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마학원 수석졸업생인 나와 그녀들-30화 (30/159)

〈 30화 〉 30. 두 번 살아도 설레는건 설렌다

* * *

꿀꺽­ 꿀꺽­ 꿀꺽­

“캬아­”

맥주 500cc를 한번에 들이키는 최지아. 얼굴이 벌개져서 벌써 2잔째 원샷을 해치웠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 마음이 읽혔는지 최지아가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여기 맥주 500 하나 더 주세요!”

솔직하게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몽마들이 사용하는 ‘생각을 읽는’ 아이템을 사용하고 싶을 정도. 하지만 방송에서도 발표했듯이 어떤 스토리텔링을 건너뛰고 섹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아이템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니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깟 답답함 쯤은 아가리를 조금 더 터는 것으로 수고스러움을 덜 수 있다.

“오늘 좀 유별난 하루였죠? 직장 후배가 다짜고짜 쇼핑 도와달라고 하질 않나. 아이돌 그룹한테 덜미를 잡히질 않나.”

“헤헤­ 솔직히 좀 기뻤는데요, 뭘.”

“어떤 부분이?”

“나한테 쇼핑 같이 가자고 해준거요. 기준쌤은 지난 일주일동안 다른 쌤들이랑은 친해졌는데 저랑은 유독 가까워지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좀 서운했어요.”

술집 직원이 500cc가 아니라 2000cc짜리 맥주통을 들고 왔다.

“사장님께서 서비스라고 주셨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우왓! 감사해요! 오늘 아주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야겠네요.”

“헤헤, 대신 좀 자주 와주세요. 너무 예쁘세요.”

맥주통을 꼭 꽃다발처럼 들어올리면서 기뻐하는 최지아.

남자 직원은 꽤 잘생긴 편이었다. 이십대 초반 정도되는 모양인데 풋풋한 느낌과 조각같은 외모가 합쳐지자 인상이 깊이 남았다. 거기에 목소리까지 좋은데다가 저렇듯 능글맞은 소리를 해대니까 여자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그런데 최지아는 네, 네 거리면서도 한번 눈길을 주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괴고선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안해진 남자 직원은 어정쩡하게 서있다가 결국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최지아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팀장님은 팀장님이라서... 말을 걸 때, 용무가 없으면 좀 불편하더라고요.”

최지아는 나를 향해 두팔을 뻗었다.

“으잇! 괜찮아요! 앞으로 마구 함부로 해도 좋아요!”

“... 넵.”

“엥? 왜요... 제가 또 너무 선을 넘었나요?”

“아닙니다. 저, 사실 팀장님 옆에 이정석 팀장님이 계시는 것 때문에 접근하기 힘든 것도 있어서요. 남자친구분이신데 괜히 제가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진짜 그건 아니에요.”

이번에는 최지아가 따끔하게 말을 했다. 정말이지 일 얘기만 나오면 진지해지는 그녀였다.

“센터에서 서로 연인관계가 아니라 팀장끼리의 관계로 선을 긋자고 했었거든요. 만약 내 후배 트레이너가 제 남자친구 때문에 접근을 못하는 거라면 당장 헤어지겠어요. 공과 사를 구분 못해서야 되겠어요?”

나는 씩하고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음... 이건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인데 혹시나 해서 말씀드려요.”

“뭔데요?”

“지난번에 한번 이정석 팀장이 절 옥상으로 부르셨었어요.”

“아...”

최지아는 내 담담한 말을 듣곤 아연실색했다. 자기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를 챈 거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이 있으니 더욱 분노가 끓어오르는 거다.

조금 거짓말을 섞어볼까.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신예인 회원 등록시킬 때, 최지아 팀장한테 확인 받지 말고 자기한테 직접 확인을 받으라고.”

엄연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정석은 내게 보고체계를 무시하고 본인에게 오라고 했었으니까.

“그래서 최지아 팀장님한테 다가가지 말라고 눈치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이렇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나는 일부러 최지아가 질투심을 느낄 수 있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한지우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그널을 주고 받으면서 묘한 기류를 느끼게 만들었고 제시카와는 대놓고 친하게 지내고 밤새도록 공부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정석이 날 옥상에 부른 것은 내가 유도한 건 아니다. 하지만 놈이 무슨 짓을 하던 그게 본인의 무덤이 될 거라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내일 당장 얘기할게요.”

“아닙니다. 굳이 말씀하시면 제가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팀장님...”

“아니에요. 기준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얘기할거에요. 만약 그때도 오빠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면 우린... 끝이에요.”

이번만큼은 관계에 대해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는 최지아.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애초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정석과 사귀는 사이가 됐다. 그녀의 아버지인 최용수의 강압적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쯤에서 질문했다.

“팀장님은 스무살이 되고서부터 바로 트레이너가 되셨죠?”

“네.”

최지아는 방금 한 말을 기점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바꿨다. 나는 그게 심경의 변화를 뜻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다리를 꼬았다.

“삼년동안 근무하면서 힘들었던 적 있으세요?”

“많죠~ 진짜 매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는데.”

“아, 그래요?”

“네. 그때는 비전이 없었거든요.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어야되나 싶고.”

그녀는 콧등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그걸 또 따라했다.

“아버지 뜻만 아니었으면 다른 애들처럼 학교 가고 놀러다니고 그랬을 거예요. 아버지는 이상하게 저한테만 유독 독립심을 주장하셨죠. 제가 쌍둥이라는건 알고 계셨나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척 했다.

