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4. 처녀성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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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 원활히 성사된 것 같아서 굉장히 기쁩니다.”
김도경은 계약 얘기를 하면서 연신 웃고 있었다. 그는 계약 후에 모의 촬영이라던지 장소 제공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기본 수칙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아이돌들을 돌보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내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된 것처럼 입단속도 잘 해야 하고 회원들 단속도 잘 시켜야 했다.
그나마 유스걸이 신인 걸그룹이라 다행이지 만약 엄청 잘 나가는 그룹이었다면 이렇게도 못한다. 그래도 SNS에 BD짐 홍보영상과 사진을 올릴 수 있었고 주니, 리카와 함께 찍은 사진도 올릴 수 있게 됐으니 어느정도 파급력이 있을 거다.
‘그래.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예상치 않은 고달픔이 밀려올게 뻔하지만, 앞으로 있을 청신호를 위해 참아야 했다.
‘시발, 생각해보면 전생에 얼마나 악독한 일들을 겪고 살았는데 이 정도는 나한테 일도 아니지.’
“이 모든 계약 사항을 준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까?”
“네.”
그러자 김도경은 손을 뻗어서 악수를 청했다.
“저희와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 소속사 측에서도 담당 트레이너가 없어서 골치 아픈 상황이었는데 한시름 덜게 되었습니다.”
매출은 한 달에만 무려 1000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책정됐다. 단속이 심하지만, 촬영과 함께 PT 중, 간단한 인터뷰 그리고 주니, 리카의 멘탈 케어가 주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을 마치자 주니와 리카가 쪼르르 달려와서 아까처럼 양옆에 매달렸다.
“선생니임~ 이제 진짜 우리 선생님이네요.”
“그럼 가족이네. 가족이야.”
“가족?”
“응! 가족.”
가족이랑은 야한 거 못하게 되있으니까 가족은 좀 곤란하고.
“가족 아니고 선생님이니까 내 지시에 잘 따라야 해.”
“힝. 진짜 선생님 됐다고 무서워졌자너.”
“쌤 근데 진지하게 말할 때 귀엽고 섹시한거 알아요?”
이 두 마리의 요물들을 어떻게 할꼬. 한지우랑 제시카 때처럼 한 방에 넣어두고 해 뜰 때까지 범하고 싶다. 아니면 섹스 룰렛이라도 돌리던지.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붙잡아둘 수 없어서요. 다들 개인 사생활도 있어서.”
“아, 지금은 활동 시간이 아닌가요?”
“네... 정규집 발매하고 홍보가 다 끝난 상태라 집에 돌아갈 애들은 돌아가고 숙소에 남고 싶은 애들은 남습니다. 낮에는 스케줄대로 움직이기는 해도 밤에는 저희가 마음대로 할 그건 아니어서...”
“저는 아이돌들의 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니 물어본 겁니다. 평소 식단이나 취침 시간, 활동 범위, 시간같은 걸 알아야 하는데 일거수일투족을 알기 위해서라도 매니저님과 간헐적으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매니저님도 그 부분에 신경을 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김도경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절차입니다. 확실히 전문가셔서 철저하시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쌤! 오늘 일하는 날이예요? 아니면 같이 가요.”
리카가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주차장 쪽을 가리킨다. 꼭 자기가 운전할 것처럼 말하다가 매니저와 눈이 딱 마주쳐서 무안하게 웃었다. 나 역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최지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말 없이 해맑게 웃었고 나도 그에 화답하듯 웃었다.
“저... 오늘은 센터에서 할 일이 있어서. 너네들도 오늘 수고했고 다음 수업 시간에 보자.”
“치, 아쉽다. 예쁜 지아쌤~ 오늘 반가웠어요. 저희 가볼게요.”
“네. 들어가 쉬세요~”
주니는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내쪽을 향해 통화 수신 제스쳐를 취했다. 전화하라는 뜻. 오늘 당장이라도 내가 부르면 나와서 아까 못했던 걸 이어서 하자는 뜻으로 보였다.
‘어? 근데 주니 손에 원래 반지가 있었나?’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반지가 걸려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반지...
‘아..!’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까 마사지할 때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손에 반지가 껴 있었는데 하반신 쪽에만 집중하다보니 반지가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반짝임, 하얀 빛깔의 색상. 저건 구르미 묻은 달이 최지아의 손가락에 끼웠던 혼전순결 반지다.
어쩐지. 오늘 최지아랑 섹스를 하려고 했는데 주니 쪽에서 과도하게 섹스 어필을 하더라니.
그나저나 이따 전화를 하라는 저 제스쳐도 구르미 묻은 달이 의도한 바였다면 오늘이 확실한 결전의 날이다. 천신은 나를 방해하려고 온갖 짓을 다 저지를 것이다.
근데 이거 어쩌지. 이미 들키셨는데.
나는 최지아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90도로 숙여서 인사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약속도 있으셨을텐데 따로 시간 내주셔서 덕분에 무사히 계약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그럼... 이제...”
“아, 가시죠.”
최지아와 함께 퇴근을 하는데 뒤쪽에서 김준의 타오르는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다. 저 놈도 참 문제있는 놈이네. 계약하는 동안 사무실 앞에서 서성이는 리카에게 껄떡거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뭐, 그렇다고 김준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매니저 유성목의 눈에도 안 들어온 사람일 뿐만 아니라 최용수와도 딱히 인연이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주요인물이었으면 이정석과 같은 센터에서 일하게 냅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최지아와 함께 바깥을 좀 걷다가 수제맥주집이 보여서 그곳에 들어갔다.
