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49. 유스걸 주니 & 리카
* * *
내가 나갈 때가 됐는데도 두 여자는 자기 집 마냥 내 자취방에 남았다.
“냉장고에 반찬이 너무 없던데요? 밥도 해놓고 반찬도 해놓을게요.”
“나는 빨래! 침대 시트 다 젖어써... 내 과실도 있으니까 내가 빨래 다 해놓을게.”
이게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나로써는 우렁각시 두 명이 생긴 느낌이라 나쁠건 없었다. 근데 영원히 우리집에 머물면 그건 또 그거대로 곤란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저녁에 자리를 비워달라는 약속을 받고 거리로 나섰다.
평온하고 한적한 오후. 유스걸의 소속사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섹스트림이나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에 채팅창을 다시 활성화하고 벨라에게도 교신을 보내놨다.
역시나 난리가 나 있었다. 밀린 후원금 내역들이 잔뜩 있어서 순식간에 코인으로 떼돈을 벌었다.
너어어.... 너어어어...!
왜왜왜.
벨라의 반응을 보니 간밤에 많이 힘들었나보다.
얘기를 들어보니 온갖 댓글들에 대신 답을 해줬고 갑작스런 상장 제안이 들어와서 채널을 상장하느라 밤을 꼬박 다 샜다고 했다. 아니, 고생한건 나도 장난 아니게 고생했는데... 섹스하느라. 섹서가 섹스하는게 일이지 그럼.
그래도 채널 상장은 성공했어. 이제 구독자 제한 수도 풀릴거고, 동시간 접속자 수 제한도 풀려. 무엇보다 천신들이 대거 들어오겠지. 돈 많은 천신들이 미친 듯이 몰려온다..!
좋은 소식이었다. 법적으로 악신들은 대외적인 가호를 걸어줄 수 없다. 그러니까 대놓고 가호를 걸어주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천신은 다르다. 원래부터 종자가 가호 걸어주는 종자들인지라 최지아에게 구르미 묻은 달이 가호를 걸어준 것과 같이 가호를 걸어줄 수 있는 거다.
든든한 후원자를 하나 찾는 것도 나름의 숙제가 될 터이다.
나는 우선 최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팀장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아, 예... 머리가 아직까지도 좀 띵하네요. 다른 쌤들은요?
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다 잘 들어갔죠.”
우리 집에서 셋이 눈 떴어요.
다행이다... 아, 맞다. 쌤 오늘 유스걸 만나러 가신다고 했죠?
“네. 지금 가는 중입니다.”
꼭 등록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연예계 진출은 내 복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번 유스걸 건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기회를 내가 놓칠 리가 있을까.
“꼭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주니까 믿음이 확 가네요.
나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팀장님은 오늘 뭐하세요?”
아... 오늘요... 아, 아무것도 안 해요.
뭔가 있다. 평소에 이렇게 말을 더듬지 않는 그녀가 주저하며 얼버무린다는 건 뭔가 있다는 얘기다.
순간 등골이 살짝 오싹해졌다. 왜 그녀의 말끝에서 구르미 묻은 달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지? 뒤쪽에서 그 천신년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입이 쩍쩍 달라붙었다.
왜, 왜요?
“혹시 오늘 시간 되시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저 유스걸이랑 만나고 난 뒤에.”
아... 죄송한데 오늘은 좀 힘들거 같아요.
뭐?
벙쪄서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다.
천신 구르미 묻은 달이 애초부터 점지 해줬던 남자는 누구였던 걸까. 정황상 아무리 생각해도 이정석 밖에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는 시나리오는 어떻게 해서든 그려볼 수 있다. 100일 조금 넘는 시간이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 이정석은 지금 낭떠러지까지 떠밀린 상황이고 최지아는 특유의 성격 때문에 그런 그를 단칼에 내치지 못하는 거다.
위험하다. 최지아가 이정석에게 마음을 열지는 않을 테지만, 문제는 이정석의 정신 상태. 그 미친놈이 최지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대고 오늘 이정석을 만나러 가냐고 묻는다면 거부반응이 튀어나올거다. 인생에 너무 깊은 참견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이 정도만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작전을 다시 짜야겠다. 최지아가 나를 보기 위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트릭을 깔아야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환승역에서 갈아탔다.
