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115. 몽마학원 편(2)
* * *
“86번 님.”
“..?”
나는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86번에게 접근했다.
어쨌거나 이 여자도 망자라는 신분을 갖고있는데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다른 어떤 악신에게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후원을 해줬다는건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여자를 보는 순간 단언컨대 외모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웬만한 몽마보다 예쁜 얼굴과 부드럽게 떨어지는 완만한 곡선의 신체 실루엣은 확실히 어떤 악신이라도 탐낼만 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예쁘장한 눈망울을 두세 번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과 똘망똘망한 눈망울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악수를 신청했다.
86번은 처음에는 나에게 경계심을 드러냈지만, 이내 내 번호를 확인하고 손을 맞잡았다. 내가 망자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같은 반에 같은 신세의 망자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 네. 그러네요... 근데 무슨 일로?”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가 해서요. 아까보니까 인큐버스 녀석이랑 싸우시던데.”
“... 그 얘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여기서 교육 받는게 마냥 좋지 않은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녀는 내가 끈질기게 말을 걸자 눈살을 찌푸리며 잡고 있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아까보니까 서큐버스 여자한테 사정을 4번이나 했다던데.”
그새 소문이 퍼져나간 모양이다. 나는 화끈해지는 얼굴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걸었다.
“제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는거 아닌가요?”
나는 86번이 나에게 따지듯 묻자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되물었다.
“제가 뭐... 그쪽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거죠? 제가 서큐버스 여자랑 잠을 자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와 똑같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뒷걸음질치는 그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저희가 같은 망자라서 동질감을 느끼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서큐버스나 인큐버스를 악당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여기서 졸업하기 전까지는 동거동락해야 하는 사이이고 같이 섹스도 배우고 여러모로 즐길거리를 함께 즐겨야 하니까요.”
“... 그쵸... 그래요. 가서 많이 하세요.”
“이상하네요. 저는 도움을 주려고 하는건데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한번 더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쯧. 나는 혀를 한 차례 찬 후에 돌아서서 다시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제서야 86번이 내 소매를 움켜잡았다.
“저기...”
“네?”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거죠?”
그래. 이렇게 도움이라도 요청하란 말이야, 젠장할.
“아시다시피 저는 방금 사정을 4번이나 해서 지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수업시간이 되면 또 실습이라고 해서 섹스를 또 해야하겠죠. 그러니까 선생님에게 말씀드려서 저와 짝을 맺자고 말하세요. 그럼 그쪽이 원하지 않는 대상과 섹스하지 않도록 도와드리죠.”
“엇!”
그녀는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사실 그랬다.
인큐버스들 중에는 그녀를 탐하는 놈들이 많을 것이다. 외모적으로 엄청 뛰어나서 눈에 띄니까. 하지만 다른 서큐버스들은 나를 그닥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서큐버스 짝을 붙잡아서 어떻게든 졸업을 해야하는 것이다. 누구도 다시 나와 짝을 짓고 싶지 않아한다면 나는 이대로 평생 이곳에서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고 6666일 후에는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만큼 내 결정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 그쪽은 조, 조루잖아요.”
“저 조루 아니에요.”
“조루 맞아요! 어떻게 10분도 안 돼서 4번이나 사정을 하시냐고요!”
“아놔, 진짜... 근데 왜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고 그러세요?”
“조루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요. 기분이 그닥 좋지 않으면 오래 참을 수 있다고요. 애초에 그쪽이 서큐버스 안쪽에 콘돔도 없이 생자지로 집어넣어 보기나 했냐고요.”
누구한테 박히기만 하는 여자들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사정 시간에 대해 민감한지를.
내가 생각 이상으로 화를 내자 86번은 고개를 저었다.
“놀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실 거예요, 말 거예요. 아마 다음 수업시간에는 무조건 그쪽 상대랑 섹스를 하게 될 겁니다.”
86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서 우물쭈물하다가 마침내 말했다.
“할게요! 그쪽이랑 짝할게요.”
“잘 생각했어요. 그럼 이따 수업시간에 내 옆자리로 와요.”
“네..!”
86번은 내가 교실로 들어가고서 한참을 또 복도쪽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계속 주의산만하게 왔다갔다 거리면서 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게 뭔가 수상하다. 설마 망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날 감시하라고 보낸 누군가의 덫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수업시간이 되고 86번은 약속대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내 짝이었던 서큐버스가 돌아와서 나와 86번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건 또 뭐야?”
“우리 짝 바꿀 거예요!”
86번은 당돌하게 외쳤다.
“뭐?”
