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3. 깝치지 말지어다
* * *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우리가 홀로 나가자 최지아가 참다 못해 이정석에게 따졌다.
“솔직히 말해 봐요. 사적인 감정 다 베재하고 하는 짓이 맞아요?”
“뭐? 짓? 야, 최지아 팀장. 진짜 웃기네? 내가 사적인 감정 섞었다 치자. 그럼 뭐 어쩔건데?”
“...”
“거봐. 할거 없지? 자기가 뭔 소리를 하는지 다음부터는 생각하고 말하도록 해.”
“... 헤어져요.”
“뭐, 뭐?”
“이제 끝이에요. 저랑 이정석 팀장님이랑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처음부터 싫었어요. 근데 아버지 봐서 만난거였는데 이젠 도저히 못 참아요. 날 자기 소유처럼 멋대로 하는것도 그렇고 내 핑계 대면서 밑에 사람들 막 하는것도 이제 못 참는다고요.”
최지아는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아마 어딘가에 가서 펑펑 울 것이다. 당장 뛰어가서 달래주며 점수를 따고 싶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시간만큼은 혼자 있게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최지아는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니까.
이정석은 너무 화가났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도 몰라서 그렇지 저놈은 살인마다. 진정 꼴 받으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물론 지금의 내 완력과 근력이라면 제아무리 미쳐 날뛰는 이정석이라고 해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 이게 코인의 힘인가. 20kg 짜리 플레이트를 잔뜩 끼워도 들어올릴 수 있을 거다.
나는 분노한 이정석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뭐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벤치프레스.”
최지아가 저러고 나갔는데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역시 깡패 새끼들은 감정의 한켠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건 마찬가지. 이놈에게만큼은 자비라는 단어가 결여되도 상관없다.
나는 벤치프레스에 무게를 꼽으면서 말했다.
“이정석 팀장님.”
“왜?”
“가볍게 200부터 시작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뭐? 푸핫! 야, 너네 다 들었냐? 이 새끼가 지금 200이란다. 야, 너 죽어 임마.”
“평소에 드는 무게입니다.”
옆에서 한지우와 제시카도 내 막무가내 식 발언에 겁이 났는지 내 뒤로 와서 오들오들 떨었다.
“쌤... 괜찮겠어요? 저번에 70kg도 겨우 들었잖아요.”
“기준쌤아... 무리하지 마... 나 진짜 가슴이 터질거 같아.”
한지우보다 훨씬 여린 제시카는 내 팔꿈치 살을 꼬집할 지경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달랬다.
“나는 걱정 말아요.”
이정석은 연신 씩씩거렸다.
“평소에 하던 무게라고? 와, 이 새끼 진짜 끝까지 지랄이네.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냐?”
“... 이정석 팀장님은 못 하십니까?”
“야! 진짜 어이가 없네. 벤치 200을 어떻게 해. 시발, 뭐 내가 황철순이냐? 우리같은 일반인은 절대 200 못 들어, 임마.”
“제가 먼저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이, 시발! 니 새끼가 하면 나도 한다. 어디서 체급도 낮은 멸치새끼가 염병 지랄이야.”
나는 그가 말하는 동안 차근차근 바벨에 200kg을 끼웠다. 랙(lack)에 고정된 바벨이 보기만 해도 휘청거릴 정도로 양쪽으로 무거운 무게가 실렸다.
“... 너 벤치랑 데드랑 헷갈린거 아니냐?”
겁을 먹었는지 이정석이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나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벤치에 누워서 바벨 위치를 가늠했다. 안전장치도 없이 하는거다. 하지만 들어보나마나 뻔했다. 나는 이걸 들수 있다.
“문제 없습니다. 이정석 팀장님은 아까 했던 말이나 꼭 지켜주십시오. 제가 하면 분명 본인도 하시기로 했잖습니까.”
“...”
그는 설마 내가 이걸 할 수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씩 웃어주면서 이 말도 잊지 않았다.
“설마 한입으로 두말 하시겠습니까? 입으로 말한 맹세는 반드시 지킨다.”
