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마학원 수석졸업생인 나와 그녀들-31화 (31/159)

〈 31화 〉 31. 쓰레기는 쓰레기다

* * *

당황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다. 최용수. 날 죽인 원수. 10년이 지났는데 얼굴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 놈의 목을 꺾어서 죽일 수도 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충분했다. 부족한 완력이라면 코인으로 충당하면 된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벨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복수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최용수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뒤로 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씹쌔꺄. 재미 다 봤냐?”

이정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둘이, 함께?

딱 내가 이런 표정을 짓자 이정석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앉아. 이 시발놈아. 이번 일은 어떻게 해명할 생각이냐?”

“해명할 일이 없습니다만.”

꾹 눌러도 내가 버티고 있자 이정석은 약간 당황한 듯 최용수의 눈치를 살폈다.

“이 새끼가 팀장 앞에서 말 따박따박. 미쳤냐?”

틀린 말도 아니다. 눈 앞에는 BD짐의 수장이 있다. 그가 만든 계급체계를 무시하는 행위만큼 미친짓도 없다.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고 이정석도 그러면 그렇지 하며 맞은편에 자리를 앉았다. 방금까지 최지아가 앉았던 자리다.

“홍대에서 그 지랄을 하고도 아무도 모를줄 알았냐? 이미 인터넷에 다 떴어, 새꺄.”

“...”

“너가 뭔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상도덕이 있지. 시팔. 어디 남의 여자를 넘보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웃기고 있네. 동영상에 다 찍혔어, 이 새꺄...”

분위기가 과열되려하자 최용수가 이정석의 옆에 앉으면서 씩 웃었다.

“이정석 팀장? 그만하지.”

나직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뼈가 실려있었다. 이정석도 기가 죽어서 바로 꼬리를 내렸다.

“... 네... 사장님.”

“자네 이름이..?”

“성기준이라고 합니다.”

“그래. 지아네 팀 팀원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며 제 얼굴을 가까이 밀고온다. 익숙한 냄새. 내 뒤통수를 치기 전에 알고 지냈던 바로 그 냄새가 물씬 코 밑으로 파고든다. 손아귀와 어금니 쪽에 힘이 꽉 들어갔다.

최용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처음 불량조직에 들어갈 때는 전부 말단이었다. 못된 짓을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나는 결국 뉘우쳤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는 다시는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놈만큼은 나와 뜻을 달리 했다. 이유있는 복수를 해주는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패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그 중에 하나가 내가 될줄은 몰랐다.

“출근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매출을 했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지아가 칭찬을 아주 많이 해. 이정석 팀장도 그렇고. 그래서 강서점에 거는 기대가 커.”

“...”

나는 아무 말 없이 최용수의 눈을 바라봤다. 그가 하는 말의 토시 하나하나라도 믿을만한 게 없다.

그리고 역시나 최용수의 눈에는 보통 사람은 감지하지 못할 독기가 가득 품어 있었다. 말의 뼈가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웬만하면 자신의 울타리 안을 공격하지 말라는 집주인의 으름장같은 것. 말 그대로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아... 빠?”

바로 그때 최지아가 화장실에서 걸어나오며 기겁을 했다.

“두 사람이 여기는 무슨 일이야?”

이정석이 기가 찬 듯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남자치구가 아버님 모시고 여자친구 보러왔다는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니. 나는 사생활도 없어? 왜 멋대로 찾아오고 그래?”

“... 바람핀 주제에 이게 미쳤나..?”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이정석 팀장?”

최용수는 너그럽게 웃었다.

“딸 아이 앞에서 인상 구기게 하지 말게.”

“네, 네! 죄송합니다!”

“나가지. 지아야, 너도 나오거라. 이 아비가 할 말이 있다.”

“그치만...”

“너가 안 나오면 여기 있는 네 팀원이 곤란에 빠질 거다. 지금 얼마나 불편하겠니? 안 그래?”

“... 알았어요. 저... 미안해요. 먼저 가볼게요. 계산은...”

“계산은 내가 했다. 술을 참 많이도 마셨더구나. 팀원사랑이 가족사랑보다 큰 것 같아. 우리 지아는.”

최지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라 하려다 그대로 목구멍 너머로 삼킨 듯하다. 아무래도 내 걱정을 하는 모야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팀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노려보는 남자와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 그리고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여자. 이 세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나를 한번씩 흘끗 보고서는 밖으로 향했다.

허.

웃음이 나왔다. 내 계산에는 이정석만 이곳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최용수까지 만날 줄이야. 이렇게 되면 확실히 섹서타임을 발동시키지 않은게 다행 중 다행이다. 내 섹서타임의 적중률은 지금까지 100%에 달한다. 나는 이 기대치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됐다. 나는 많고많은 쇼핑백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쪽으로 갔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 직원을 향해 물었다.

“그쪽이죠?”

“... 네?”

직원에게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지만 입꼬리를 씰룩 올리며 말했다.

“이정석한테 최지아가 여기있다고 말한 사람이.”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모르는척 고개를 돌리는 직원.

속이 훤히 보인다. 애초에 이 사람이 있다는걸 알고 찾아왔던 거니까.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최지아랑 지금 섹스를 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균열. 하극상. 딜레마. 내 복수의 키워드는 이 세가지로 축약이 가능했다.

예상과는 좀 다르지만, 뻐대던 이정석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는 눈 감아도 알 수 있다.

최용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니까.

