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40. 천신 구르미 묻은 달
* * *
제시카는 백치미와 함께 귀염귀염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지우는 완전 반대인 보이쉬하고 츤데레같은 스타일. 두 사람은 정말이지 극과 극. 남자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씩 대표했다.
그에 비해 최지아는 그 둘 사이의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는 표현이 더 맞아 떨어질까. 직장 상사이면서 나이는 연하라서 그런지 독특한 상황 속에 비밀로 숨긴 아리까리함...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쯤은 될텐데 차도 없고 원룸방에서 자취한다. 외모는 뛰어나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은 죄다 형편없고 성경험조차 없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나 했더니 ‘구르미 묻은 달’ 이라는 터렛이 곁에 있었구나.
닉네임을 구르미 묻은 달... 달이 상징하는 바가 뭔지 알면 무슨 뜻인지 금방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닉네임을 갖고선 최지아의 처녀를 지켜주고 있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천신 ‘구르미 묻은 달’이 당신에게 1대1 대화를 요청합니다.
이건 또 무슨...
아주 호전적인 천신님이시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괜히 쫄린다. 인생을 아무리 많이 살았다고 해도 신들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를 조아리기 마련이다. 악신도 아니고 천신이라니. 악신과 천신 사이의 위아래가 있는건 아니지만, 악신은 징벌에 대해 관대한 편이라면 천신은 깐깐해서 난데없이 천벌을 내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천신 ‘구르미 묻은 달’의 1대1 대화에 응했습니다. 잠시 시간이 멈춥니다.
...
성기준이라는 환생자가 너인가?
낮게 깔리는 여성의 목소리. 허스키하기도 한데 확실히 여성형 신이라는건 확실하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날카로움이 내 심장을 콱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그저 아다를 떼주고 싶을 뿐이라고!
네, 맞습니다.
네 불순한 의도를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나는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최지아를 잠깐 쳐다보고 대답했다. 시간이 멈추면서 그녀는 정지상태였다.
섹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알고 있다. 많은 악신들이 네가 최지아와 섹스하길 원하더군. 근데 오늘은 절대 최지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이따 가봐야 알겠지만, 오늘 예정에 없던 일입니다.
가봐야 안다? 지금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나는 지금 네게 내 아이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거다.
상황과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섹스를 가리킨다면 섹스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지옥의 도리이고 교양입니다. 천신님께서는 모르실지도 모르지만요.
뭐? 뭐라고? 푸하하... 그놈 참 당돌하구나.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제안을 하면 어떻겠느냐?
어떤 제안을..?
오늘만큼은 내 아이의 순결을 빼앗아가지 말라. 그 아이의 순결은 이미 정해놓은 자가 있으니.
말을 끝내고 비릿한 웃음소리를 말 끝에 섞는다. 천신이라고 하더니 이제보니 양의 탈을 쓴 악랄한 늑대가 아닌가. 인간의 순결을 지켜주겠노라고 맹세를 해놓고 이미 임자를 정해놨다니.
대신 좋은 제안을 하나 하겠다. 내 친히 네 밤자리에 기막힌 먹잇감을 하나 던져주겠다.
최지아 씨의 순결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내가 던져주는 제안을 듣지 않고 질문하자 구르미 묻은 달은 날카롭던 언성에 톤까지 높여왔다.
천신의 뜻이다. 딱히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최지아 씨의 순결은 제가 가져갈 생각입니다. 아무리 천신님이라고해도 인간의 주체는 개인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그래. 최지아의 뜻에 달려있지. 네놈이 발을 담그지만 않으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예정이란 말이다. 그러니 오늘을 넘겨라. 내 너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섹스트림의 1대1 채팅을 하는 도중에는 벨라를 불러낼 수도 없다. 벨라에게 조언을 받아야하는 상황. 지금 구르미 묻은 달이 내게 하는 소리가 당췌 무슨 소리인지 그 말에 담겨있는 뜻이 뭔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었다. 내 깜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얘기다.
저는 애초에 오늘 그녀와 잠자리를 가질 예정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순결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최지아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푸흐흐흐... 좋다. 어쨌든 그래. 오늘을 넘겨만 다오.
알았다.
구르미 묻은 달은 이미 당장의 내일 최지아의 순결을 누군가에게 줄 예정인 것이다. 이년이 어떤 놈과 계약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정해진 일을 알기라도 하는 듯 딱 오늘만을 넘기고 싶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하신 보상은 받지 않겠습니다.
응? 왜지?
결국 최지아의 순결은 제가 가져갈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안 될 거래도.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뭐지?
최지아의 순결을 가져가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해서 내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푸흐흐흐... 그래, 무슨 내기지?
됐다. 여기까지 걸려들었다. 나는 앞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듯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장애물을 오히려 도움닫기로 사용할 생각이다.
구르미 묻은 달은 호기심이 동했는지 탐욕이 가득한 쩝쩝 소리를 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호감이 되어가는 천신이다.
혹시 천신 ‘미의 여신’ 님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미의... 여신? 아름다움에 눈이 부실 여천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오냐, 그 미의 여신이 바로 나다.
음... 키워드가 잘못 됐나? 이 년이 아프로디테면 내 성판타지는 오늘로써 끝이다. 아니, 이 채널에 모여있는 모든 악신들의 성판타지도 끝장이다. 어떤 키워드가 좋을까...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
아주 어렸을 적에 읽어본 적이 있다. 아프로디테의 탄생 비화에 대해. 그렇다면 ‘미의 여신’이라는 키워드는 당연히 잘못 됐다. 모든 천신들은 아름다울 것이고 각자의 개성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조금 고민한 후에 구르미 묻은 달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천신 ‘거품에서 태어난 여인’ 님은 알고 계십니까?
