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85. 진실의 방으로
* * *
“회식인데 술이 빠질 수 없지!”
“짠!”
“짜안~”
신입교육 전 회식을 마지막으로 만 1주일만에 재결합이다.
세 여자는 전보다도 더 예뻐져 있었다. 센터에서는 트랙팬츠에 탑 같은 것만 입고 있으니까 우중충해서 몰랐는데 편안한 사복으로 입으니까 확 달라졌다.
특히 허벅지 절반 위까지 올라가는 핫팬츠는 예쁜 다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제시카를 제외한 두 글래머는 배가 훤히 드러나는 브라탑에 얇은 가디건만 걸쳐 볼륨감이 잔뜩 느껴졌다. 반면에 제시카는 귀여운 캐릭터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만 입었는데 안에 속옷을 착용하지 않았는지 꼭지가 도드라져 있었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다소 매치가 되지 않는 룩이지만, 제시카가 입어서인지 약간의 배덕감과 함께 꽤나 꼴릿한 연출을 해냈다.
과연 가슴이 도드라지는 옷과 꼭지가 도드라지는 옷 중 어느 것이 더 과도한 노출인가? 둘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둘다.
“자, 사진 찍어요~”
저렇게 프리하게 입어놓고 단체 셀카를 요청하는 제시카. 우리는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엎치락뒤치락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악! 나 눈 감았자너.”
“다시 찍어요. 다시.”
“기준쌤, 가운데로 와요.”
“읏! 누가 내 가슴을...”
“없던데?”
“뭐어가아?”
“푸핫! 아, 자꾸 누가 내 허벅지 만져. 기준쌤이죠?”
“아잇. 기준쌤 변태야! 남의 다리를 왜 만져.”
“안 만졌는데요?”
“그럼 누구야..? 여기 은근히 변태들이 많은거 같아~ 은변이야, 은변.”
“은변은 또 뭐야. 자, 치즈~”
“와 지우쌤 그렇게 안 봤는데.”
“뭐, 뭐가요..?”
“얼굴 왤케 작아요. 덕분에 내 얼굴 빵떡처럼 나오자너.”
“무, 무슨 소리... 제시카쌤이 더...”
“지아 팀장님 미모봐... 엄청 예뻐어. 뽀뽀해주고 싶자너.”
“히 해도 되는데.”
“에이, 남사시렵게. 자, 다시 찍어요. 이번에는 몰아주기 가즈아!”
“몰아주기?”
“외모 몰아주기요. 한 명 빼고 다 이상한 얼굴하는 거예요. 지아팀장님 이런거 모르면 아재소리 들어요. 우리 인싸자너 인싸! 자, 자... 이번엔 저를 밀어주십쇼. 굽신굽신.”
“어, 어떻게...”
“요렇게!”
“아... 아하하... 내 콧구멍...”
“자, 완성! 근데 기준쌤은 얼굴 가만히 있는데도 나한테 몰아줘버렸자너. 역시 본판이 깡패네.”
“... 너무하시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기준쌤 몰아주기 어때요?”
“오, 지우쌤 웬일? 아~ 기준쌤 편 들어주는 거구나? 피 자, 찍어요. 여성분들 얼굴 엉망진창 해줘요.”
찰칵 찰칵
그렇게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중간중간에 카메라 앵글이 안 보이는데서 일부러 여자들 가슴에 내 팔뚝을 올린다거나 엉덩이를 만지면서 음흉한 장난을 쳤으나 싫어하는 티를 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사진 찍는것에 집중해서 모르는 듯 보였으나 최지아의 경우에는 계속 깜짝깜짝 놀래며 감각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줬다.
작은 액정 속에 네 사람이 다 나오려면 서로의 몸이 엉켜야만 가능했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몸을 섞었기 때문에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게 이뤄졌다. 그러면서 묘하게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제시카는 이 상태 그대로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다가 얼굴이 벌개져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아흑... 오늘 왤케 빨리 취하징...”
“천천히 마셔요...”
