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35.대적자-1
타닥 타닥 타닥
옥령을 등에 업은 선우는 산등성이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산세가 험하여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심스럽게 이동하여야 하건만 선우는 개의치 않은지 그저 더욱 빠른 속도를 낼 뿐이었다.
이재원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숨이 미치도록 가빠왔다.
몸을 지탱하던 다리에 힘이 풀려갔다.
3갑자에 이르렀던 내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음양마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머지 않아 기절해버릴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기절하기 전에 어떻게해서든 백검문의 비처를 찾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백검문의 비처가, 백화봉 꼭대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타닥 타닥 타닥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선우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화봉 최정상에 있는 호수였다.
백화봉은 본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산이었기에 꼭대기에 상당한 크기의 분화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 물이 고여 커다란 호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호수에 도착한 선우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비처로 들어갈 입구를 찾고 있었다.
'어딨어, 시발'
옥령이 깨있기라도 했다면, 보다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수혈을 짚힌 옥령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분명 음양마의 말에 따르면, 백화봉 최정상에 있는 호수 근처에 자라모양의 바위가 있다하였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자라모양의 바위는 보이지가 않았다.
'이 늙은이는 자라가 어디 있다는거야!?'
마음이 급해지니 욕짓거리가 절로 나왔다.
격발이 다 되어 기절하기 전에 비처를 찾아야했다.
그때였다.
호수 끝자락에 있는 기둥 모양의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우는 바위가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음양마는 자라 모양의 바위 쪽에 백검문을 상징하는 월계화가 있다고 말하였다.
바위를 유심히 지켜보던 선우는 머지않아 음양마가 말한 표식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거다.'
팍 팍 팍
선우는 그대로 바위 밑동을 파기 시작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한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자라 모양의 석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선우는 자라 석상의 등껍질을 잡은 뒤 망설임없이 돌리기 시작하였다.
끼익 끼익 끼익
오른쪽으로 세 번
끼익
왼쪽으로 한 번
쿠우우우우우웅
음양마가 말해준 순서대로 석상을 돌리자, 기둥 모양의 바위가 굉음을 내며,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내 바위가 옆으로 이동하였고 바위 밑에 계단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터벅 터벅
선우는 업고 있던 옥령을 앞으로 안아들고, 계단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쿠우우우우우웅
그들의 모습이 계단 밑으로 사라지자 기둥 모양의 바위는 또 다시 굉음을 내며 계단이 있던 공간을 가로막았다.
기둥모양 바위는 아무런 일도 없단 듯이 묵묵히 산 정상에서 호수를 지키며 서있을 뿐이었다.
**************
계단으로 내려온 선우는 머지 않아 백검문의 비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비처를 밝히고 있는 세 개의 야광주 였다.
천무맹 지하 은신처에 있던 야광주만큼의 밝기는 아니였지만, 비처를 온전히 보여줄만한 밝기는 가진 듯 보였다.
그리고 두개의 토굴이 있었다.
하나의 토굴 안에는 벽곡단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있었고, 다른 토굴에는 평평한 모양의 커다란 바위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선우는 제일 먼저 평평한 바위 위에 옥령을 눕혔다.
털썩
선우는 옥령을 눕힌 뒤 바위 옆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 앉았버렸다.
"하아....하아..."
선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쉴수 있게 된 것이었다.
선우는 입고있던 패왕귀면갑을 벗어버렸다.
탕
그때였다.
"크윽?!?!?"
패왕귀면갑을 벗자, 여기저기에서 온갖 고통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끄아아아아악!!"
선우는 갑작스레 몰려 들어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단전부터 시작해서 혈도, 내장 , 뼈 , 근육 등에서 찢어질듯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선우는 뒤늦은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이 댓가는, 이미 검황을 상대하기 위해 일시적인 각성 상태로 만들었을 때부터 예견된 상황이었다.
