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120. 몽마학원 편(7)
* * *
86번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 역시 약간은 애매해진 이 상황에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저지른 건 나였지만, 그 결과를 제공한건 나였다.
나와 86번, 두 망자 출신의 교육생은 이번 수업의 담당선생님인 구스트는 우리를 교무실로 데려와서는 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놓고보니까 정말 학창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너네 수업시간에 대체 무슨 짓이니?”
“죄송합니다.”
“앞에서는 수업하고 밑에서는 손장난을 해?”
“... 죄송합니다.”
대체 얼마나 더 죄송하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이 사람의 직성이 풀릴까 싶었다. 구스트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데 모든 게 다 틀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구스트가 화를 내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생각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으로만 86번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는데 오히려 그 신음은 33번보다 더 컸다. 33번은 후배위로 호되게 추삽질을 당했는데도 그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좋다고만 얘기했고 정신을 잃고 침을 질질 흘리기만 할 뿐.
물론 쾌감의 정도를 어느 잣대에 대고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86번이 더 잘 느끼는 걸 수도 있고 33번이 표현을 소극적으로 하는 편일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그 순간에 교육생들의 평가는 제 멋대로일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쯤 이렇게 수군거리고 있겠지. “저 새끼는 손가락만으로 86번을 보내버렸어.” “근데 구스트 선생님은 그렇게 열심히 박아댔는데 결국 사운드에서 밀린 느낌이랄까.” 등등의 대화 말이다.
그런걸 다 종합해서 생각해보니 구스트가 내게 유독 더 화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크흠흠...”
그리고 또 한 가지.
구스트는 훈계를 하는 동안에도 힐끔거리며 86번의 실루엣을 위아래로 훑었다. 교육생을 자기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그였지만, 어디까지나 교육을 목적으로 관계를 갖을 수 있는 정도였기에 그런 명분을 만들지 않으면 손조차 댈 수 없던 거다.
물론 티그마는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접근을 했지만, 서큐버스의 경우에는 다르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우위에 있는 악신에게 가호를 받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져볼 법도 했다.
여기서 남악신과 여악신의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남악신은 자신이 후원하는 여자 후보생에게 상당히 소유욕을 느끼는 편이었고 여악신들은 대체로 방관하며 알아서 크라는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86번을 넘보면서도 허심탄회하게 따먹겠노라고 표출하지는 못하는 모습인 듯.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에게 더 화를 내는게 아닌가 싶었다.
“손가락 장난질은 다른 수업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때까지는 꼭 참도록 해라. 알겠지?”
“네.”
“그럼 돌아가봐. 아, 너는 남아라.”
구스트는 나를 따로 지목하며 말했다. 역시나... 나는 내 예상이 빗나가는 일이 없는게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구스트가 86번을 내달라고 한들 그녀를 내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구스트는 86번이 나가고 난 뒤, 그녀가 나간 문쪽을 유의깊게 보다가 내게 물었다.
“86번이랑 많이 친하냐?”
“아뇨. 그닥 친하지는 않습니다.”
“듣자하니 첫 번째 파트너와의 섹스를 거부했다고 하던데 너와는 어째 잘 되는 것 같구나?”
“86번이 마음에 드십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구스트는 이런 내 당돌함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말이 좀 통하는 놈이었구나!”
“86번은 건드리지 않으시는게 좋습니다.”
“응?”
처음에 기대심으로 가득찼던 구스트는 내가 의외의 대답을 내놓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뭔 소리냐?”
“비밀을 유지해주신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아...
구스트는 이번에 안 좋은 예감을 직감했는지 한숨을 쉬었다.
“뭔데, 뭐. 저 여자가 뭐 악신의 가호라도 받고 있다는 얘기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젠장. 그럴줄 알았다! 휴... 이쁘더라. 또 조임도 좋겠지. 방금 신음을 들으니까 느낌이 확 왔다. 아까 봤냐? 교실에 있는 인큐버스 교육생들은 죄다 86번을 노리고 있을 거다. 그 신음은 정말 독특했다. 누구나 다 좋아할만한 신음이야. 생각해봐라. 내 밑에 깔려서는 좋아 죽는 그 신음을... 하지만 악신이라니. 네 놈도 참 어려운 파트너를 만났구나. 그럼 잘해보라고.”
구스트는 날 진심으로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악신의 여인과 섹스를 한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때문에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절대 졸업을 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아는 거지.’
나는 구스트와의 면담을 마치고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86번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내 팔을 붙들고 옆에 매달리듯 했다.
“아까 뭐야아...”
“네?”
“수업시간에 그렇게 기습을 하면 저... 부끄럽단 말야... 요...”
은근슬쩍 말을 놓는 86번.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존대를 하고 있다고 할까. 그 모습이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팔을 움켜잡고 자기 상체를 내쪽으로 꼭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젖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 이 젖가슴도 참 예쁜 젖가슴이었지. 아주 참한 젖가슴. 참젖.
“옆에서 계속 꼼지락거리길래 해달라는건지 알았죠.”
“치, 착각하지 말아요... 나는 그쪽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그냥 나하고 계약을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시간을 질질 끌 필요없이 바로 말해버렸다.