“천천히 마실 수가 있냐고오. 오늘 너무 기부니가 좋단 말야.”
제시카는 그 뒤에는 내 뒤로 와서 백허그를 했다. 아니, 백허그라기에는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그 뒤에 나와 얼굴을 가까이 맞붙혀서 둘이서만 셀카를 찍어댔다.
“표정. 표정. 행복하고 황홀한 표정 지으란 말이야.”
“...”
나는 최대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제시카에게 최대한 맞춰줘야 했다. 앞에 있는 두 여자가 제시카를 향해 엄마미소를 짓고 있어서 실망시킬 수 없었다.
“움늄늄...”
얼마나 귀여운지 뒤에서 백허그를 해대는데도 전혀 볼륨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마 처음 봤을때보다는 물이 좀 차오른 느낌이긴 하지만... 앞에 있는 두 글래머가 있는 이상 이 정도 볼륨은 볼륨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나저나 뭐하나 싶어서 뒤돌아봤더니 내 등에 매달려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악... 귀여워.”
“제시카쌤은 그냥 태생이 겸댕이에요...”
“움늄늄... 나 안 자...”
스르륵. 인간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코알라가 내 등에서 내려와 꾸물렁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후유 마시자...”
“제시카쌤 무슨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말해요.”
“그러니깤. 술 못 먹고 죽은 귀신 붙었냐고요.”
“오늘은 진짜 취해야 하는 날인 거시에요.”
제시카는 눈을 반쯤 뜨고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을 쭉 훑어봤다.
“이 조합이면 무조건 많이 마셔야 하는 거시에요. 맨정신으로 있으면... 있으면... 후하 우리 팀장님 얼굴 어떻게 보냐고오. 월요일날 어떻게 출근하냐고. 차라리 난 마실테야. 마실테야!”
“아, 귀여워...”
최지아는 제시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마냥 귀여워했다. 원래 팀원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던 최지아가 제시카의 볼을 한꼬집 했으니 말 다했다. (아, 물론 내 털은 많이 건드렸다.)
홀짝 홀짝
“그만. 그만.”
제시카가 연거푸 소맥을 홀짝거리자 한지우가 자기 가슴쪽으로 제시카의 얼굴을 폭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힝...”
“왜 그래요.”
“몰랑... 놀고 싶어.”
“크큭. 그럼 놀면 되지. 왜 혼자 술을 많이 마시고 그래요.”
한지우도 제시카를 마냥 귀여워하며 쓰담쓰담거렸다.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면 하나의 가정 같기도 하다. 한지우는 부득이하게 아빠 역할을 맡고 최지아는 엄마, 제시카는 풋내기 딸. 그럼 나는..? 나는 사랑방 손님 정도라고 할까. 집은 우리집인데 내가 손님같은 이 기분. 그 정도로 여자들은 이곳을 편안하게 생각했다.
사실 최지아팀이 방문할 것을 미리 예측한 나는 전날 청소도 하고 방향제를 뿌려서 냄새도 좋게 만들어놨다. 여자들은 또 냄새에 민감하니까. 홀애비 아닌 홀애비 냄새를 풍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어쨌든 이렇게 다들 편안하게 즐기는걸 보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다 같이 술을 깨작깨작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제시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진실게임 합시다!”
언제나 이런 식이냐.
“진실게임? 진실게임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음. 뭐든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 게임인 거시에요. 대답하기 영 까다로우면 벌주를 마시는 거죠.”
“아, 질문은 돌아가면서?”
“아뇨! 질문 받은 사람이 지목한 사람이 다시 질문을 받는 식이죠.”
“오오. 재밌겠다.”
“고고.”
“잠깐만요. 나한테 너무 불리할거 같은 생각은 그저 느낌인가요?”
내가 묻자 제시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찌 그런 오만한 생각을 하시는 거죠!? 혹시 본인한테만 엄청 관심이 쏠려있다는 생각?”
“...”
이거 참. 관심이 쏠려있다고 생각한다 말하면 관심종자가 되는 거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 분명 나한테만 엄청 질문이 쏠릴게 뻔하다.