그렇게 말하고 바벨을 보란 듯이 들어올렸다. 약간 힘이 부치는 느낌이긴한데 그래도 상관없었다. 너끈히 4개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천천히 내렸다가 차분하게 후 뱉으며 위로 뻗었다. 배운 그대로다. 근력과 완력이 받쳐주고 있다지만, 이렇게 무거운 무게를 치는데 잘못된 자세로 하면 다칠 위험이 있다.
천천히 견갑을 고정시키고 정확히 네 개를 한 후에 랙에 바벨을 걸치고 일어났다.
입이 딱 벌어진 이정석과 박수를 치는 트레이너들. 나는 흐르는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박수를 더 유도했다.
“쌤들. 저는 그렇다치고 팀장님이 하실 때 큰 응원 부탁바랍니다. 한번 내뱉은 맹세는 반드시 지키시는 팀장님이시거든요.”
분명 운동한건 난데 땀을 뻘뻘 흘리는 이정석. 주변에서 응원해주고 박수치면서 호응해주자 엉겁결에 벤치에 누웠다.
나는 이정석이나 최용수같은 놈들을 잘 알고 있다. 절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놈들. 가오가 몸을 지배해서 제 몸이 상하는줄도 모르고 그만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바벨을 잡는 이정석. 눈을 부릅뜨고 천장을 노려본다. 꼭 그렇게 하면 없던 힘이 생길 것처럼.
안타까운 인생이다. 칼에 찔려 죽은 내 인생보다도 비참한 인생. 결국 누군가가 시킨 일만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제가 한 말에 묶이고 마는구나.
이빨을 악물고 바벨을 밀어올린다. 그래도 들리긴 들렸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문제다 팔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리기 시작했던 거다. 지금 이정석의 귓가에는 악마가 속삭이고 있다. 지금 내려놓으면 다시는 밑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지 못할 거다. 그게 오늘 4천만원 실적을 올린 남자의 최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풀린 이정석은 그대로 바벨에 깔렸다. 200kg가 넘는 무게에 깔리면 그야말로 눈앞이 아찔해진다.
“크학!”
그 순간 내가 이정석을 파묻은 바벨에 손을 댔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와주는 것도 어려울 터. 하지만 나는 바벨컬을 하듯 가뿐하게 200kg짜리 바벨을 들어올려 렉에 걸쳤다. 내 밑에 깔린 이정석은 잔뜩 수치스러운 표정을 하고 날 올려다봤다.
자비란 없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넋놓고 있으면 그림이 좋지 않다. 하지만 결국 이정석의 입지는 떡락할 것이다. 이제 그가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 듣는 시늉이라도 할까. 위에서 침이라도 뱉고 싶어졌지만, 나는 두발짝 떨어졌다.
이정석의 팀원들이 그에게 달려가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응급실이라도 가셔야 하는 게...”
“아, 놔봐. 왜 호들갑들이야. 잠깐 방심해서 떨군 거 같고.”
“설마... 다시 하실건 아니죠?”
황인호라고 했나.
팀원들은 이정석을 믿고 따르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팀원 입에서 이정석을 두 번 죽이는 질문이 나왔다. 다분히 걱정스러워서 한 질문이지만 결국 마지막 비수가 됐다.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이정석은 고개를 들고 나머지 트레이너들의 면면을 보며 한바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내 얼굴에서 딱 멈춰섰다.
“... 너...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모든 게...”
실성한 것처럼 굴다가 결국 폭발해버려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두다리를 넓게 벌리고 달려오는 이정석과 맞부딪쳤다.
미안. 내가 지금 돌덩이 상태라.
쿵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치자마자 쓰러지는 이정석. 그 모습을 보고 말려야된다는 생각은커녕 웃는 트레이너들도 있었다.
다시 일어나자마자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는다. 멱살을 잡고 끌어올리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고 앞에 있는 이정석을 노려볼 뿐이었다.
“놓으시죠, 팀장님. 이게 뭔 치졸한 꼴입니까. 사람이 졌으면 졌다고 할줄도 알아야지요.”
주변에 있던 회원들도 이게 뭔 난리인가 싶어서 기웃거렸다. 그중에는 방금 이정석 팀과 PT계약을 한 회원들도 있었다. 사람 마음이 1시간마다 바뀌는데 센터에 난리가 나면 PT 환불 때문에 손해 볼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근데 이미 눈에 뵈는게 없는 듯 내 멱살을 붙잡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이 개새끼야. 너 뭐 알고 있지. 너 아까 뭐라고 했어. 내뱉은 맹세는 반드시 지킨다는 그 말, 어디서 들은거야. 너 첩자냐? 이 시발놈아?”
