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127. 몽마학원 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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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은 86번에게 꽤나 낭만적인 남자처럼 여겨졌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손을 잡은 채 학원 복도를 거닐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을 괜스레 힐끔거리면서 서로의 체온과 냄새, 호르몬을 확인한다.
얼핏 무덤덤한 초창기 커플처럼 보일 정도로 두 사람 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으나 서로는 알고 있었다. 상대방에게서 이성을 끌어오는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특히 86번의 페로몬은 강렬했다. 모든 남자를 유혹하는 고강도 페로몬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다.
물론 86번은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원래 타고난 것이 있는 법이다. 메피스토와의 계약을 별개로 체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은 타고나는 법이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았다.
온탕에 있다가 냉탕에 들어가면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느끼듯이 방금 전까지 모든걸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레 구세주가 나타나니 기분이 묘했던 거다. 뇌에서는 이상한 파동을 내비쳤고 그 때문에 호르몬이 득시글거렸다.
그 호르몬 작용은 페로몬이 되어 남성기를 마구잡이로 자극시켰다. 밑도 끝도 없는 자극에 13번은 성기가 발작적으로 부풀어오르는 현상을 느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더 매력적인 거란 말이지.’
지금까지 몽마학원을 다니고 수차례 서큐버스 여성들을 경험하면서 쌓여왔던 데이터를 기반으로 봤을 때, 86번의 페로몬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분명 섹스할 때 맛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달콤하면서도 진득하기도 한. 이 물씬한 향 안에 갇혀서 헤엄치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그 갈증을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마구 쌓여올라왔지만, 13번은 간신히 욕망을 억눌렀다.
아무리 페로몬을 발사하고 있다한들 86번에게도 시간은 필요했다. 그걸 잘 아는 13번이었기에 조금씩 빌드업을 해나가야 했다.
“망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아, 응.”
“나는 그쪽 세상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너는 여길 졸업해서 그곳으로 다시 환생하고 싶은거지?”
“응...”
“왜? 그만큼 거기가 좋았다는 뜻인가?”
86번은 13번의 일반적인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 일반적인 질문은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 일반적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거다.
나름 심오한 질문이었다. 생각해보니 환생 따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기억이 있던 그녀였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배신을, 아니, 결혼해서 영원히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몸과 마음에 난도질을 당한 그녀에게 현생이란 지옥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이나 이곳이나 별반 다를게 없었다.
그럼에도 환생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이대로 지옥의 심판을 받는게 두려웠다는 것.
막상 지옥에 온 이유에 대해 들으려니 자신이 없었다. 분명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으나 막상 그 이유를 들었을 때 불쾌감이 상당할 것 같았고 부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국 86번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아쉬워서...”
“아쉬워? 좋았던 게 아니라 아쉽다고?”
“응. 다시 태어나서 살면 나쁜짓 안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흠... 속죄의 삶을 살고 싶은건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86번은 예쁜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말이야?”
“내가 이 학원을 졸업하는걸 도와주고 싶다고.”
13번은 86번의 양손을 잡고 깍지를 낀 후에 마주보고 섰다.
두근두근
86번은 13번의 행동에 심장 가까운 곳이 찌릿하고 뜨거워지는게 느껴졌다.
사랑.
전생에서 그 사람을 만나 사랑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지금의 감정이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86번은 13번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못해.”
다시 복수의 칼날이 날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음의 상처는 오랫동안 유지된다. 시퍼렇게 남은 멍은 어느순간 없어지지만, 난자하게 갈겨진 칼자국은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다. 86번의 마음도 그랬다. 13번은 엄연히 인큐버스가 될 교육생이다. 인큐버스가 되면 자연스럽게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직업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환생자는 섹서라는 타이틀을 갖고 태어난다. 따라서 메피스토와 계약을 한 86번은 이곳에서 13번과 계약을 맺고 현생으로 돌아가 다른 남자들과 섹스를 하게 되면 그것만으로 살인병기가 된다. 그렇다고 섹서가 섹스를 하지 않으면 인기가 없어지고 살아남기가 힘들어진다. 시청신들은 그녀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섹스하는 장면만 보고 싶어서 미쳐 날뛰는 관음증 환자들일 뿐인 거다. 섹스를 하고 나서 그 상대가 죽는다면 그만큼 더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 이는 물론 메피스토의 계략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인큐버스는 안 돼. 인큐버스랑은 계약을 맺을 수 없어. 이 사람이 진심이라면 더더욱 섹스를 해서도 안 되고! 나랑 계약하지 않고 섹스를 하면 분명 죽을 거야!’