“자, 자. 수위는 무제한입니다. 그리고 기준쌤한테는 특별한 벌칙이 있어요.”
“... 뭔데요.”
“기준쌤은 질문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거시에요.”
“아니, 왜...”
“기준쌤은 우리 중에 가장 술을 잘 마시고 술을 많이 마셔도 피부 세포가 이만큼도 변하질 않을 정도로 세니까!”
“정말 어이없지만, 대답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자신있게 말했지만, 무한대로 소원을 들어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자, 그럼 나부터 질문을 하겠습니다.”
“왜요. 나부터 하면 안 돼요?”
“우이씨. 내가 이 게임 하자고 했으니까!”
나는 제시카의 저 화내는 모습이 너무 좋다.
“자, 그럼 나는 질문. 기준쌤한테 할게요.”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제시카는 베시시 웃었다.
“우리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없다!”
“오오오.”
“와 처음부터 세다.”
진짜다. 진짜 세다. 나한테는 함정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 사람과의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다 같이 좋게좋게 섹스를 해야하는데 이따위 질문이라니. 나는 약간 고민하는 척하다가 제시카가 말아둔 벌주를 마셨다.
“쭈욱쭈욱 들이키십시옹. 그리고 소원도 들어줘야 하는 거시에요.”
하.
나는 다 마시고 입술을 쓱 훔친 후에 제시카를 지그시 바라봤다. 어디 어떤 소원을 말하는지 보겠다.
내가 강렬한 눈빛으로 잠시동안 쳐다보고있자 제시카는 읏 하면서 움찔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줘요...”
“오케이. 이제부터 부드럽게 봐줄게요. 소원 끝.”
나는 그녀가 방심을 탄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미끼를 문 생선을 낚아채듯 순식간에 잡아끌었다.
“아! 진짜! 뭐야! 아니야! 잠깐만! 나! 소원!”
제시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뿌에엥거렸다. 자칫 밑에 층에서 올라올 수도 있을 정도로 쿠당탕거리며 억울해했고 그 모습을 보는 나머지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하. 자, 그럼 내가 질문합니다. 흠흠. 일단 우리 팀장님한테 질문을 해볼까요?”
“음? 저요? 저... 왜요...”
“제가 질문을 하고 싶으니까요? 자, 그럼 질문 들어갑니다잉? 팀장님은 만약 매니저가 되면 우리 팀을 떠난다, 안 떠난다. 대답해주세요.”
“읏! 그건 규칙상 당연히...”
“규칙은 우리끼리 새로 정하면 되는 거죠. 매니저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흐응... 그건 좀 곤란해요. 난 당연히 팀원들이랑 같이 하고 싶지. 근데 회사 규정이 그런걸 어떡해요. 다른 질문 없어요?”
“다른 질문은 없습니다. 무조건 둘 중에 하나 고르셔야 해요.”
“아악! 곤란해... 곤란해...”
“그럼 벌주를 드셔야 겠습니다. 그리고 소원도 하나 들어주세요.”
“아니야! 제시카가 만든 게임인데 기준쌤만 소원 들어줘야 하는 게임이야.”
“뭐, 안 들어주셔도 되는데 들어주시면 좋다 이런 얘기죠.”
“능구렁이같은 수작이야!”
“크크. 그건 팀장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거예요.”
최지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독한 벌주를 다 마셨다. 그리고 파 하고 숨을 내쉬더니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좋아요. 소원 들어줄게요. 뭔데요?”
“오오옹... 굳이 안 들어줘도 되는건데!”
“기준쌤한테만 너무 가혹한 게임인거 같아서요. 게임은 뭐니뭐니 해도 정정당당해야죠.”
“그쵸...”
“지우쌤! 동의하지 말라구... 제시카 편 들어달라고오...”
한지우는 우는 목소리를 하는 제시카를 또 다시 안아줬다. 그러는 와중에도 모두의 시선은 내게 쏠려있었다.
대체 무슨 소원을 얘기할지 궁금하다는 듯.
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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