... 알고 있다.
맞았다. 키워드는 찾았다.
제가 이기면 그분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 해주십시오.
... 쉽지 않은 제안이다. 다른 제안을 말하라.
그렇다면 이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이 내기를 이겨버리면 되겠구나! 옳지.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이기면 네 놈의 목숨을 도로 가져가도 되겠느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주눅 들건 없다. 나는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최지아는 나 이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다리를 벌리지 않을 거다. 내가 자빠트리는 건 시간 문제고.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좋습니다.
으흐하하하하. 좋다, 좋아. 나는 오늘 내가 원하던 모든 걸 다 이뤘구나.
천신 ‘구르미 묻은 달’과의 1대1 채팅이 종료됐습니다.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릅니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 최지아. 살랑거리는 바람에 춤추는 머릿결. 시간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천신의 권능... 파격적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사기적인 능력.
최지아는 내가 멈춰서 물끄러미 보고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아... 아니에요.”
“이제 곧 도착이에요. 같이 걸으니까 어느새 벌써 도착이네요. 그때 그 양꼬치집 바로 옆집에 있는 삼겹살집이에요. 지금 전화 걸어서 지우쌤한테 고기 시켜놓으라고 말해놨어요.”
내가 채팅창에 신경을 쓰는 동안 옆에서 최지아가 쫑알쫑알 계속 말했었다. 나는 채팅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말이 잘 들리지는 않았었고.
이제부터는 집중 좀 해야겠다.
순식간에 목숨이 달린 문제가 되어버렸으니.
나는 채팅창과 모든 알림음을 제거하고 세 여자에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벨라와의 교신도 차단이다.
*
삼겹살은 언제나 옳다. 썰지 않은 길쭉한 김치를 돼지고기 기름에 지져 구우면서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익으면 쌈을 싸서 먹는다.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단백질 섭취는 중요하다. 특히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적정량을 챙겨 먹는 편이다. 평상시에는 닭가슴살과 미천한 탄수화물로 배를 채워야만 하니까.
그놈의 퍽퍽한 닭가슴살에 비하면 돼지고기는 오성급 호텔에서의 음식보다 더 맛있는 반찬이 된다.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세 여자와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 닭가슴살을 퍽퍽 먹던 우리는 삼겹살이 구워짐과 동시에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삼겹살만 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켜놓은 소주는 덩그라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각각 삼겹살 1인분쯤은 아무렇지 않게 흡입하고선 2인분을 더 시켰다. 이제 슬슬 여자들은 배가 부를 타이밍이다. 고기 먹고 기분이 좋아진 제시카가 가장 먼저 포문을 열고 소주병을 빙빙 돌렸다.
“촤라락! 촤촤! 이렇게 하면 소용돌이.”
마치 멋있는 걸 했다는 듯이 자랑스레 소주병 안의 소용돌일 보여주자 최지아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어떻게 했어요?”
“흐흐. 대학교 때 배운거죠. 스냅이 중요해요. 팀장님도 해볼래요?”
최지아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술게임이건 여러 가지 잡기술이건 다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눈을 반짝거리면서 손목 스냅으로 어설프게 소주병을 돌려보지만, 제시카처럼 기깔나는 소용돌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끄응... 잘 안 되네.”
“스냅! 스냅!”
“어, 됐다! 됐다!”
손뼉을 짝짝치면서 엄청 좋아한다. 제시카는 동물원에서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최지아의 손바닥 위에 자기 손바닥을 가져다대며 칭찬해줬다.
가끔씩 여자들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아주 소소한 것에도 미친 듯이 기뻐하다가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에 토라지곤 한다.
거의 반오십을 살았던 나로써는 이 자리가 편하지만은 않다. 소주잔이 돌고 돌면서 여자들의 텐션이 높아지자 종 잡을 수 없어졌다.
제시카가 맥주를 시켜서 소맥을 말아줬고 한지우는 젓가락 두 개를 이용해서 딱! 하고 최지아의 잔을 다 섞어줬다. 최지아는 이번에도 깜짝 놀라서 간절한 눈으로 한지우를 바라봤다.
“어떻게..?”
... 오늘 무슨 동물원 이벤트하는 날인가.
두 여자가 시범을 보이면 최지아는 그걸 따라했고 깜짝 놀라고 되면 좋아했다.
내가 멀뚱히 앉아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자 최지아가 내게 말을 걸었다.
“기준쌤은 다 알아요?”
“저도 모르는거 많아요.”
“아, 그러고보니 기준쌤은 학교 어디 나왔어요?”
“어... 지방쪽 대학이라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그렇구나. 암튼 학교 다니면 다 배우게 됨! 팀장님 여기여기.”
“으응. 예. 아, 그렇구나. 그거 되게 재밌다.”
“히히. 우리 그럼 2차로 이동할까요?”
삼겹살을 다 먹고 배도 부르니까 편한 곳으로 이동해서 술 먹고 놀자는 얘기. 시간을 보니 11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다. 얼마나 밥을 빨리 먹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추가로 나온 2인분과 네 명이서 소주 2병을 간신히 다 먹고서야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섹서타임까지 남은 시간 : 2시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