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2. 반짝이는 여섯 개의 눈
* * *
뜨거운 바람. 남자 탈의실에서 여자에게 머리를 맡기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지우는 자세히 볼수록 매력적인 여자였다. 이번 여름에 태닝을 했는지 구릿빛으로 건강하게 태운 피부에 자세히 보니 손목 쪽에는 작은 레터링 타투도 있었다. 몸에 타투가 상당히 많다.
사연이 궁금해지는 여자다.
무뚝뚝하고 피가 차가운 여자.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만큼은 다정했다.
“기준쌤은 반곱슬이니까 잘만 만지면 볼륨도 살고 굳이 파마할 필요도 없어요. 올릴 때 빗으로 이렇게 돌돌 말아서 옆으로 쑥 빼는 거야. 반복해서 볼륨을 세우고 손으로 모양을 잡은 다음에 그 다음에 왁스를 겉부분에 바르면 되요.”
나는 거울에 비치는 한지우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런건 어떻게 알았어요? 뭐라고 해야하지? 남성 헤어스타일링이요.”
“전남친 머리 내가 만져줬거든요. 첫직장 출근할 때.”
한지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실려있는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억울함이다. 추측이지만, 그녀의 성격으로 봤을 때 남자머리 올리는 거 혼자서 공부하느라 애 썼을 거다. 근데 전남친 그 새끼는 그걸 몰라줬겠지. 표현을 안 한 한지우에게도 잘못이 있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뻔한 거다.
소위 말하는 츤데레 스타일이라는 건가.
이럴 땐 남들이 몰라주는 자신의 노고를 공감만 해주면 된다.
“고생이 많으셨네요. 여자가 남자 스타일링하는 걸 경험해볼 일이 없을텐데.”
흠칫. 머리 만지던 손을 멈춘다. 잠시 후에 다시 내 옆머리를 만지는데 손길이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진다.
나는 멈추지 않고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지우쌤은 되게 다정한거 같아요.”
“네?”
“그렇잖아요. 생전 처음 보는 신입 머리도 만져주고 남자친구 출근할 때 머리 만져주는 여자가 어딨어요.”
“크흠. 뭐, 그렇죠. 궁색맞게 전남친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긴한데.”
“하하. 저는 아직 여자친구 사귄 적도 없는데요, 뭘. 저보단 훨씬 나으시네.”
“어? 기준쌤 모쏠이에요?”
“남중, 남고에 공대, 군대 테크를 타다보니 제대하니까 이 지경이 됐네요.”
전부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성기준으로써 25살에 눈을 떴으니까.
“근데 그걸 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네요? 다른 사람들은 모쏠인거 숨기려고 애쓰던데.”
“사실인걸 숨겨서 뭐해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늦을 뿐이지 평생 연애 못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물론 현실은 모쏠일 뿐이긴 하지만요.”
한지우는 내 마지막 말에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피식했다. 웃는 얼굴은 처음 본다. 확실히 예쁘긴 하네.
“이따 회식 때 더 얘기해요. 전남친이고 모쏠이고 뭐고 감출 필요 없잖아요?”
“뭐, 그건 그렇네요. 아, 그리고 아까 있었던 일은... 제시카쌤이랑 아까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음식이 좀 잘못 된거 같아요. 다음엔 그 식당 안 가야겠다...”
“어쩐지 두분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시던데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네... 그리고 아까 고마웠어요. 무릎...”
수줍게 고맙다는 말을 꺼내는 한지우. 아무래도 고맙다는 말을 평소에 잘 해보지 않은 모양이다. 엄청 부자연스럽네.
쓰러질 때 무릎 베개 해준걸 말하는 건가. 물론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하이라이트였지.
“다 됐어요.”
“오오. 괜찮은데요? 볼륨도 살아있고 간지 철철. 이대로 홍대 가면 여자들 다 꼬시겠는데요?”
“풉.”
“왜 웃어요? 너무하시네.”
“푸흐... 죄송해요. 자애심이 엄청 강하다 싶어서.”
나도 같이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지우쌤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고 생각하는건 아니죠?”
“아니에요. 홍대에 가보면 알겠죠.”
“와. 진짜 잔인하다. 확인사살이에요? 아니, 원래 이쯤되면 그냥 멋있다고 한번 해줄수 있는거 아닌가요?”
나는 농담을 치면서 나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는 시늉을 했다.
아. 한지우가 만져준 머리인데 살짝 엉클어졌겠다.
그런데 한지우가 손을 쭉 뻗어서 내 뒷머리를 다시 가지런하게 만져줬다. 덕분에 나와 한지우 사이의 거리가 꽤 가까워졌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연신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있는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느낌이다.
