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52. 유스걸 주니 & 리카 (4)
* * *
최지아는 황급하게 택시를 붙잡아 타고서 BD짐의 주소를 찍었다. 그리곤 폰을 들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나 지금 빨리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오늘 못 볼거 같아.”
뭐? 야, 지금 장난하냐?
“... 화내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봐.”
얘기를 듣긴 뭘 들어. 시발.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나한테 이러는 거야? 너네 아버지가 지금 나 죽이려고 한다고. 지아야... 너야말로 내 말 잘 들어. 너 오늘 안 오면 나 죽어. 이거 진짜야.
“그러니까...”
아니, 씨발!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냥 튀어 오면 되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그럼 죽어! 이 개새끼야!”
... 뭐, 뭐?
택시기사도 깜짝 놀라서 뒷좌석에 앉은 최지아를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님.”
너... 너 지금 말 다했냐?
“어. 말 다 했다. 내가 얘기한다고 했지. 근데 오빠는 내 얘기 하나도 안 듣잖아. 나한테 뭔가 강요하려고 하지마. 이제 오빠랑 나,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그리고 애초에 나 만나자고 했을 때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로 약속하고 만나기로 해놓고선 지금 이러는거 진짜 꼴 사나워. 나 오빠 좋자고 만나는거 아니었어. 한 번 기회를 주려고 했던 거였다고. 근데 지금 그 기회를 이런 식으로 차버리는거 오빠 짓이야. 알았으면 당장 끊어.”
지, 지아야... 자, 잠깐만...
뚜
최지아는 폰을 옆좌석에 던지고 창밖을 바라봤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이정석에게 생겼던 정. 하지만 앞으로 있을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다. 현기증이 나면서 토가 쏠리기 시작했다. 분노라는 감정보다는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감이 더 컸다.
그런데 이 순간, 왜 기준이 생각나는 걸까. 기준과 단둘이 있었던 옥상이며 술집에서 따스하게 바라봐주던 눈빛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온 그에게 의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인건 맞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고 의지를 하면 안 될 이유 따위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사님...”
“네?”
“얼마나 걸려요?”
이번에는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차에서 내린 최지아는 재빨리 BD짐의 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
스쿼트랙에서 바벨을 들쳐 업은 후에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은 자기 힘에 부치는 일을 할 때, 긴장하는 법이다. 근데 이정석을 상대로 근육 코인을 써서 중량을 쳤을 때와는 다르게 말도 안 되게 무겁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끙!”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면서 기우뚱하자 주니와 리카가 걱정스러운 소리를 했다.
“쌤~ 너무 무리하는거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무거우면 내려놓으셔도 되요.”
무슨 소리. 여기서 내려놓으면 그것만큼 개쪽도 없다. 웃통도 다 벗었고 촬영하는 카메라들도 있다. 무엇보다 센터에서 이 모습을 구경하는 수많은 회원들과 센터 내의 트레이너들의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벨라가 실수했을 리는 없다. 코인이 그렇게 많은데 설마 근육만 번드르르하게 해놓고 힘을 안 올려놨으려고. 평소에 안 치는 무게라서 당황한 거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구부리며 앉았다.
“흡!”
숨을 폐 안으로 강제로 집어넣으면서 가슴은 팽창. 그리고 괄약근과 허벅지 뒤쪽으로 받쳐 버티듯이 꽉 힘을 줬다. 코어에는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무게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기립근과 복횡근에 힘이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무릎의 가동성을 이용해 쭉 밀어 올리기만 하면 된다.
이론은 확실했다.
이걸 받쳐줄 수 있는 근육과 힘만 있으면 이 정도 무게쯤이야.
근데 문제가 생겼다. 3/4 정도 내려간 순간부터 이 무게를 다시 들어올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번쩍 뇌리를 때렸던 거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런 벨라. 이런 씨벨라!’