사실 망자인 제 짝꿍에게 호감을 느꼈던건 그거였다. 함께 졸업을 하고 환생을 하게 되면 같이 현생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원하는만큼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하는 낭만적인 생각. 그런데 그 상대가 이 학원을 졸업할 수 있는 깜냥이 아니라면 얘기가 복잡해지는 거다.
“미안. 나는 너랑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
단칼에 거절을 당한 13번은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달아오른게 아니라 말 그대로 타올랐다. 온도는 급상승했고 창피함이 아닌 분노에 의한 감정임을 거리낌없이 표출했다.
“이...”
86번은 순간 겁에 질렸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교실에도, 심지어 교무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기숙사로 돌아가 잠을 자거나 원하는 이성을 골라서 섹스 삼매경에 빠져있을 터였다. 심지어 한 기숙사 방에서 난교파티를 여는 교육생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기숙사는 지금쯤 섹스파티를 열고 있을 거라는 얘기. 한 마디로 86번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86번이 겁을 먹은 가운데 안타깝게도 13번의 입에서 듣고싶지 않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걸레같은 년이.”
86번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녀가 쓰러지려는 찰나, 13번은 그녀를 붙잡고 일으키면서 허리를 감싸안았다.
“아, 안 돼..!”
눈이 마주친 채로 으르렁거리는 13번은 금방이라도 토끼같은 86번을 잡아먹을 듯 보였다.
“어차피 쉽게 보내줄 생각도 없었어.”
이제는 13번이 악마처럼 보였다. 아, 사실 악마가 맞다. 애초에 악마를 믿은게 잘못이었다.
이곳에서의 섹스는 모든 조건을 통틀어서 합법이었다.
상대가 좋든 싫든 그것은 실기평가를 연습하기 위한 쌍방의 이익으로 간주했다. 원래 이 학원의 목적 자체가 섹스 실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연애를 하기 위한 학원이 아니었으니까. 이를테면 13번은 후배에게 섹스스킬을 알려주기 위해 섹스를 했다고 말해버리면 방법이 없다.
13번이 A클래스 교육생이고 86번은 B클래스 교육생이니 이 이론은 반드시 성립한다.
13번은 86번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여전히 허리를 감싸안은채 그녀를 끌고 갔다.
“제발... 제발... 안 돼... 난 그걸 하면...”
“입 다물어. 줘패기 전에.”
86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눈물에 이전 생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영혼의 짝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의 외도. 그리고 지금은 낭만적이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13번이 자신과 강제로 섹스를 하려고 했다.
방금까지 심장 주변이 사랑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걸 떠올리면 정말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발버둥을 치면서도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만큼 13번의 힘은 셌고 섹스에 대한 본능도 강렬했다.
그런데 그가 이끌고 들어간 교실에는 13번 이외에도 많은 인큐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 왔구만.”
“얘가 걔야? 여태 한 번도 다리를 안 벌렸다는 전설의...”
“그 조루 짝꿍.”
“아이고, 불쌍하기도 하지.”
“망자라면서? 존나 이쁘긴하다.”
“크크. 어차피 오늘부터 우리가 돌려가면서 먹을건데 뭘.”
그 마지막 말에 86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려가면서? 지금 날 두고 여럿이서 하겠다는 소리야?’
그 말은 곧, 그들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 돼... 그러다 다...”
“다 뭐? 지금 우리 협박하는 거야?”
“크크크. 아이고 귀여워라. 지금부터 우리가 예뻐해줄게.”
이쯤되면 그들이 죽는것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억지로 섹스를 강요당하는 것 자체가 죽는것만큼 싫었다.
차라리 지금 메피스토를 불러내서 모든걸 다 포기하고 망자의 길에 줄 서겠다고 선포해버릴까도 생각했다.
찌익
13번은 86번의 치마를 붙잡고 냅다 찢어버렸다. 86번의 팬티가 그대로 드러났고 인큐버스 교육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이 년 뭐야! 밑트임 팬티 입고 있잖아?”
“알고보니 섹스를 갈망하는 씹걸레년이었구만.”
“그거 아니야...”
원래 여자 교육생들은 모두 밑트임 팬티를 입어야 한다. 이게 이 학원의 룰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팬티를 벗겨야되고 애액 때문에 젖어버린 팬티를 수시로 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복도에는 여자들의 애액이 떨어져서 번진 자국들이 많이 있을 정도였다.
인큐버스들은 모두 바지를 벗었고 고추를 꺼냈다.
치욕.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어보였다.
“내가 먼저인거 알지?”
13번이 나머지 교육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
86번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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