원래 내 성격도 그렇고 이딴 것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 사전에 밀당은 없다. 오로지 직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가끔씩 꽤나 잘 먹힐 때가 있다. 여자들도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보다 직진남이 더 좋다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인지 86번도 내 반응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활짝 웃었다.
“농담은...”
“농담 아닌데.”
“하지만 계약자를 찾는건 정말 신중해야 하는 일인걸요.”
“나는 신중하게 생각한 거예요.”
내 진지한 표정과 대답에 사뭇 놀란 86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수업이 끝난 지금 시간부터는 알아서 식사를 하고 알아서 기숙사로 돌아가면 된다.
교실은 66층에 위치했고 서큐버스 교육생 기숙사는 65층에, 인큐버스 교육생 기숙사는 64층에 위치했다. 기숙사는 총 200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각방에 4개의 2층 침대가 있었고 각자 지정된 자리가 존재했다.
그야말로 지옥판 군생활의 시작인 거다. 아, 물론 섹스를 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는 점에서 판이하게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까지는 잘만 붙어있던 86번은 내 갑작스런 러브콜을 받자 고민에 빠진채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잡념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코너쪽에서 그녀를 벽쪽으로 몰아가서 붙여넣었다. 내가 그렇게 압박을 주자 86번은 여리여리한 숙녀처럼 눈을 질끈 감고 키스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장난이라도 치면 신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입술에 내 입술을 부비고 들어갔다. 가슴을 주물거리고 성기에 손가락까지 꼽고 대딸까지 쳐주던 우리지만, 키스를 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걸로 시작했다. 자극은 좋은 식감에서부터 시작됐다. 말랑한 아랫입술을 서로 부딪치며 숨결을 공유하다가 어느순간에는 입술을 조금씩 벌려서 안쪽에 있는 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래, 키스라면 또 자신있지. 나는 원래부터 키스를 할 때 젖가슴을 움켜잡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86번의 젖가슴을 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깊게 뿜어져 나오는 86번의 숨. 나는 그 빨아들이는 듯한 숨결에 맞춰 목덜미를 잡던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었고 이게 또 꽤나 자극적이었는지 달콤하면서도 만족스러운 한숨으로 돌아나왔다.
서로의 혀를 확인하면서 더 이상 야릇해질 수가 없을 정도로 분위기와 열기가 물씬 달아올랐다. 이대로 섹스를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그런데 누군가 위쪽에서 초를 쳤다.
“너네 뭐하냐?”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어트리고 위쪽을 쳐다봤다. 서큐버스였는데... 낯이 익었다. 젠장... 티그마였다.
“개인시간이긴한데 지금 하는 애무는 점수에 반영되지 않을텐데. 혹시 두 사람 서로...”
“아, 아닙니다. 그런건. 시험에 앞서서 서로 합을 맞춰본 것 뿐입니다. 알다시피 저희는... 아직 이런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래.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 여기는 재수생들도 많으니까.”
“... 네. 맞습니다.”
“음, 일단 그래. 둘 빨리 헤어지고 너는 이쪽으로 올라와.”
“네?”
티그마가 가리킨 건 당연히 나였다.
입학한지 첫날부터 서큐버스 선생 하나와 인큐버스 선생 하나에게 찍힌 것 같다. 좋은건지 나쁜건지 참 애매한 상황이다.
어쨌든 계약을 코 앞에 두고 실패해버렸다. 티그마에게 자기 남자를 빼앗긴 86번은 꾸벅 인사를 하곤 도망가듯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그녀가 티그마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나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금방이라도 울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으...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위로 올라가는 길뿐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방과 후 수업이다.”
시발... 대체 얼마나 현실세계와 싱크로를 맞춘 거냐.
방과 후 수업이라니. 근데 방과 후 수업이 아니라 방과 후 섹스겠지.
“어때, 저 짝이랑 합을 좀 맞춰봤나? 지금보니까 무슨 연애질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던데 확 덮쳐버리지.”
“그게... 사연이 좀 있습니다.”
“흐음... 그래? 그래, 뭐. 알겠다. 아무튼 나는 너가 사정지연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주겠으니 따라와라.”
티그마는 직원용 기숙사로 나를 데려갔다.
그런데 직원용 기숙사에 들어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이곳은... 사창가인가... 대체 어떻게...
하아... 하아... 아아앙... 아아아아!
이런 종류의 소리가 여러 음색으로 섞여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이곳은 섹스의 도가니였다. 각방에 들어있는 정체불명의 커플들은 살갗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섹스에 몰두하고 있었다.
“섹스를 연구하는 곳이니 당연히 이럴 수밖에. 여러 가지 체위를 연구하고 속궁합을 맞춰보는 곳이다. 너가 상급생이 된다면 여러 서큐버스 선생들과 합을 맞춰볼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내가 조금만 독차지하도록 하겠다.”
나는 다시금 티그마의 소름돋을 정도로 완벽한 육덕몸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기 방에 도착한 티그마는 스스럼없이 옷을 하나둘 벗어버렸다.
“다른 교육생들은 동성들끼리 안에 모여서 좆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너는 여기서 나랑 자는 거야. 실컷하고 지치면 같이 자자고.”
몽마학원 최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