“들어보니까 꼭 무슨 조직폭력배처럼 말씀하시네요.”
“이...”
놈이 주먹을 위로 치켜드는 순간. 사무실에서 유성목이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지금 뭔짓들을 하고 있는 거야! 빨리 그 손 안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정석의 손을 뿌리쳤다.
“이 자식이 미쳤나. 매출 많이 했다고 지금 갑질하는 거야? 그럴거면 당장 꺼져. 너 같은거 우리 센터에 필요 없어.”
유성목. 지금까지는 매출이면 다 된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그런데 이정석이 선을 넘자 자기 원래 신념대로 내뱉었다.
“아니, 매니저님. 그게 아니라...”
“뭐. 아직 할말이 남아있어? 썩 꺼지라니까?”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밖으로 나가는 이정석. 유성목은 전장 앞에 선 지휘관처럼 손짓을 하면서 모여있는 트레이너들과 회원들을 흩어놓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야, 카운터에 시켜서 방송 한번 때리라고 해. 그리고 트레이너들 플로팅 조끼 입고 플로팅 돌고 이정석 팀은 아까 바빠서 못했던 캐비닛 위에 청소 마저 하고.”
그 뒤의 센터는 원래처럼 순조롭게 돌아갔다. 원래대로 운동하는 헬창들. 땀범벅에 나시 입고 손부채질 하는 아저씨들. GX룸 앞에서 노가리 까는 아줌마들. 마치 아까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하다.
하지만 트레이너들만은 알고 있었다. 이정석은 병신이 됐다는 걸.
유성목은 나를 따로 불렀다.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이정석 팀장이 걱정입니다.”
“너한테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 새끼가 걱정이 되냐? 참 착해빠진 놈이네. 아니, 아무튼 이정석 그새끼는 내가 근신 처분 내렸으니까 며칠 못 나올 거야. 그만둘거면 그만두라고 하지 뭐.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그때는 진짜 잘라버릴거야.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다녀.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하. 그나저나 이대로 이정석 팀이 1등하면 곤란해지는데.”
나는 그의 말에서 뭔가 짚이는게 있어서 물었다.
“네? 왜 그렇습니까?”
유성목은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어쩔수 없다는 듯 털어놓았다.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이번에 사장님이 사원들을 상대로 이벤트를 거시면서 각 지점 매니저들한테도 지령이 떨어졌어. 이번에 1등하는 지점 매니저는 강남으로 발령난다. 승진은 물론이고 월급도 장난 아니야. 지금보다 300은 더 받을 거다. 거기에 출퇴근까지 자유로우니까 할 말 다했지. 근데 여기서 문제는 뭐냐? 매니저 공석을 누가 채우냐는 거지. 당연히 1등한 지점의 1등 팀 팀장이 매니저가 되는게 맞지 않겠냐? 근데 이정석 그 새끼가 저딴 식으로 하는데 매니저 달면 센터가 아주 아작이 나요. 눈 감아도 비디오 아니냐?”
맞는 말이다. 이정석이 매니저가 되는 순간, 최지아를 비롯한 실력 좋은 트레이너들이 대거 떠날게 분명했다.
“후. 아무쪼록 지아네가 1등을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승부는 지금부터다.
폰이 진동을 해대서 확인했다. 최지아였다. 전화를 받자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쌤... 지금 어디에요?
“저 사무실이요. 무슨 일 있으세요?”
...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저 옥상에 있어요.
나는 알겠다고 하고 냉큼 옥상으로 달려갔다.
옥상 난간 쪽에서 몸을 기댄채 바람을 맞고 있는 최지아. 그녀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정석 그 병신새끼는 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길래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울릴까.
내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자 최지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바람이 불어 몇 개의 뜨거운 물방울이 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 듯 부여잡았고 내 손길을 시작으로 최지아는 봇물 터진 것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헤어지자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 동안...”
“...”
그녀는 내 품에 안겼고 나는 한동안 그녀의 등을 다독여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