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8화 〉 [뜻 밖의 상황]
* * *
도시 안은 보이는 그대로 고블린들의 소굴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기어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많은 숫자의 고블린들이 도시 내를 배회하고 있었다. 미처 도시 밖으로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이 고블린을 피해 도망치거나 숨어있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냄새에 민감한 녀석들은 여기서도 코를 벌름거리며 숨은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발견된 사람들은 놈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겨 죽거나 무참히 능욕당해야만 했다. 병사들도 딱히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형, 어떻게 하죠?”
진호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고블린들을 처리하면서 숙소 건물까지 간다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설혹 만의 하나, 운이 좋아서 숙소 건물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건물 안의 사람들이 고블린들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숙소 건물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고블린들과 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뭐라 해도, 그들에겐 시스템의 힘이 있었다. 게다가 남자들과 몇몇 여자들은 전투에 특화된 적성을 받기까지 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괴물들을 최대한 피해서 가보자.”
“네, 그러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굳히는 진호의 태도에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포기하고 돌아가자는 말은 안 하는 거야?”
“제가 여기서 돌아가자고 말해도 형은 안 돌아갈 거잖아요. 그리고 전 포기를 배추 셀 때밖에 안 써요.”
“실없긴.”
“그만큼 제가 형을 믿는다는 소리죠.”
이런 상황에서도 우스갯소리를 하는 진호의 태도가 살짝 어이없긴 했지만, 그래도 잔뜩 쫄아서 패닉에 빠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나는 진호의 등을 한 차례 토닥여주고는 고블린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서 움직인다고 한들, 완벽하게 피해 다닐 수만은 없었다. 특히나 녀석들의 이상할 정도로 민감한 후각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케르륵! 켁!”
푸욱!
고블린의 눈에 띈 나는 빠르게 앞으로 뛰쳐나가선 창으로 놈의 목을 꿰뚫었다. 그리고 남은 고블린들을 좁은 골목길로 유인한 뒤에 진호와 함께 차근차근 처치했다. 수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긴 했지만, 높은 체력 덕분에 오랫동안 싸우더라도 쉽게 지치지 않았다. 더구나 진호도 적성을 얻으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기에 고블린 두세 마리쯤은 혼자서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었다.
“후우, 이거 생각보다 할만한데요? 확실히 스킬이 있고, 없고 차이가 크네요.”
고블린들을 모두 처리한 후, 진호가 자신감이 부쩍 붙은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숙소 건물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고블린들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성을 얻기 전과 얻은 후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면, 충분히 자기들만의 힘만으로도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하면 오염된 괴물도…….’
아니, 그건 너무 큰 기대려나? 하지만 이게 아주 근거가 없는 허황된 생각인 건 아닌 게, 일단 숙소 건물에는 네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2층으로 올라가서 좁은 계단에서 고블린들을 상대한다면, 놈들이 얼마나 몰려오든 간에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해볼 만할지도.’
이렇듯 적성의 가능성을 엿본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희망적인 관측을 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진호가 고블린들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 이 정도면 저기 있는 사람들을 구하면서 가도 되지 않을까요?”
앞선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덕분인지, 진호가 제법 호기롭게 말했다.
영웅 심리라도 생긴 걸까? 물론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당장 눈앞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못 본 척하고 지나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테니 말이다. 더구나 자기한테 그 사람을 구하고도 남을만큼 충분한 힘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저 사람들을 모두 구하려고 한다면 분명 그만큼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게 틀림없었다.
“아니, 지금은 숙소부터 가보자. 물론 네 말대로 여기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만약에 그것 때문에 제때 숙소에 도착하지 못해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안 그래?”
“아……. 하긴, 그렇네요.”
“그럼 얼른 가자. 다른 괴물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나는 아쉬워하는 진호를 다독여주고는 고블린들의 눈을 피해서 계속 움직였다. 중간에 몇 번 더 고블린들에게 발견되어서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그때마다 수월하게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도시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고블린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뭐지?’
대신 파괴된 건물과 녹색 점액질에 뒤덮인 채 죽어있는 시체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점액질에 닿아있는 모든 게, 치익 소리를 내며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는 거로 보아서 약간의 산성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슬라임 같은 게 아닐까 의심을 해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멸망한 세계의 탑 2층에 진입해서 지금까지 본 마물은 고블린이 유일했다. 그래서 당연히 오염된 괴물도 고블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광경을 보고 나니 어쩌면 고블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염되었다는 형용사가 붙은 만큼 고블린의 외형이 기괴한 형태로 비틀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거리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건데 그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직감 같은 거라고 봐도 좋았다.
이건 단순히 고블린 따위가 아니다. 훨씬 더 위험한 무언가였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숙소 건물에 다다랐을 때쯤.