서큐버스는 피식 웃었고.
“잘됐네. 조루 새끼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보지? 이 새끼 3분 카레보다도 못한 새끼야.”
“그건 그쪽이 기분이 좋아서였다고 전해 들었어요!”
“으... 응? 그렇지. 기분이 당연히 좋았겠지. 누구 보진데.”
“저랑 바꾸시면 될거 같아요!”
“어, 어... 알겠다.”
서큐버스는 해맑은 86번의 반응에 의외의 반응을 보이며 바뀐 자리를 찾아갔다.
이번 시간, 나는 약속했던대로 86번과 섹스를 하지 않았다.
“너희는 왜 섹스를 하지 않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저희는 다른 교육생들이 섹스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중입니다!”
“관전잼! 배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호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우리를 칭찬했다.
“본능에 이끌리지 않는 모습이 바람직하구나. 그래, 때로는 직접하는 것보다 관찰하는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 너희가 봤을 때, 이 커플의 섹스의 관점 포인트는 무엇이지?”
찌걱찌걱
뭐, 사실 섹스에 관점이라는게 뭐가 있겠는가. 넣었다 빼는 원포인트 아니던가? 나는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의 자지와 보지가 만나서 끈적하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써 말이라도 지어내보면 어떨까 싶어서 말했다.
“음미... 음미하는군요.”
그러자 선생님은 박수를 쳤다.
“브라보. 완벽하다. 그래, 이 두 교육생은 서로를 음미하는 중이다. 이 쫀쫀한 안팎을 봐라. 자지가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질내의 수축경계를 끄집어내고 있지 않냐? 이건 말 그대로 서큐버스쪽이 인큐버스의 자지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증거다. 곱씹는 게지. 자기 안쪽으로 쳐넣어서 곱씹으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거다. 그러면 얼마나 입안에서 단내가 펄펄 나겠느냐. 퍽퍽 쳐박는다고해서 다 좋은 섹스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서로를 천천히 음미할때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얘기다.”
나는 음미한다는 말밖에 안 했는데 이 안에 이렇게 무궁무진한 속뜻이 숨어있을줄은 몰랐다. 말은 아주 청산유수다. 그냥 좋자고 섹스하는 것 뿐인데 뭔 이런 커다란 의미를 크게 부여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쪽을 보자. 오랄을 하고 있군.”
쪼옵쪼옵쪼옵
오랄을 하는 서큐버스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으로 열심히 인큐버스의 고추를 위아래로 젖치고 있었다. 귀두를 사탕 빨 듯 신나게 빨면서 기둥부분은 젖가슴의 부드러운 촉감으로 녹여내린다.
“이번에는 86번 네게 묻겠다. 여기에는 어떤 관점이 있지?”
“흐음...”
86번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아니, 그녀가 사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였으면... 그냥 고민하는 척만 했을 것 같다.
86번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봉사정신... 모든 걸 다 퍼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 모성애... 핫! 이것은 설마..! 근ㅊ...”
“닥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아니다. 그런 이상한 오해를 일으키는 발언은 삼가거라.”
그렇게 그 선생님은 다시는 86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확실한 돌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실전보다 좋은 공부는 없는 법이다. 이번 시간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실습을 하도록 해라. 시험성적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 우리가 차트에 입력하는 점수들도 그거에 기반한다. 이번에는 처음이니까 높은 점수를 주겠다. 아주 배우려는 자세가 제대로 박혀있는 녀석들이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 선생님은 다음 휴식시간이 되자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2교시 수업이 끝났을 뿐인데 교실 안은 온통 땀냄새와 밤꽃냄새로 가득찼다. 뭔가 시큼한 냄새까지 섞여서 야릇한 향이 되었다.
나는 86번과 함께 자리를 떠나서 구름다리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옆 별관으로 이어지는 다리였는데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후...”
86번은 고뇌에 가득찼다. 앞으로 어떻게 이 난관들을 극복해야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섹스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어요?”
“아니, 섹스를 싫어하는건 아니고...”
“그럼 대체 뭣 때문에...”
“음... 이걸 말해도 되는건가 모르겠어요...”
역시 뭔가 비밀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들어도 좋은 비밀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알아둬서 나쁠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타지 사람 취급 당하다보니 아군이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날 믿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힘들어질지 알잖아요?”
이 말에 86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자기도 알고 있는 거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나는 메피스토라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어요. 그리고 권능도 받았죠. 권능의 내용은 ‘악마와의 계약’... 나는 오로지 하나의 대상과 계약을 맺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섹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하나 뿐이라는 거예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