어, 잠깐만.
환승역?
머리에 빛줄기가 스치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
아이돌 기획사는 처음이었다. TV로도 본적이 없고 관심도 가져본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진짜 팬이된 것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인포데스크에 내 이름을 말하니까 출입증을 건네주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돌들이 생활하는 만큼 보안이 철저한 모양이다.
그 외에는 일반 회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규모가 큰 회사들은 복지가 잘 되어있어서 개인 휴게실이나 GYM도 있었으니까.
나를 안내해주기 위해 찾아온 건 유스걸의 리더 리카였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와, 저 진짜 TV로만 봤었는데. 여기 오니까 꿈 꾸는거 같아요.”
“히히. 가끔 팬들을 초대하는데 그분들도 다 똑같이 말씀하세요. 어려울 것 없으니 편하게 계세요. 멤버들 곧 나올 거예요. 아직 점심 안 드셨죠?”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런치섹스를 즐기고 나서 한지우가 해주는 맛난 밥에 반찬을 먹고 나왔지만,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직이죠. 근데 아이돌들은 원래 규칙적으로 식사하지 않나요?”
“오, 저희 엄청 규칙적이죠. 근데 좀 달라요.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식사하고, 10시에 또 쬐끔. 그리고 2시에 또 쬐끔 먹는데 오늘은 한 시간 늦춘 거예요. 다들 배고파 죽으려고 해요.”
“아이고. 저 때문에 괜히.”
“아니에요~ 저희 입장에서는 팬분들 한분 한분이 다 소중해요! 약속도 우리가 잡은 거니까요.”
리카는 훌륭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몇날 몇일을 몸매 관리에 시간을 쏟고, 하루종일 안무 연습만 하는데 군살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만큼 얼굴이 초췌해 보이기도 했다. 아직 풀메이크업을 받기 전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더 말라 보이고 어딘지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몸매는 아이돌답게 탑급. 그러나 얼굴만 따지면 최지아나 제시카가 더 예뻤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걸까.
사람을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기다란 식탁. 나는 상석에 앉았다.
“휴~ 근데 게스트 한 명은 진짜 이례적이기는 하네요. 신곡 발표하고 그동안 바빠서 초대석을 안 했거든요. 아, 맞다! 그리고 오늘 찾아오신거 저희 개인 채널에 올라갈 예정이에요. 괜찮으세요?”
“아, 뭐.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 오히려 내 이름 석 자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실제로 그날 영상을 보고 BD짐의 성기준 선생님을 찾는다는 고객들도 있었으니까.
이어서 유스걸의 멤버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다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하고 예쁘다. 기본 메이크업만 했을 뿐인데 외모가 아주 열일을 한다. 그중에 일본인 출신의 주니라는 아이돌은 내가 봤던 여자 중에서 가장 얼굴이 예뻤다. 꼭 무슨 인공으로 빚어서 만든 것처럼 결함없는 얼굴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해외에서도 얼굴 예쁜걸로 유명하다고.
나는 몸매가 좋은 리카와 주니, 이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레이더망에 정확히 걸려든 것이다.
아이돌들이 식탁에 다 앉자 뷔페가 개장됐다. 한쪽에서는 다른 신인 그룹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했고 매니저나 관련 직원들도 오순도순 식사를 했다. 우리 쪽에는 카메라맨이 하나 붙었는데 딱히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아이돌들은 이런 음식을 먹는구나.
휘황찬란한 반찬들이 나왔는데 하나같이 건강을 생각한 반찬들이라는게 느껴졌다. 일반 음식점에서 시키는 음식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리카는 이와중에도 소식을 하는지 반찬 몇 개와 밥도 반주먹만큼 퍼서 식탁에 앉았다.
“자, 자. 오늘~ 특별한 손님 모시고 즐거운 먹방 & 토크 시간 한번 가져보겠습니다. 자기소개는 저번에 들었고. 강서구에 사시는 성기준 씨. 그리고 일 하시는 건...”
“아, 헬스 트레이너입니다.”
내가 헬스 트레이너라고 말하자 주변에서 오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안 그래도 트쌤 새로 고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있던 트쌤보다 훨씬 잘 생겼다~”
“야~ 그게 무슨 실례야.”
