의 색다른 반응에 선우는 반색하였다.
드디어 열릴 듯 싶었기 때문이다.
.
.
.
하지만 상자만 공명만 할 뿐 열릴 기색이 없었다.
선우는 고민하였다.
'이거 왜 안열려?'
인면지주의 말을 들어보면 손만 대었는데 열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열쇠는 내력이라는 소리인데 왜 열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째릿
선우는 혹시나 싶어 인면지주를 노려보았다.
혹여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
"왜? 뭐? 때리게? 때려봐 때려봐!"
선우의 시선에 인면지주는 되려 언성을 높이며 바득바득 대들었다.
볼을 잡아당긴 원한이 아직 남은 듯하였다.
쾅
"꽥"
선우는 그대로 인면지주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다시금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면지주는 거짓말을 할 정도의 지능을 갖춘 녀석은 아닐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황은 어떤 방식으로 이 상자를 열었다는 말인가
선우는 머리속에 있는 독황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하였다.
'당가가 배출한 최초의 천하제일인 , 무림을 구한 대영웅, 고독관을 설립한 난봉꾼 , 그리고 만류귀원신공의 창시자......'
번뜩
순간 선우의 머리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는 재빨리 상자에 손을 댄 후 천천히 내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평범한 음양조화기가 아니였다.
만류귀원신공을 모방한 음양조화기였다.
몸안에 있는 잠식되어있는 독과 내력이 다시금 하나로 섞이기 시작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 녹빛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만류귀원신공의 기운이었다.
다시금 음양조화기를 만류귀원기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선우는 탈바꿈 된 만류귀원기를 그대로 상자에 흘려보내었다.
만류귀원기가 어느새 상자 전체를 감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달칵
상자가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좋았어!'
선우는 쾌재를 불렀다.
아무래도 만류귀원기를 흘려보내는 것이 정답인 듯 했기때문이다.
선우는 천천히 열리는 상자를 잡아챈 후 완전히 열어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 안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내부가 어두워 무엇이 있는지 잘보이지가 않았다.
선우는 상자에 그대로 손을 넣어 안쪽을 더듬거리기 시작하였다.
툭
그리고 머지않아 무언가 닿는 느낌이 났다.
선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