이대로 뒤로 자빠지면 목숨은 구할 수 있다. 무릎도 다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무슨 공개적인 망신인가. 아, 씨부럴 괜히 멋부리다가 좆되게 생겼네.
그런데 바로 그때, 뒤쪽에서 따사로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 냄새...
최지아다.
“버티고 좀만 더 내려가요.”
물컹.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고 스쿼트 보조를 실시했다.
지원군이 왔다. 무거웠던 바벨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기서 최지아가 멘트를 하나 더 붙여줬다.
“두 분이서 운동하실 때, 협동운동은 필수에요. 스쿼트 보조는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불편할 정도로 확 밀착해서.”
“아~”
“그래서 그거 알려주려고 하신 거구나.”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기에 최지아의 가슴 감촉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근데 지금은 그딴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이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했다.
“하나, 둘! 업!”
그녀와 박자를 맞춰서 힘껏 햄스트링에 힘을 주며 밀어 올렸다.
“훅! 훅!”
엄청 무겁긴 하다. 그래도 최지아가 받쳐주고 있어서 간신히 들어올릴 수 있었다.
“다시. 둘!”
이건 뭐, 태릉 선수촌도 아니고. 빡센 발성과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히고 엉덩이를 뒤로 쭈욱 뺐다. 최지아랑은 완전 몸이 합체된 것처럼 결합되서 함께 내려간다. 분명 야릇한 자세인데 무거운 무게 때문에 땀이 뻘뻘 나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는 주니와 리카만이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을 구경하며 눈빛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우왕... 뭔가 엄청 프로패셔널한 그런 느낌이에요.”
“맞아... 난 시키면 좀 민망해서 못할거 같아.”
“응... 엄청 붙어 있어어...”
최지아는 이런 시덥잖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식으로 더 크게 소리질렀다.
“셋! 마지막!”
“흡!”
다시 숨을 크게 마시고 마지막 세 번째를 마치고 스쿼트랙에 바벨을 걸쳤다.
스쿼트는 하체 운동이지만, 엄연히 전신 운동에 가까운 운동이라 벗어놓은 상체 혈관들이 부풀어오르고 근육의 범핑이 생겨서 아까보다도 더 각지고 단단한 몸이 완성됐다.
“우와아아... 쌤, 만져봐도 돼요?”
“아까도 맘껏 만졌으면서?”
“히히...”
콕콕. 주니는 범핑된 근육을 콕콕 찌르더니 몸을 짜르르 떨었다. 심지어 가녀린 다리를 엑스자로 만들고 비비 꼬기까지.
“세, 세크시...”
하긴 주니나 리카같은 애들한테 금욕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금쯤 저 나이 때의 여자애들 성욕이 활발할 때다. 성에 눈을 차차 뜨기 시작하면서 한번 그 맛을 들여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나는 이미 내 몸을 바라보는 주니의 눈길이 욕정으로 젖어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건 리카도 마찬가지.
하, 운동하고 혈액이 쫙 몸을 훑고 지나가니까 나 역시 성욕이 확 올라온다. 눈 앞에 예쁜 여자 셋이 버젓이 서 있으니까 더 달아오르기도 했다. 이러다 섹스머신이 되는건 아닌가 모르겠네.
“지금까지 어시스트 운동에 대해서 배워봤습니다.”
최지아가 MC 마냥 매끄러운 진행을 하자 주니와 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벙 쪄 있었다. 둘 다 하나같이 이 여자는 누구지? 하는 표정이다.
“아, 이분은 우리 팀 팀장님인 최지아 팀장님이라고 해. 인사해.”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근데... 저번에 무대에서 뵀던...”
“어, 맞아.”
“아아! 그 예쁘신 분! 와... 트레이닝복 입으니까 또 완전 달라보여요.”
“감사합니다. 아이돌 분들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혹시 피부관리 어떻게 해요? 운동하면 다 이렇게 되나?”
“아 이거는...”