콰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건물 한쪽 벽면이 허물어지더니, 화염에 뒤덮인 무언가가 우리 앞에 떨어졌다.
“뭐, 뭐야?”
깜짝 놀란 진호가 창을 높이 치켜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끼에엑! 끼엑!”
동시에 화염에 둘러싸인 무언가가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불을 끄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터트렸다.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기괴하고 섬뜩한 비명이었다.
“거기, 다치기 싫으면 당장 비켜요!”
이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 이번엔 숙소 건물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붉게 물든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유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오롯이 괴물을 노려보며 부서진 건물의 외벽 너머로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리곤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자.
화륵!
유은혜의 오른손이 붉게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지체없이 진호를 데리고 뒤로 쭉 빠졌다.
“끼에에엑!”
불길에 휩싸여 있던 괴물도 은혜의 손에 붙어있는 불을 보곤 기겁하듯 또다시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겁에 질린 듯 도망치려고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은혜는 놈을 이대로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서 주먹에 붙어있던 불꽃을 쏘았다.
콰앙!
직선으로 곧게 뻗은 불꽃은, 이내 곧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괴물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다.
[축하합니다!]
[C 구역의 오염된 괴물을 처치했습니다.]
[최대 공헌자는 ‘유은혜’입니다.]
[공헌도에 따른 보상을 지급합니다.]
[공헌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 시간부로 D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1분 뒤에 강제로 이동됩니다.]
역시나 은혜였다. 대체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걸까?
‘설마…….’
한 가지 가능성.
그건 바로 그녀가 자신의 구역에 존재하는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고 C 구역까지 넘어온 경우였다. 그리고 방금 막 경험한 그녀의 강함을 떠올려 본다면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유은혜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런 내 시선을 느낀 듯, 자신의 눈앞에 뜬 알림창을 확인하던 그녀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혀, 현이 오빠?”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음, 안녕?”
“현이 오빠!”
내가 손을 들어서 인사하기가 무섭게, 은혜가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두 번 다신 날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억세게 내 몸을 끌어안은 채,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계속, 계속 찾아다녔는데!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 믿고 있었는데!”
횡설수설하며 나를 붙잡고 흔드는 은혜의 태도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진정시켜주었다.
“일단 여기엔 말 못 할 사정이…….”
“무슨 사정이요? 난 오빠 때문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었는데……. 흐윽, 저만 아니라 윤이도 오빠를 엄청 찾았다고요.”
“그래…….”
“이따가 D 구역으로 넘어가면, 그때 윤이하고 셋이서 다 같이 이야기해요. 알았죠? 오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엄청 많으니까……. 그리고 묻고 싶은 것도.”
1층을 클리어한 다음에 현실에서 나를 계속 찾고 있었던 만큼 분명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명을 쓰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로 대답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D 구역으로 넘어가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는 듯 싶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은혜라면 날 대신해서 2층의 모든 구역에 존재하는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보다도 강할지도 모르겠는데.’
기만자라는 애매한 적성을 받은 나하곤 다르게, 은혜는 제대로 된 적성을 받은 듯 싶으니 말이다.
‘내가 은혜를 너무 과소평가했네.’
속으로 웃음을 삼킨 나는 대견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은혜야, 그건 안 될 것 같아.”
“오, 오빠?”
“그래도 이렇게나마 얼굴을 보게 되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지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왜 곧바로 헤어질 것처럼 말하는데요!”
불안감을 느낀 듯, 은혜가 내 팔을 더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소리쳤다.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왜 또 헤어져야 하는 거냐며 따지는 것만 같았다.
“은혜야…….”
“아직 오빠하고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는데! 아, 안 돼! 오빠, D 구역으로 넘어오는 거죠? 안 된다고 하지 말아요! 하지……!”
어느새 1분이 다 된 모양인지, 은혜의 몸이 먼저 빛으로 화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못 넘어오는 거예요?”
“그렇게 됐다. 진호야, 네가 날 대신해서 애들 좀 챙겨줘. 특히 수진이를……. 수진이를 부탁할게. 알았지?”
“아니, 전 지금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뒤이어서 진호도 빛으로 변해서 사라졌다. 분명 D 구역으로 넘어간 거겠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넘어가는 걸 보면, 아마도 행운의 영향인 듯 싶었다. 확실히 운이 좋다는 건, 여러모로 편리했다.
나는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스마트폰을 꺼낸 다음에 멸망한 세계의 탑에서 퇴장했다.
[멸망한 세계의 탑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탑 쪽은 은혜한테 맡기고.’
아무래도 나는 멸망한 세계 쪽에 집중해야 할 듯 싶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네를 눌러서 현실로 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