내력으로 혈액의 흐름을 미친 듯이 가속화시켜, 신체 강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 정상적인 무인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으나, 그동안 신체가 받았던 부하를 시전자가 고스란히 부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힘이 다 빠져버린 육체를 패왕귀면갑을 통해 강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지칠대로 지쳐버린 근육과 뼈가 부하를 받게 된 것이다.
거기다 검강에 수없이 베어지면서, 극심한 내상이 쌓이게 되었다.
고통을 억제해주던 패왕귀면갑을 사라지자 그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음양마가 선우의 내력을 격발시킨 기술은 단전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가져왔다.
검황을 상대하면서 이미 다 떨어진 그의 내력을, 한계까지 쥐어짜고 쥐어짜낸 것이다.
만약 비처에 도착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단전이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선우는 신체 이곳저곳에서 몰려들어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눈물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너무 아팠다.
너무 힘들었다.
고통에 몸을 뒤틀때마다 더한 고통이 느껴졌고, 더욱 더 몸을 뒤틀게 되었다.
고통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선우의 기억과 장삼의 기억 모두를 통틀어도 이 만큼 아팠던 적이 없었다.
너무 극심한 아픔에, 선우는 기절조차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고통을 받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목이 쉬어 더 이상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만이 느껴질뿐이었다.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대로 자신이 사라지는게 옥령에게 더욱 좋은 일이 아닐까?
자신과 같은 이방인보단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게 좋지 않을까?
사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닐까?
지금 죽어버린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극단적인 생각이 선우의 머리 속을 온통 뒤 흔들었다.
극심한 고통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 죽자, 죽어서 고통에 벗어나자. 죽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거야.'
선우는 혀를 깨무려는 순간이었다.
"미친 새끼가, 기껏 살려놨더니 뒈질라고 하네? "
음양마의 목소리였다.
터벅 터벅
선우의 귀에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내 토굴 안으로 음양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미 목이 쉬어버린 선우는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썩을 새끼야, 그딴 죽어있는 눈으로 쳐다보지마라. 재수없다."
말을 마치고 음양마는 선우에게 다가왔다.
음양마는 선우의 혈도 몇 군데를 점하고, 맥을 재었다.
"미친새끼네 이거, 어떻게 성한 곳이 없냐?, 쯔쯧"
선우의 상태를 확인한 음양마는 혀를 찼다.
위태롭게 보이긴 하였지만 이정도로 극심할 줄은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혈도는 만신창이였고, 근육은 갈가리 찢겨져있었다.
뼈는 다 골고루 부숴져 있었고 내상을 어찌나 크게 입었는지 내장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만신창이상태에서 내력을 격발시켜 단전을 한계까지 쥐어짰으니 그 고통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무인의 경우 회복력이 일반인보다 빠른데 이는 내력을 이용하여 회복력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우는 단전을 한계까지 쥐어짜여, 회복력을 활성화시킬만한 내력이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다.
"쯔쯧, 미련한놈."
음양마는 이런 몸 상태로 미련하게 움직인 선우를 보고 혀를 찼다.
이정도로 심각한 상태라면, 치료한다해도 완치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목숨은 일단 살려주마."
말을 마친 음양마는 선우의 장문에 손을 올리고, 음양조화기를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내력을 통해 회복력을 활성화시킬 요량이었다.
슈우우웅
음양마가 가진 음양조화기가 선우의 몸에 주입되기 시작하였다.
음양조화기는 장문에서 시작하여 혈도를 천천히 돌며,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부우우웅!!
장문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발생하여 음양조화기가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뭐야!?"
깜짝 놀란 음양마는 급히 손을 떼려고 하였으나 흡입력에 때문에 손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흡성대법!?"
내력을 빨아들이는 무공은 어러가지 있었는데 모두 악랄하기 그지 없어 익히기만 하더라도 무림공적으로 선포 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무공으로는 과거 마교의 장로였던 흡성대마가 익혔던 흡성대법이 있었는데, 피시전자의 내력을 목내이가 될때까지 빨아들여버린다
살기가 치솟은 음양마는 반대 손에 내력을 집중하였다.
