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599화 (599/599)

〈 599화 〉 [뜻 밖의 상황]

* * *

‘밤인가?’

현실로 돌아온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해봤다. 새벽 2시였다. 늦은 시간이었던 만큼 집 안은 어두웠다. 스마트폰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이 유일하게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나는 거실 쪽을 바라봤다. 혹시 서연이 누나가 미련하게 날 기다린다고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진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파 쪽으로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누나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불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나는 서연이 누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다음에 안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문을 열고 침대 위에 눕혀줄 때까지 누나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잤다.

설마 내가 없던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면서 기다렸던 걸까? 슬쩍 손을 뻗어서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자, 평소하곤 다르게 살짝 푸석한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심지어 눈 밑도 거뭇거뭇해보였다.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몰려든 나는 이프리의 유물, 지팡이를 소환해서 소생의 빛을 사용해줬다.

“으음…….”

따스한 빛이 누나의 몸을 감싸자, 원래 내가 알고 있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곧고 길게 뻗은 눈썹, 고집 있어 보이는 눈초리, 붉은빛을 머금은 작은 입술, 곤히 자고 있는 게 무척이나 예뻤다.

나는 누나의 이마를 한 차례 손으로 쓸어넘긴 다음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줬다.

‘일단 누나는 좀 재워두고.’

탑 쪽을 은혜한테 맡기긴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 가장 좋은 건 내가 멸망한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멸망한 세계를 구원하는 것으로 현실의 멸망한 세계의 탑이 사라진다면, 그게 가장 베스트니까.’

저번에는 요리를 못한다는 이유로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알마한테 직접 요리를 배운데다가 나한테는 시스템의 힘이 있기까지 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멸망한 세계를 구원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나는 지체하지 않고 네를 눌러서 멸망한 세계에 진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이전에 한 번 봤던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보쇼! 김 유현 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얼른 일어나십쇼!”

그리고 뒤이어 나를 깨우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고막이 먹먹해질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나는 한 손으로 귀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고, 이런 내 모습을 본 남자가 쯧쯧 혀를 차며 자기가 잡아 온 사슴을 바닥에 내려놨다.

“요리사라는 양반이 팔자도 참 좋지. 쯧쯧, 계속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간 분명 용사님께서 경을 치실 겁니다. 아무튼, 이건 방금 잡아 온 사슴이고.”

[사슴 (적록, Red deer)]

신선도 : 99%

상품 가치 : 중

평가 : 수컷 사슴이기에 근육이 많고 고기가 매우 질긴 편이다. 노린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향신료를 첨가해서 요리할 필요가 있다. 뿔의 끝이 마치 왕관처럼 돋아 있어서 뿔만큼은 관상용으로서 가치가 매우 높으나 요리에는 전혀 쓸 수 없다.

남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사슴을 바라보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이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향신료는 레나 씨가 가져다주는 겁니까?”

“응? 나 말고 누가 먼저 이야기해준 거요?”

“아뇨,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하긴 뭐……. 여자라곤 용사님하고 레나 밖에 없으니. 아아, 교단 쪽 아가씨도 있던가? 아무튼, 레나가 향신료를 가져다줄 거니, 나는 이만 가보겠소.”

턱을 쓰다듬으며 용사 파티의 구성원을 떠올려보던 남자는 이윽고 전부 다 귀찮아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사슴을 잡아야 했던 만큼,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겠다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좋아, 전부 다 똑같네.’

이전에 겪었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완벽하게 똑같은 걸 확인한 나는 다음으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포기 버튼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보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이것도 문제없고.’

변수가 될 게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근처에 놓여있는 도축용 칼을 꺼내든 다음에 레나의 도축을 적용했다.

[레나의 도축(LV6) 과정을 참고합니다.]

눈앞에 안내 문구가 떠오름과 동시에 사슴의 몸에 붉은색 실선이 그어졌다. 이를 확인한 나는 어설프게나마 사슴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기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긴 했지만, 실선이 그어져 있는 부분만 가르고 잘라내기만 하면 되었기에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시스템이 사기긴 해.’

만약에 시스템의 힘 없이 나 혼자서 도축을 진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사슴이 먹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사슴의 사체를 들어서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나는 여기서 마법을 써서 피를 빨리 뽑았었지.’

하지만 나는 마법을 쓸 줄 모르니, 한동안 기다려야 할 듯 싶었다. 나는 사슴의 피를 빼는 동안, 요리할 때 쓸 주방 식기들을 꺼냈다. 그리고 겸사겸사 식재료도 손질했다.

“아,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이처럼 식재료를 손질하고 있을 때, 나무줄기를 엮어서 만들 거로 보이는 바구니를 든 여성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바구니 안에는 갖가지 향신료와 열매가 들어있었다. 이 또한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근데 말하는 게 달라졌네?’

전에는 내가 사슴을 두고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걸까? 나는 그녀가 내미는 바구니를 건네받은 다음에 살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면 사슴의 피를 빼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흐음, 그걸로 충분해요?”

레나가 살짝 콧소리를 섞으며 나를 유혹하듯 바라봤다. 끈적끈적한 욕망이 느껴졌다. 이전과 확연하게 다른 그녀의 태도에 살짝 당황하려는 찰나, 내 외모가 달라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생겨졌다는 게, 영 적응되지 않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정말로요? 뭐……. 일단, 알았어요.”