세 여자가 모여서 칭찬 릴레이, 칭찬 티키타카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리액션 해주자 주니가 제일 먼저 그걸 발견하곤 빵 터져서 내 몸을 툭툭 쳤다.
“아, 쌤 표정 너무 웃겨요.”
그러면서 슬쩍슬쩍 근육질 몸을 더듬는다. 흠,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때서야 최지아와 리카도 내게 관심을 보여줬다.
“지난번보다 이번에 몸이 더 좋아졌네요. 맨날 우리 몰래 운동하나 보다.”
최지아는 내 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트레이너라면 이 정도 자기관리는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팀장님.”
“훗. 제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요.”
오늘 최지아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약 그녀가 없었으면 허리나 무릎 중에 하나 정도 부러지고 바로 응급실 행이었을 거다. 그게 아니었다면 바벨 떨어트리고 그냥 쪽팔렸거나. 동영상이라도 유포되는 날에는 BD짐에 발이라도 붙일 수 있었을지 몰랐을 거다.
그나저나 벨라 이년, 조만간 후장에다 고추 박아놓고 훈육 좀 시켜줘야겠네.
나는 상의를 다시 입고 주니와 리카에게도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지아와 따로 면담을 하기 위해 상담실로 들어갔다.
어쨌든 그녀는 오늘 약속을 파토내고 내게로 달려온 거다. 이정석을 만날 예정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구르미 묻은 달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그걸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단서도 있었으니.
“어, 팀장님? 손에 끼고 있던 반지 빼셨네요?”
“아... 그거요? 오늘 아침에 샤워하다가 빼놓고 다시 안 꼈네요. 뭐, 사실 그렇게 중요한것도 아니기도 해서.”
구르미 묻은 달.
이걸로 승부는 갈렸다. 그녀는 이제 최지아의 인생에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
“오늘 약속은요?”
“취소했어요... 무슨 일 있는거 같아서 왔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온 것 같기도 하고?”
“흫. 감사해요. 팀장님 없었으면 큰일 날 뻔.”
“저도 도움 받은게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나는 문득 옥상에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스걸 무대에서 창피 당할 뻔한 걸 구해줬던 때도 떠올렸고. 내가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미친 영향이 있으니 그녀의 반응도 어찌보면 당연한 거였다.
“이 두 여자 아이돌들을 계약시키려면 팀장님의 도움이 필요할 듯 해요. 우선 유스걸 매니저가 저희쪽과 계약을 체결하고 싶어하는데 촬영 동의라던지 그에 따른 동영상의 저작권이나 홍보에 따른 여러 가지 내용들을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을거 같네요.”
역시 당황하지 않고 바로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내는 최지아다. 나이는 어려도 이 바닥 잔뼈가 굵다보니 문제해결 능력이 좋다. 괜히 아무나 팀장하는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가격은 천만원 정도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랑 얘기는 해봤어요?”
“사실 얘기는 저 사람이랑 해야죠. 매니저. 주니랑 리카는 무조건 할 생각일 겁니다. 거기에는 제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믿는 구석도 있어서요.”
“오늘 상의 벗은 것도 이유있는 행동이었겠죠?”
최지아가 웃으면서 얘기했고 그 말에는 따로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 바닥이 그렇다. 남자나 여자나 자기 매력을 발산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트레이너라는 직업 특성상 남자다운, 여자다운 모습을 보이는건 딱히 질타당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여튼 똑똑해요, 기준 씨는. 매니저님이랑 얘기하게 자리 좀 비워줄래요?”
“그럼 저는 그 동안 주니라는 애를 좀 구슬리고 오겠습니다.”
마침 주니가 리카보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상담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기에 말했다.
나는 최지아와 눈길이 마주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오세요.”
나는 밖으로 나가서 주니의 허리에 살짝 손을 올리면서 1:1 PT룸으로 안내했다.
“주니야, 너는 아까 보니까 몸이 살짝 틀어졌더라. 너도 알고 있지?”
“엇! 응! 응! 나 좀 그래요. 그것도 고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