“몰랐어요. 이렇게 예쁘신 분이 한분 더 계시는 건가요?”

“예쁜가... 완전 판박이처럼 생기긴 했는데 아무튼 달라 보이고 싶어서 저는 꼭 화려한 색깔로 염색을 했어요. 아버지는 언니한테 공부만 시켰고 염색 따위는 절대 시키지 않았으니까.”

“...”

나는 최용수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쌍둥이 딸을 저런 식으로 키웠다는 건 모르는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미친놈의 생각을 헤아리기엔 내가 너무 정상이다.

그녀가 잔을 들어서 마시려고 해서 나도 잔을 들었고 우리는 건배를 했다.

꿀꺽­ 꿀꺽­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맥주 한줄기가 턱을 따라 쭈욱 밑으로 굴렀다.

약간은 흐리멍텅해진 눈을 껌벅거리길래 티슈를 뽑아서 흘러내린 맥주를 닦아줬다.

“기준쌤.”

“네?”

“근데 왜 아까부터 저 따라해요? 놀리는 건가.”

기분나빠 보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따라한 건 팩트이기도 했다.

“아. 들켰네요.”

“왜요, 왜 따라했는데요.”

“그냥... 서울대학교에서 그런 연구를 했대요.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따라하면 그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다고.”

내 의외의 발언에 최지아는 멈칫했다. 아른아른거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데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상상도 안 된다.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에요. 팀장님한테 호감을 사서 나쁠게 없잖아요?”

“아, 그런 호감... 난 또...”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밀어붙이면서 질문을 하거나 반발짝 떨어지거나.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최지아의 손가락에는 혼전순결 반지가 있다. 천신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얘기. 따라서 아껴주고 어르고 달래주지 않으면 공략이 어려울 거다. 자칫 말실수를 하면 호감도가 급속도로 추락할 거다. 거리는 멀어질 거고 더 이상 복구하기 어려워질수도 있다. 그것이 직장 내 상하관계니까. 나는 지금의 관계를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팀장님처럼 팀원들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나는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노력하시고 어떻게든 이렇게 신입 직원이랑 친해질 궁리도 하시고 개인 시간내주시는 희생까지 하시니까. 저는 아주 오랫동안 팀장님이랑 함께 하고 싶어요.”

“...”

맥주잔을 기울여서 받아야되는건 맞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들어올려야 한다. 그런데 최지아가 계속 맥주잔을 기울고 있는 채로 멈춰서 더 이상 따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감동... 이에요.”

목소리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아무도 저한테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어요.”

인생을 두 번 산 나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공감대도 아니다. 살다보면 인정을 받아야하는 부분에서 인정을 못 받는 서러운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걸 누군가 알아줬을 때의 희열은 배가 된다.

“별 말씀을요. 사실인데요, 뭘. 만약에 저한테 못 되게 하셨다면 못 되게 굴었다고 말씀드렸을 거예요.”

“기준쌤은 솔직한 성격인가봐요.”

“알랑방구 뀐다고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솔직하지 못하면 내가 하는 말에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맞아요. 저는 그런 기준쌤이 좋아요.”

‘좋아요’라는 말에서 취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닐텐데도 멈칫해서 그녀를 보게 됐다. 두 번 살았지만, 저렇게 생긴 여자가 저런 말을 하면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현재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가 (내가 복수를 꿈꾸는 그 새끼의 여자친구가) 저런 말을 하면 참을 수가 없어진다.

더 마셨다가는 무아지경으로 입술을 포갤 것만 같다. 만약 최지아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아직 많이 남아있는 맥주통을 보며 말했다.

“이거 다 마실 때까지 집에 못 갈텐데. 버려야 하나.”

“절대 안 되죠! 서비스로 받았는데 남기면 진짜 나쁜 사람으로 찍힐 거예요. 나 이 가게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러고 있는데 테이블 사이를 지나 남자 한 명이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였다. 키는 어쩌면 나보다도 클 수도 있겠다.

“저기요.”

다분히 최지아에게 접근한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등을 보이고 있던 최지아가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네?”

“혹시 앞에 계시는 분 남자친구 분이신가요?”

“...”

최지아는 질문을 듣고 내쪽을 흘깃 쳐다봤다. 그렇게 눈맞춤을 하다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 그러면... 저기...”

“남편이에요.”

“네?”

“남편.”

그러면서 자기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있는 혼전순결 서약반지를 보여줬다. 그러자 남자는 허둥지둥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자기 테이블로 꺼졌다.

“히히. 어땠어요?”

어떠긴. 존나 설렜지.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장난처럼 그렇게 말하고 까버렸는데 설레지 않을 수 있겠냐고.

“능숙하시네요. 근데 이만 가봐야할거 같아요. 벌써 새벽 1시인데.”

“히잉... 이제 막 시작했는데. 저 술 엄청 잘 한다고요. 잠깐 화장실좀...”

그녀가 화장실로 가는데 연신 비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러면서 뭘 이제 막 시작이라는 건지. 하지만 그런 모습이 또 귀엽기도 했다.

내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쳐다보고 있자 또 누군가 우리쪽 테이블로 왔다. 인기척만 들어도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요...”

“여자분 잠깐 화장실 가셨거든요? 잠깐 기...”

자세를 다시 잡고 찾아온 남자를 보는 순간 아찔한 감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제 딸아이 남자친구인가요?”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최용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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