“기준쌤은 첫인상보다 괜찮은 사람 같네요.”
“첫인상이 곱등이 정도였던건 아니겠죠?”
“에이. 그건 아니에요. 자, 가요. 팀장님 기다리시겠다.”
“헉. 시간이... 생각보다 엄청 오래걸렸네요.”
“팀장님한테 전화 되게 많이 와 있었네요. 빨리 오라고 하시네. 달려요, 기준쌤.”
“넵!”
한지우가 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뒤를 쫒았다. 그녀는 주차장으로 날 데려갔다. 차가 있는 모양이다.
“술 마실거라 센터에 주차해놓고 내일 와서 가져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
오토바이?
어쩐지 라이딩 자켓을 입고 왔더라니. 그녀는 안장을 열어 안에서 오토바이 헬멧 두개를 꺼내서 하나는 내게 건넸다.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탄 한지우가 엄지손가락으로 뒷자리를 까딱 가리켰다.
“뒤에 타요. 최대한 빨리 가야해요. 팀장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죠.”
“어, 어... 네, 네!”
얼떨결에 한지우의 뒤에 올라탔다. 그러자 오토바이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부아앙
“허리.”
“네?”
“꽉 잡으라고요.”
나는 한지우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워낙 잘록한 허리인데 오토바이 진동에도 떨리지 않고 강인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코어근육이 발달된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한지우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고 오토바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리릭
그리고 출발. 몸이 한순간 뒤로 젖혀졌다가 앞으로 돌진했다. 허리를 끌어안 듯 해서 헬멧까지 그녀에게 기대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조금 떨어져있었으면 자칫 부딪칠 뻔했다.
나는 무지막지한 스피드 때문에 한 마리의 코알라가 된 기분이었다. 헬멧 밑으로 한지우가 쓰는 샴푸 냄새가 스며들어와 기분이 좋아졌다.
한지우는 가속을 붙여서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선형 주차장인데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스피드를 즐기는 여자였다.
도로로 진입하고서는 더욱 빨라졌다.
마치 매트릭스의 트리니티를 연상케 하는 신들린 커브와 방향전환. 나는 한지우의 허리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아야만 했다. 내가 백허그를 세게 하자 한지우의 몸통이 한 차례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백허그에 긴장한 걸까.
그러다 어느 순간 속도가 줄기 시작했고 어느 골목에서 정차했다.
“내려요. 도착했으니까.”
벌써?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다니는 먹자골목이다.
“저기, 근데 이 손... 언제 놓을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허리의 촉감이 너무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헬멧을 벗자 어디선가 제시카가 도도도 달려나와 우릴 반겼다.
“우아! 우아! 이거 뭐야. 지우쌤 애마야? 나는, 나는, 나는 왜 안 태워줘요? 제시카도 타보고 싶어요!”
“다음에 태워드릴게요.”
한지우가 헬멧을 벗으면서 손으로 자기 단발머리를 한 차례 들었다 내린다. 찰랑거리면서 헝클어졌던 머릿결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무슨 영화의 연출처럼 그녀의 머리 위쪽에 달이 걸려있었다.
“멋져... 지우쌤 완전 섹시해요. 나랑 사귀어주세요.”
어째 내 속마음을 그대로 읊어대는 제시카다. 연신 꺄꺄거리면서 오토바이와 한지우를 번갈아 찬양한다. 하긴 저런 스타일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긴 하다. 영락없는 걸크러쉬니까.
“가시죠. 팀장님 기다리겠네요. 자리 어디에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요. 기준쌤도 어여 들어오시구랴~”
제시카는 이미 소주 대여섯병 마신 것 같은 텐션으로 우릴 안내했다. 그래봐야 그냥 양꼬치집인데 말이다.
양꼬치집은 2층에 위치한 아주 평범한 식당 느낌이었다.
창가쪽 자리. 최지아는 창문 밖을 우수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핑크색 머릿결에 달빛이 비쳐 부셔졌다.
테이블은 가운데 특유의 회전 불판이 있고 양쪽에서 집어먹기 편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양꼬치 뿐만 아니라 새우구이, 김치말이국수도 시켜놨다.
“여기가 팀장님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던 그 양꼬치집! 팀장님! 두분 오셨어요. 헤헤.”
“앉으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팀장님. 근데 소주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정말 놀랍게도 저랑 제시카쌤 딱 한잔씩만 마셨어요. 제시카쌤은 원래 분위기에 취하시는 편이라.”
“아.”