*

퍽­ 퍼억­ 퍼억­

“꽉 잡아. 흔들린다.”

“크흑... 컥, 컥... 제발... 제발... 죄송합... 죄송합니다...”

허름한 건물 안에서 최용수의 보디가드 두 사람이 양쪽에서 이정석을 붙들고 있었고 최용수가 직접 이정석의 배쪽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저렇게 패도 좋을까 싶을 정도로 수차례 가격한 탓에 이정석은 이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숨을 간신히 집어삼키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꼽 당한 것도 모자라서, 여자친구까지 뺏겨? 이 시발새끼가 언제까지 내 얼굴에 먹칠을 할 거야?”

“끄으으... 헉... 죄, 죄송... 합니다...”

“후. 됐다. 그만 냅둬라.”

“헉, 허억... 허억... 헉...”

“언제까지 껄떡거릴거냐? 영원히 입도 못 벌리게 해줄까?”

“...”

그 말에 이정석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하아... 숨을 깊게 들이마신 최용수가 셔츠 깃을 쳐서 가지런히 했다. 풀었던 소매 단추를 재차묶고 이정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강서점 매출의 지분이 대부분 지아네 팀으로 되어 있다고 했지?”

“... 네.”

“남자라는 새끼가 여자보다 매출이 떨어져서야 가오 떨어져서 기강이 잡히겠냐?”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 매출은...”

“개인 같은 소리하지 말아. 매출은 팀 위주로 돌아간다. 너네 팀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있지?”

“네.”

“회원들한테 몸이라도 대주라고 시켜.”

“... 네?”

아무리 깡패새끼들이라지만, 해도 되는게 있고 안 되는게 있는 법이다.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도 들어갈 수 있다. 여자 팀원인 김주현이 아무리 자기 말을 잘 듣고 따른다지만, 몸이라도 대서 회원들한테 PT를 끊으라는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들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정말, 정말 잘못하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죽지 않기 위한 대답이었다. 이정석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양심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마저도 최용수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파악하는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그 새끼. 성기준.”

“네.”

“확실히 네 말대로 뭔가 있어. 뭔가 알고있는 듯한 느낌이야. 애들 풀어서 뒤 캤을 때는 아무것도 안 나왔는데. 뒤를 캐는걸로는 소용이 없을 것 같다.”

“... 그럼...”

“뒤가 어려우면 그림자라도 잡아야지. 잘 지켜봐.”

“네.”

“이번달 말에 보자. 매출 지면 죽는거야. 지아를 뺏겨도? 넌 죽는거야. 그게 우리 식구들이 살아남는 방법이니까.”

“네. ‘입으로 말한 맹세는 반드시 지킨다.’”

“그렇지. 내가 맹세를 못 지키는 일이 생기지 않게 잘하라고.”

최용수는 이정석의 뺨을 톡톡치고 보디가드와 함께 차량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차에 탄 최용수는 옆에 앉자마자 담배를 요구했고 옆에 앉은 보디가드는 담배를 주고 불을 붙여줬다.

습­ 깊게 들이마신 최용수는 아까 기준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왜였을까. 지금까지 온갖 경험을 다 해본 최용수가 아주 살짝 오금이 저렸었다. 뭔가 캥기는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무섭게 느껴졌던 거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다. 그것도 이십대 중반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핫바지. 그러고보니 옆에 앉은 보디가드 녀석과 나이가 비슷하려나.

“야.”

“네, 이사님.”

“너 몇 살이냐?”

“올해 스물 다섯입니다.”

“그래? 넌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

“... 조, 존경을...”

최용수는 다짜고짜 대답하던 보디가드의 얼굴을 뻑뻑 때려대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은 보디가드는 미러를 통해 보지도 않고 묵묵하게 앞만 쳐다봤다. 그저 땀이 맺히기만 할 뿐이었다.

한동안 줘패던 최용수는 멈춰서 넥타이를 끌렀다. 넥타이 때문에 주먹을 뻗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야, 출발해.”

“네.”

분명 창문을 다 닫았는데도 싸늘한 기운이 차 안을 맴돌았다.

*

출근이 오후 2시까지인데 아침 6시부터 일어나서 해부학 공부를 했다. 이제 곧 점심 때가 되니 슬슬 배도 고파지고 졸리기도 해서 하품이 나왔다.

확실히 전생에 비해 습득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최지아 팀 삼인방의 교육 내용을 적절하게 응용해서 어떻게 멘트를 쳐야할지도 머릿속에 계산이 된다.

시간이 돼서 슬슬 출근해야하는데 문득 어제 최지아가 코디해줬던 스타일이 생각나서 옷을 입고 셀카 한 장을 찍어 최지아에게 보냈다. 어차피 나보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없기에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으면 내가 옷 입은 모습을 볼 수 없을테니까.

출근하기 위해 센터 앞으로 갔는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건물 현관에 들어가면 점심식사를 끝내고 카페와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는 직장인들이 잔뜩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우리 센터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뭘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상황.

마침 오전조 남자 트레이너가 지나가길래 그를 붙잡고 물었다.

“이게 다 무슨 행렬이에요?”

“모르셨구나. 전부 이정석 팀장님 팀한테 PT 결제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에요.”

“... 네? 이 많은 사람들이요?”

“네. 이정석 팀 전체 매출 급상승이랄까요. 대단하죠, 뭐. 좋은 팀장 만나서 부럽기도 하고.”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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