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마학원 수석졸업생인 나와 그녀들-65화 (65/159)

〈 65화 〉 65. 최용수의 아내

* * *

청담점에 출근을 하자마자 용우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나를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제와는 다르게 헐렁한 옷 차림새였다. 점퍼에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자유로워 보이는 청바지를 입었다. 처음에 보고선 오늘은 수업이 없나 싶을 정도였다.

용우는 내가 어제 마지막에 봤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활짝 웃으며 날 반겼다.

“어서와. 어제 내가 말했던 제안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굽실거리는 걸 보면 확실히 내 재능에 청신호를 확인했나보다.

전생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돈 냄새 잘 맡는 녀석이다. 용우는 안전하면서도 커다랗고 검은 돈을 좋아한다. 말이 쉽지 가장 얼토당토 않은 모순인데도 녀석은 그걸 원했고 결국 지금에 와서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용우의 질문에는 딱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거절할 생각이니까.

내가 말이 없자 용우는 씩 웃으면서 품 속에서 뭔갈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작은 가방인데 안에 뭔가 두툼한 것이 꼭 현찰같기도 하고.

“선금 500이야.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돈 쪼달리지?”

“...”

나는 아무 말 없이 뒤적거리며 안을 봤다. 5만원 짜리 지폐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만두고 바로 다음 달에 1000만원 정도 더 입금 해줄게. 매출 2000하고 커미션으로만 50% 뽑아먹으면 솔직히 우리 남는거 없다? 알고 있지? 여기에 저번에 말했던 조건 그대로. 다른 청담점 선생님들보다 커미션, 수업료 두 배로 맞춰줄테니까.”

용우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 무슨 생각이 들까.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용우도 이정석과 마찬가지로 날 살해하는 현장에 있었다. 이정석처럼 직접적으로 내 몸에 칼을 쑤신건 아니지만, 어쨌든 목격자 중에 하나. 녀석도 나름대로 벌을 받아야 했는데 적절한 대가를 찾지는 못했다.

“팀장님.”

“어.”

“제가 이준원 선생님에게 말씀드린건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10배의 보수를 받지 않으면 청담점으로 이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10배? 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10배면 10프로에서 10배면 100인데 그럼 커미션을 몽땅 다 먹겠다는 소리야, 뭐야?”

“네. 맞습니다.”

“이런, 씨발. 지금 어디 앞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너 지금 무슨 생각이야?”

“저는 청담점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판매한만큼 돈을 온전히 받고 싶다는 건데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거죠?”

“하...”

용우는 다리를 꼬아 앉았다. 어제만큼이나 다시금 분노가 올라오는지 한쪽 눈의 색상이 옅어지고 있었다.

“커미션이라는 건 말이야. 우리가 장소도 제공해주고 너한테 PT 매출할 기회도 창출해주기 때문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개념이야. 그럴거면 우리가 왜 너를 고용해서 쓰겠냐?”

“그래서 강서점에서 정상적으로 일하겠다는 얘깁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

“장소를 제공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막말로 길바닥에 앉아서 매출해도 충분히 판매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기회를 제공받을 필요도 없죠.”

“푸핬! 그럼 나가서 혼자 일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여기 남아있냐?”

왜긴 왜야, 복수하려고지.

“사람은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듯이 저에게도 제게 신뢰를 주고 정으로 키워줬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 정체성은 강서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배신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배신? 이 바닥에 배신이라는 게 있을거 같아? 하, 잘 생각해봐. 강서점은 폐급 지점이야. 유성목이도 곧 있으면 전출 나갈 생각하고 있지. 그러면 거기 남은 팀장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누가 있냐? 근데 청담점? 청담점은 계속해서 발전할 거야. 사장님도 여길 본점으로 정해놓고 병원까지 차릴 생각하신다고.”

병원이라. 그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이런 들어보지 못한 정보를 입수한 것만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 지점에 박혀서 천천히 썩어 문드러지고 싶어? 자본주의에서는 배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어? 막말로 같은 상황이라면 네가 믿고 따르는 누구누구들이 널 버리지 않을거 같아?”

유성목은 모르겠어도 최지아, 한지우, 제시카. 이 세 사람은 신체 일부 중 하나를 잘라 간다 하더라도 날 버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배신.”

나는 나직하게 그 단어를 읊조렸다.

“배신의 대가는 더욱 커다란 복수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나도 모르게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용우도 언짢았는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녀석이 그때의 그 사건을 떠올리는건 아니겠지만.

나는 한결 편안해진 미소를 지으며 웃어 넘겼다.

“죽음은 죽음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뭐, 그런 말이 있지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많이 봐서요. 하하. 그래서 아무리 좋은 대가가 있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자는 주의여서요.”

용우는 마침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진짜 어이가 없구만. 너 생각 바뀌면 바로 말해라. 내가 사장님한테 조율해서 최대한 조건 맞춰줄테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아예는 무슨... 그리고 내 눈 관련해서는...”

“절대 비밀로.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실언이라고 해놨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들어가봐. 본부장님 교육 중이시니까.”

“본부장님이요?”