2층 테라스 자리가 있는 예쁜 가게였다. 은은한 조명과 달달한 꿀향이 나는 수제맥주를 마시면서 함께 바깥을 내려다봤다. 팀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단둘이 있으니까 분위기가 묘했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 나와있는 것처럼 둘 다 묵언수행을 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나 역시 리드를 할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이 적막을 즐기고 싶었다.
밤공기에서 기분좋은 향이 났다. 보나마나 최지아의 몸에서 나오는 향이다. 이런 향은 어디가서 맡아볼 수 있는 향도 아니니까. 말로만 듣던 살내음.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그녀는 무슨 생각중인지 연신 바깥만 바라봤다. 스산할 수 있는 날씨임에도 춥다는 말 한 번 없이 딱 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침묵을 깼다.
“기준 씨...”
원래 쌤을 붙여서 부르던 그녀가 저렇듯 진중하게 묻자 왠지 모르게 가슴 주변이 짜르르 울렸다.
“네.”
“오늘 나랑 같이 있어줄래요?”
“예?”
솔직히 말해서 놀라지 않았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일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지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도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그래요. 너무 과한 부탁이라면 안 들어주셔도 되요.”
“아, 아뇨! 같이 있어 드리려면 그럴 수 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하...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최지아는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랐지만, 그렇다고 손을 뒤로 잡아당기지는 않았다.
“그냥 무서운거죠?”
“... 네.”
최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같이 있어주면 되는 거예요?”
다시 또 끄덕
“알겠어요. 그럼 이거 마시고 지아 씨 집으로 갈까요?”
“정말 그래줄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우리 팀장님. 내가 챙겨야지. 아니면 누가 챙겨요. 오늘 도움 받은걸 다 떠나서라도 제가 챙겨드려야죠.”
“... 고마워요.”
그러고선 홀짝거리며 서로 자기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정석인가? 아니면 구르미 묻은 달의 농간인가. 그녀가 무서워할 일이 대체 뭘까?
그 대상이 뭐가 됐건 금남의 구역에 내가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구르미 묻은 달은 아닐텐데.
“기준 씨.”
혼자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가 다시금 물어오는 질문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네?”
그리고 돌아오는 대꾸에 나는 그만 벙쪄 버리고 말았다.
“저, 저랑 오늘 섹스해주세요!”
“에엥?”
막장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소리에 여태 마신 맥주를 다 게워낼 뻔했다.
‘뭐, 뭐라고? 내가 지금 헛소리를 들은 건가?’
섹스. 지금 나한테 섹스를 해달라고 말한 건가. 그 최지아가? 그 순수했던 최지아가. 술게임도 제대로 몰랐던 그 최지아가?
나는 그녀가 귀신에 씌인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시선 앞 쪽을 손으로 저어봤다.
최지아는 그 말을 해놓고서 아까부터 계속 질끈 주먹을 쥐고선 풀지 않고 있다. 저 말을 꺼내기 위해 엄청난 결심을 한 모양이다.
이 어색한 적막을 깬 건 다름아닌 최지아였다. 두 번째 엄청난 결심을 한 듯 또 다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 외할머니가 제가 어렸을 적에 귀신이 들렸던 적이 있다고 했어요.”
“아..?”
그래서 지금 자기도 귀신이 들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때 외할머니가 그런 얘기를 하셨대요. 지아는 한 남자랑 잠자리를 갖게 되면 다시는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라고.”
푸핫! 웃기지도 않았다. 외할머니가 했던 망언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 거라니. 그러나 생각보다 더 심각한 듯 최지아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 근래에 꿈 속에 외할머니가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어요. 조만간 누군가와 동침을 하게 될 거고 처녀를 내어주게 될 거라고. 그러니 자기가 어렸을 때 했던 말을 반드시 유념하라고요.”
“그, 근데 왜 저랑...”
사실 가장 궁금한 건 이거였다. 다 알겠다고. 무당인지 귀신인지 아무튼 외할머니의 예언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거잖아. 근데 그 대상이 왜 하필 나여야만 하는 거냐고. 물론 나야 땡큐지. 일이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는 거니까.
“기준 씨라면 괜찮을거 같아요. 저... 제시카쌤이랑 지우쌤이랑 어떤 관계인지도 알고 있어요. 그, 그때마다 생각했어요. 나, 나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꿀꺽
이 얼마나 파격적인 소리인가.
팀의 팀장이 팀원들끼리 몸을 섞는걸 알면서도 일갈하지 않고 자기도 그 관계에 동참하고 싶다니.
오늘 참 희한한 날이다. 주리도 그렇고 최지아도 그렇고 왜 하나같이 나랑 섹스하려고 안달이 난 건지. 천신들이 내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건 말이 안 된다. 악신들이야 인간들 꿈속에 오며가며 별 지랄을 다 하는 존재들이라고 해도...
‘아, 설마...’
나는 속으로 벨라를 소환했다.
벨라. 나 설마 ‘악신의 은총을 받는’ 뭐, 그런 계약이 걸려 있는거 아니지?
...
분명 저 너머에 벨라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떨리는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으니까.
대답하지 않아도 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대답하는 순간, 악신의 은총은 사라질 터.
‘어쩐지.’
지금 천신들이 유입하기 시작하니까 악신들이 합심해서 날 밀어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거 원 어부지리도 이런 어부지리가 없다.
결국 등 따숩고 배 부른건 나잖아.
그렇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지금 갈까요?”
“... 네.”
마침내 처녀성 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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