“아이고 죄송...”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그만 두셨나요?”
“네. 센터 새로 차린다고 홀랑 도망갔어요~”
“기준 씨가 우리 갈켜주면 좋겠다. 우리 함 갈켜줘요~ 우리 잘 해요~”
이렇게 순조롭다고? 꼭 무슨 악신의 가호라도 받는 것처럼. 역시 행운은 내 편인가.
“저야 좋죠. 안 그래도 한번 제안을 드리고 싶은 생각이었는데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리카가 정리를 해줬다.
“자, 자. 일단 그건 우리 매니저님이 알아서 정해주실 문제고. 일단 식사하면서 간단한 질문 몇가지 할게요. 가장 좋아하는 멤버가 누구라고 했었죠?”
“아잇! 리카 언니 진짜 너무해. 저번에 다 들었던 거잖아요.”
“언니 골랐는데 괜히 또 들을라고.”
“히히. 맞아. 왜. 또 들으면 안 돼?”
“다른거 다른거. 질문 다른거 해.”
“음, 뭐가 좋을까?”
“그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안 정해놓은 거냐고~”
“진짜 리카 언니 완전 웃겨.”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유스걸의 멤버들은 리카에게 큰 고민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만큼 대외적으로 관리를 잘 한 거겠지. 하지만 내 예리한 눈은 피해갈 수 없었다.
“저는 제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유스걸 멤버들 얘기를 듣고 싶어요.”
내 말에 유스걸 멤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지그시 바라봤다. 흐뭇해 하는 표정도 있었고 당연하다는 표정도 있었다. 리카가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짜 그렇겠네요. 그러면 우리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나씩 받을까? 어때?”
“좋아! 좋아!”
첫 질문의 대상자는 일본인, 주니였다. 그녀는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쯤이야.
나는 전생에서 일본인들과 교류를 했었다. 10년 정도 현장에서 통역사 하나 두고 계란에 바위치는 격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동으로 일본어 구사 능력이 올라갔다. 나름대로 노력도 한 결과.
“주니 씨는 최근에 어떤 고민거리가 있나요?”
내가 일본말로 말하자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그들도 한류 열풍이다 해서 일본어나 중국어 정도는 공부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유창하지는 않을 테니까.
“와와! 일본어 엄청 잘하시네요?”
주니는 순식간에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러면서 방언 터진 것마냥 일본어로 줄줄이 자기 얘기를 뱉어댔고 나는 거기에 맞장구를 쳐줬다.
진짜 엄청 힘들었다느니, 지금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느니 부모님을 보고 싶다느니. 그런 종류의 뻔한 외국인 아이돌의 고민거리였다.
근데 멤버들의 표정은 나와는 달랐다.
“와, 주니가 이렇게 말 많이 하는거 처음 봐...”
“우리가 일본어를 못하니까 그런가봐. 매니저님도 일본어 엄청 짧게 밖에 못하잖아.”
“안무쌤이랑 트쌤한테 교육 받을 때도 그거 때문에 트러블이 많았지.”
“통역사 언니 없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 특히 흥분해서 언성 높아지면 더 불가능.”
나는 그러한 반응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최근 제2외국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현지인 급으로 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영어야 많이들 하지. 니들이 일본 야쿠자 상대로 얘기를 해봐라 아주 정신이 번쩍 든 상태여야 할 거다.
나는 주니에게 매니저를 통해 날 전담 트레이너 선생님으로 고용해달라고 부탁하라고 말했고 주니는 너무 좋아했다. 그룹 내에 유일한 일본인이어서 안무 선생님이 트레이너 선생님을 고용할 때 왠만하면 일본어를 잘하는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서는 리카.
나는 그녀의 우수에 찬 눈빛을 천천히 뜯어보며 물었다.
“리더라서 힘드시죠?”
내 애틋한 질문에 리카는 고개를 치켜들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꼭 홀랑 벗겨진 것처럼 모든 걸 내비친 듯. 부끄럽게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이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까지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팬들 조차도 모르고 있던 사실. 그녀는 카메라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어떻게..?”
주변 멤버들은 조용해졌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표정들이다.
나는 그녀의 등을 다독여줬다. 이미 유스걸은 내가 깔아놓은 게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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