이대로 선우의 머리통을 으깨버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기현상이 일어났다.
음양조화기를 흡수했던 선우의 신체에서 다시금 음양조화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내력의 변화가 없는 상태로 말이다.
음양마는 순간 당황하였다.
이게 무슨 기현상이란 말인가
흡성대법이란 것 자체가 흡수한 상대의 내력을 빼앗아 단전에 쌓아버리는 수법이 아니던가
그런데 선우는 흡수는 하되 혈도를 순환시킨 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다.
흡수만 하는 흡성대법과 달리 흡수와 반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공에 따라 달라지는 내력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흡성대법으로 흡수당한 것이라면, 음양조화기의 성질이 변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내력은 변함없이 음양조화기 그자체였다.
같은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이새끼!?!?"
음양마는 선우에게 흘려보내고 있던 내력의 양을 더욱 늘렸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전에 흘려보냈던 것이, 시냇물이 흐르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정도였다.
엄청난 음양조화기가 선우의 몸에 흘러갔고 혈도를 돌며 회복력을 극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갈가리 찢어졌던 혈도는 아물기 시작하였고 깨지기 직전까지 갔던 단전은 다시금 안정화되기 시작하였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내장또한 제자리를 찾아가면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찢어졌던 근육이 아물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부숴졌던 뼈들은 다시 붙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그 광경에 음양마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상상도 못했다.
자신이 이재원으로부터 구한 아이가 선옹과 결전을 치르기 전 남긴 음양조화신공을 익힌 후인이었을줄이야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백검문의 비처안에 음양마의 웃음소리가 가득차게 되었다.
***********
한편 선우는 음양마의 손을 타고 몸으로 들어온 음양조화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단전에 있는 모든 내력이 쥐어짜였기에 회복조차 할 수 없었던 그에게, 음양마가 불어 넣어준 음양조화기는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장문에 흡수된 음양조화기를 그대로 받아 혈도를 순환시키기 시작하였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음양조화기가 혈도를 지날 때마다 회복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네 바퀴정도 순환시키고 혈도가 어느정도 안정화가 되자 선우는 다시금 음양마에게 음양조화기를 흘려보냈다.
음양조화신공은 순환의 무공이었다.
크게 순환시킬 수록 더욱 정순해지고 강력해진다.
선우는 자신의 몸뿐만아니라 음양마의 몸까지 이용하여 음양조화기를 순환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력을 보낸지 얼마지나지 않아, 엄청난 양의 음양조화기가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전과는 비교불허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음양조화기가 선우의 몸속 깊은 곳에 속속히 들어찼고, 회복력이 극대화되기 시작하였다.
뼈가 붙고, 갈가리 찢겼던 내장과 근육 그리고 혈도가 아물어가기 시작하였다.
미칠 것 같던 고통이 해소되었고 따뜻하고 상쾌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아아아아'
선우는 극도의 행복감을 젖어들며, 그대로 정신을 잃게 되었다.
***********
털썩
선우에게 음양조화기를 잔뜩 흘려보낸 음양마는 지친 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설마 음양조화신공을 익혔을 줄이야......"
마침 음양조화신공을 익혔기에, 선우는 만신창이 같았던 몸을 완벽히 회복할 수 있었다.
행여 다른 무공을 익혔더라면, 지금처럼 완벽히 회복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만큼 선우의 상태는 심각하였다.
엄청난 행운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흠, 엄청난 행운이라...."
음양마는 턱 매만지면 생각에 빠졌다.
상황이 너무 잘 맞았다.
우연히 백화봉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을 우연히 지나던 자신에게 구함을 받았다.
또한 우연히 음양조화신공을 무공을 익혀 평생 폐인 될 만한 상태에서 회복하였다.
이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결과 초절정에 불과한 그가, 반선이라 불리우는 경지, 현경에 이른 이재원으로부터 멀쩡한 몸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기묘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생각을 이어가던 음양마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
"....대적자."
기절한 선우를 바라보는 음양마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