“보면 알아. 그니까 잽싸게 들어가. 너가 청담점 오면 모시게 될 분이야.”

본부장?

애당초 그런 직급이 존재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근데 본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신입 교육까지 할 필요가 있나.

나는 센터 중앙을 가로질러서 교육실로 향했다. 그런데 유리창 너머로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수진. 최용수의 아내. 못 본지 10년은 지난거 같은데 아직까지 미모가 여전하다. 앉아있는 자태를 보니 몸매도 꾸준히 관리한 모양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홍푸른을 비롯한 신입 선생님들이 벌 받는 듯 선 채로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학창시절 이후로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과도한 자세였다.

“괜찮은 신입이 전혀 없네.”

혀를 차는 이수진은 내 인사를 건성으로 받았다. 나는 조심스레 내 자리를 찾아 가서 섰다. 잠시 침묵이 지나간 뒤, 이수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어깨 한 번 주물러 보라고 했는데 마사지 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홍푸른을 바라봤다. 녀석은 용우 앞에서 아무 말 못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깨를 주무르라고 했는데 다 낙제점을 받은 거라고? 아니,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 어깨를 주무르는 것도 아니고 일개 사람 어깨 하나 주무르는데 뭔 낙제점을 줄까.

“방금 들어온 선생님. 이름이 뭐예요?”

“성기준이라고 합니다.”

“아~ 그쪽이 성기준이구나.”

이수진은 이제야 내게 좀 관심이 생겼는지 내 얼굴부터 발끝을 한 번 스캔했다. 처음 예상했던 거보다 의외라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날 향해 손짓했다. 자기 쪽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그것도 자기 뒤쪽으로.

“내가 교육하는 동안 어깨 한 번 주물러봐요.”

자기가 무슨 여왕님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 본부장이면 그 정도 급은 되겠구나. 더군다나 사장 와이프니까 여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왕비 정도는 되겠네. 역시 그 남편에 그 아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최지아같은 천사가 태어난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서 섰다. 확실히... 최지아의 피부나 얼굴 크기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타고 난거다. 이전 생에서는 몰랐는데 이번 생에 와서야 가까이 서보니 느낌이 확 다르다. 아름다운 여자에게서는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같은 게 꿀처럼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나 역시 그 아우라의 희생자다.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면서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마흔살이 조금 넘은 중년의 여성이다. 근데도 이렇게나 아랫도리가 꼴릿꼴릿하게 만들다니. 이 얼마나 공격적인 몸매란 말인가.

자칫 고개를 숙이게 되면 안쪽의 속살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의상이다. 허리라인은 그냥 앉아 있어도 보이는데 근육과 메마른 계곡으로 이뤄진 환상의 하모니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본부장님께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내가 말하자 신입생들의 떨궈졌던 고개가 즉각 올라갔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해서 깜짝 놀라게 해줄지 궁금하지, 아주?

“뭔데요?”

“제가 마사지를 워낙 잘해서요. 이거 어디 가서 그냥 해드리는거 아니거든요.”

“푸핫! 뭐야. 재밌네요? 그래서 뭐, 나더러 지금 돈 달라는 거예요?”

“아니요. 돈 몇 푼 받아서 뭐 어쩌겠습니까? 오히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마사지하는 제가 돈을 내어드려도 모자라죠. 근데 마사지는 많이 받아보셨죠?”

“당연하죠.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마사지사들은 다 겪어봤는걸요.”

“그 마사지사들이 어떻게 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조금 다르거든요. 괜찮으시면 자리를 옮기시는게 어떨까요? 신입 선생님들 앞에서 너무 시원한 나머지 신음을 뱉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뭐, 뭐, 뭐라고요? 하하... 하하하... 아, 진짜 웃기네.”

다른 선생님들도 내 말이 농담인줄 알고 웃었다. 그런데 이수진은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펴보더니 내 말이 진담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정색했다.

“뭐야... 진심이에요, 지금?”

“저는 아무 말이라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거예요? 나더러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네,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나 본부장님이 창피하실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이가 없네. 장난 아니라고 하니까 나도 진담 한 마디 해줄게요. 입 다물고 주무르기나 해요. 내 입에서 신음이 나오면 그때는 내가 선생님이 해달라는거 뭐든 해줄게요.”

나는 씨익 한 번 웃어줬다.

“정말, 모든 걸 다 해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 짜증나게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알았으니까 그 잘난 손맛 한 번 보자고요.”

원하시는 대로.

나는 자그마치 현금 2천만원에 해당하는 코인을 태웠다.

특정 아이템을 사용하자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내 손끼리 맞닿는 순간, 몸에서 힘이 살짝 빠지면서 오금쪽이 느슨해져 자칫 무릎을 굽힐 뻔했지만, 아주 살짝 스쳤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자, 그럼 교육을 시작한다. 다들 자리에 앉아.”

신입생들은 이수진의 말에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았고, 이어지는 교육을 경청했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내 손 끝에 와서 닿았다. 내가 뭘 다르게 하길래 이렇듯 자신있어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들에게 해줄 말은 딱히 없다.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뿐.

“필라테스의 정의는...”

이수진이 입술을 떼자마자 나는 불쑥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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