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2화 〉 [뜻 밖의 상황]
* * *
남자들의 입장이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나 역시도 남녀 역전 세계라는 상황에 마음이 혹했었으니까. 하지만 싸울 의지 자체를 잃어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마도 이건 단순히 성욕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부담이 너무 컸던 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가족도, 친구도 뭣도 아니었다. 물론 진호나 다은이, 진하처럼 애초부터 친구였던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대부분은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저 우연히 멸망한 세계의 탑에 휘말려서 이곳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한테만 희생을 강요했던 건, 조금 가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은 여자들한테 굳이 잘 보일 이유도 없어졌으니.’
당장 하일과 석현만 봐도 그랬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를 내며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을 설득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실제로 아까부터 대화가 쳇바퀴를 돌 듯이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럽시다.”
내 말에 동의한 건, 강석이었다. 그도 이제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은 모양인지, 다른 남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협조 덕분에 남자들도 더 이상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다만, 진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에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귓속말했다.
“우리끼리 떠들어 봐야 입만 아플 뿐이야.”
“하지만…….”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내일.”
진호가 조금 기운이 빠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확실히 이건 우리끼리 백날 떠들어봤자, 해결될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모두가 모여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진호를 진정시킨 다음에 그를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남자들은 바람을 좀 쐬고 가겠다며 잠깐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내일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상의를 하려는 듯했다. 이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말았다. 미운털이 박혔다고 해야 하려나? 뭐, 상관은 없지만.
‘차라리 잘 된 걸지도.’
괜히 정이 들었다간 나중에 헤어질 때,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게다가 죽었을 때도……. 뒷맛이 씁쓸한 건, 되도록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똑똑.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어? 너 왔어?”
“윽, 냄새…….”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지독한 악취가 풍겨져 나왔다. 이에 진호가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코를 붙잡자, 다은이가 얼굴을 확 붉히며 소리치듯이 윽박질렀다.
“나한테 나는 거 아니거든!”
“누가 뭐래?”
“니가 날 그렇게 봤잖아.”
“내가 언제? 안 봤거든?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거든?”
언제나 그랬듯이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서로 으르렁대는 두 남녀의 태도에 나는 쓰게 웃으며 둘을 진정시켰다.
“거기까지 싸우고,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이리 말하며 진호의 등을 떠민 나는 다은이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 위에 앉아있는 수진이와 옆에 서있는 진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진호는 언제 눈살을 찌푸렸냐는 듯, 헤벨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돌아왔어.”
“힘들진 않았어? 앉을래?”
“하하, 힘들긴! 하나도 안 힘들어. 아, 맞아. 내가 도시 외곽에서 뭘 발견했는지 알아?”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 진호는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처럼 도시 외곽에 둘러쳐져 있는 투명한 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이야기에 다은이와 진하가 놀랍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진짜로 갇힌 거네.”
“그러게. 하아, 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되는 건지…….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다은이의 푸념에 진하와 수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했다.
아마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호는 여자들의 반응을 잠시 살펴보다가 1층에서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랑 말싸움을 했어.”
“뭐? 말싸움? 왜?”
“밖으로 나가는 거 말이야. 다들 아예 여기서 눌러살고 싶어 하더라고.”
“미쳤어? 여기서 계속 살자고?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야?”
“현이 형이랑 나 빼고 다른 남자들 전부 다.”
“…….”
진호의 말에 다은이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나와 진호를 뺀 다른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는 여기가 남녀 역전 세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더불어 남자들이 경비대 건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낯뜨거운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나는 최대한 납득이 가능한 선에서 남자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그냥 무작정 여기서 지내자는 건 아니야. 다른 구역에서 사람들이 넘어오면 그 때, 다 함께 힘을 합쳐서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자고 하더라고. 그리고 애초에 우리가 여기서 탈출한다고 한들, 어차피 언젠가 다시 3층으로 불려가잖아? 그러니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뿐이야.”
“다른 구역의 사람들이 언제 넘어올 줄 알고요? 그리고 여기가 안전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우리가 여기서 지낸 지 이틀 정도 밖에 안 됐는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여기가 정말로 안전한 거 같아요?”
“일단 겉보기엔 안전해 보이지. 적어도 통로에 있을 때보단 낫잖아.”
통로보단 안전하다는 말에 다은이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닌 모양인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지만……. 하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정말로 다른 구역에서 사람들이 넘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다은이,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역으로 되묻자, 다은이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가고, 깊게 고심하는 듯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는 이윽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저는…….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오염된 괴물인가 뭔가를 찾아볼래요. 애초에 다른 구역도 우리하고 비슷한 처지일 텐데, 도움을 바라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상황이 안 좋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 지금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우리가 오염된 괴물을 처치해서 다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은이의 의견에 동의하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호와 진하도 고개를 빼꼼 내밀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래, 말 한번 잘했다. 현이 형! 그냥 우리끼리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죠?”
“저도 도와드릴게요.”
둘의 말에 다은이가 더더욱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애들아…….’라고 중얼거렸다. 이에 나는 애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슬쩍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시울을 붉히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한수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죽은 언니, 오빠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수진이한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때? 내일 걸을 수 있겠어?”
“네? 아, 그게……. 많이 좋아졌어요. 약을 바른 덕분에 아픈 것도 많이 없어졌고요.”
“그래? 그거 다행이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얻은 적성이 네크로멘서라고 했지? 혹시 괜찮다면 네가 얻는 스킬 좀 알려줄래? 내일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알아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스킬이요? 네, 괜찮아요. 잠시만요……. 어, 그러니까……. 시체 되살리기랑 망자 친화력 그리고 스켈레톤 제작술. 이렇게 세 개 있어요.”
내 부탁에 수진이가 허공에 몇 번 손짓하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좀 더 자세히 알려줘 볼래?”
“여기에 적혀있는 대로 읽어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래.”
“음, 일단 시체 되살리기는…….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지 않을 경우, 망자의 상태도 되살려낼 수 있다고 적혀있어요. 그리고 망자 친화력은 사용자를 망자와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준다고 적혀있는데, 친화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시체처럼 변한다고……. 아, 혹시 이거 때문에 제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걸까요?”
스킬의 설명을 읽어주던 수진이가 움찔 몸을 떨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아마 그녀의 추측대로, 망자 친화력이란 스킬 때문에 그녀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나는 게 분명했다. 확실히 지금 우리가 맡고 있는 냄새가 시체가 부패하면서 나오는 악취와 비슷하긴 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해결할 방법은 없겠죠?”
“나중에 생기길 바라야겠지.”
내 말에 수진이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은이와 진하도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사람의 몸에서 24시간 내내 악취가 난다는 건, 그다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수진이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의 여자애한테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