내가 딱 선을 그으며 말하자, 레나도 더 이상 나를 보채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인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끈적했다. 나는 이런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마저 식재료를 다듬었다.

“영역 한정, 가속.”

사슴 앞에 선 레나가 마법을 사용하자, 사슴의 사체가 놓여있던 장소만 녹색으로 빛나더니 주르륵하고 남아있던 피가 바닥에 스며들었다. 이를 확인한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실선을 따라 마저 도축하기 시작했다.

“제가 뭐 더 도와줄 건 없어요?”

“나머지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레나 씨도 피곤하실 텐데, 어디 가서 한숨 자고 오세요.”

“고작 이 정도 가지고 피곤하긴요. 하나도 안 피곤하니까, 그냥 여기서 구경 좀 할게요. 구경하는 건 괜찮죠?”

“구경하는 거라면 뭐……. 상관없습니다.”

레아는 정말로 구경을 할 생각인 모양인지, 근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굳이 내쫓을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묵묵히 도축 작업을 이어나갔다.

[레나의 도축(LV6)을 따라함으로써 약간 이해했습니다.]

[도축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도축자 레벨이 상승합니다.]

도축을 성공적으로 끝마치자, 도축자 레벨이 상승했다. 물론 상승했다고 해봤자 1에서 2로 상승한 것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이 정도로 충분히 감지덕지했다.

‘레나가 도축하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면, 이마저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니까.’

휴, 하고 참았던 숨을 토해낸 나는 도축한 고기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스튜부터 시작해서 고기구이까지. 그리고 여기에 곁들여 먹을 샐러드도 만들었다. 맛과 향이 각각 6점을 기록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용사도 큰 불만 없이 먹어줄 게 틀림없었다.

나는 완성된 요리를 차례대로 식탁 위에 올려두고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깡깡!

국자로 냄비를 두드리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야, 냄새 좋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이거 좀 봐라.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어.”

“새끼, 엄살은. 얼른 먹기나 하자.”

익숙한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식탁 주변에 둘러앉고, 모두가 용사 세르니아 천막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나를 깨우고 사슴을 툭 던져주고 갔던 남자가 나타나선 입을 열었다.

“용사님은 따로 식사를 하신댄다. 그리고 그 뭐냐……. 되도록 아침 먹지 말라던데? 후회한다고.”

“그게 뭔 소리야?”

“나도 몰라. 암튼 냄새 하나는 죽이네. 다들 얼른 먹자고!”

남자가 자리에 앉으며 스튜를 한 입 떠먹자, 다른 사람들도 숟가락을 들어서 양껏 떠먹기 시작했다. 반면에 나는 방금 전, 남자가 한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용사가 다른 행동을 했다고?’

심지어 마치 이전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남자한테 충고를 해주기까지 했다.

‘설마……. 용사도 회귀한 건가?’

회귀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나한테 있어서 엄청난 희소식이기도 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는데?’

무얼 더 고민할까? 나는 당장 용사 세르니아에게 줄 아침 식사를 따로 챙긴 다음에 그녀의 천막으로 향했다.

“용사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천막 앞에 선 다음에 입을 열자, 안쪽에서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

단호한 대답이긴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부탁했다.

“한 숟가락만이라도 좋습니다. 딱 한 숟가락만 드셔주신다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쓸데없이 화를 자초하는군.”

천막 안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천막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그녀의 앞에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음……?”

세르니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내려다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스튜에서 풍겨오는 냄새부터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의심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어서 한 입 먹었다.

“…….”

꿀꺽, 소리와 함께 세르니아가 스튜를 삼킨 순간 그녀가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넌 누구지?”

“용사님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겁니다.”

“뭐……?”

“저도 용사님처럼 회……. 읍!”

나도 그녀처럼 회귀를 한다고 밝히려는 순간, 세르니아가 화들짝 놀라며 내 입을 강제로 막았다. 그리곤 눈을 사납게 치켜들며 소리치듯이 나를 타일렀다.

“지금 제정신인가? 그걸 입에 담으려고 하다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셈인가?”

“……?”

그녀의 말에 내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짓자, 세르니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설마 모르는 건가? 아니면……. 하아, 그래. 나도 처음에는 이랬지. 좋아, 한번 말해봐라. 이런 건, 직접 경험해보는 게 가장 빠를테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직접 경험해보라니요?”

“방금 전, 네가 나한테 하려던 말을 해보란 거다.”

“제가 회귀한다는 걸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지금 네가 한 말 때문에……. 응?”

내가 회귀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순간, 세르니아가 천막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마치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하던 그녀가 돌연 의문을 표시하며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뭐지? 설마 이제 와서 마신의 저주가 풀렸다고? 그럴 리가…….”

“마신의 저주?”

“그래. 여신님이 내게 회귀의 축복을 내려주셨고, 마신은 나한테 비밀의 저주를.”

툭.

나한테 자신에게 걸려있는 회귀의 기원을 설명해주던 용사가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쓰러졌다. 이에 깜짝 놀란 내가 세르니아를 안아 들자,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용사의 사망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3일 뒤에 다시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용사의 사망을 알리는 알림 문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