제시카는 무슨 강아지마냥 발발거리면서 이 말 했다가 저 말 하면서 미친듯한 텐션을 유지했다. ADHD. 딱 그 증상 그대로다. 근데 이런 여자가 예쁘면 뭐다? 다 용서가 된다. 그치만 빈유. 격하게 빈유.
“여기 사장님. 중국인이래요.”
마침 사장님이 불판을 확인하기 위해 테이블을 돌고 있었다.
“아, 사장님! 진짜 중국분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흔 카오 싱 따오니. 워슈 쭝권. 짜이 쭝구 슝굴런 싼닌.”
“아, 정말요? 발음이 엄청 좋으시네요.”
“셰셰. 워 치에 쭝권. 워 후이 부쉬 라치에시.”
“오시면 말동무 되어 드릴게요. 중국어 할줄 아는 사람 찾기 쉽지 않아요. 특히나 이렇게 예쁘신 분은 처음이네요.”
“셰셰. 히힛!”
“와. 제시카쌤 중국어도 할줄 알아요? 저번에 영어도 엄청 잘하던데.”
“뭐라고 한 거예요?”
“중국에서 3년 살았다고 얘기했고... 가끔 와서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 3개 국어 할줄 알아욤. 영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배우고 있어요!”
허당인줄 알았는데 반전 매력에 놀랐다. 미국에서 살다와서 한국어 발음이 서툴다는 느낌이었지. 3개 국어를 할줄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중국어 특유의 강한 악센트가 나올때마다 상체를 들었다 내려놓는 게 상당히 귀여웠다.
그런데 여전히 사차원 매력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제시카가 발그레한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기준쌤은 여자친구 있어요?”
“없습니다.”
“와! 대박사건. 대박사건! 근데요, 팀장님. 이번달 저희 타겟 너무 높은거 아니에요? 사장님이 미치셨어요. 여기 간판에도 써있던데.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근데 우리 사장님두... 다른 의미로다가. 힝.”
이 여자 술 먹이지마! 미친 여자가 무슨 이렇게 말이 많아. 아니 말 많은건 둘째치고 주제가 어째 18초마다 바뀌냐.
자기 잔에 술을 따르려는 제시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여섯 개의 손이 테이블을 지나 제시카를 저지했다.
“아, 왜요. 왜. 제시카 술 마실거얌.”
“제시카쌤~ 그만~ 천천히 마시게요. 너무 빨라요. 양꼬치도 아직 안 익었잖아.”
최지아가 말하자 제시카는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다소곳해졌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크크. 귀엽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제시카를 바라봤다. 최지아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제시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주기도 했다.
다행히도 제시카 덕분에 분위기가 빠르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자리를 가볍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사람들도 제시카가 마신 1병을 맞춰주기 위해 잔이 빨리 돌았고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두런두런 BD짐에 대한 얘기도 나누면서 근황 얘기도 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운동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양꼬치가 회전 불판에 자동으로 돌면서 익어가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한손에 젓가락을 움켜잡고 테이블을 통통 두드리며 양꼬치가 익기를 기다렸다가 최지아가 하나 챙겨주자 주저없이 먹기 바빴다.
한지우는 다소곳하게 앉아서 우아하게 양꼬치를 집어먹었고 최지아는 먹성이 좋은지 김치말이국수를 흡입하듯 먹었다.
“캬. 난 여기 김치말이국수가 맛있더라고요. 특히 국물이 맛있어. 전 탄수화물충이라 고기보다 밥이나 면을 더 사랑해요. 기준쌤도 좀 드세요. 덜어드릴까요?”
“감사합니다.”
대체 저 몸매는 어떻게 유지하는 걸까. 새삼 운동의 효과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일주일에 하루 빼고는 완벽하게 식단을 유지한다고 한다.
제시카는 뭐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오자 또 시동을 걸었다.
“기준쌤. 기준쌤. 첫 출근했는데 분위기 어떤거 같아요?”
“아참. 그걸 안 물어봤네.”
한지우도 내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전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만 바라봤다.
아, 존나 행복하다. 얼굴 존나 예쁜 세 여자가 취기 조금 올라서 발그레한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다. 딱 이 상태에서 다 벌거벗고 있으면 금상첨화겠네. 제시카는 검스만 남겨놓고.
근데 다른 누군가가 우리 테이블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엄청난 행운아 정도로 생각할까? 연예인급 한명. 탈일반인 두명. 헬스장에서도 엄청 인기 많았던 트레이너 삼인방이다.
나는 벨라에게 오늘밤 이 세 명 중에 하나와 반드시 섹스하겠다고 선언했었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여섯 개의 눈. 마음 속에는 이미 한 여자를 정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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