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1화 〉 [뜻 밖의 상황]
* * *
“전화위복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요.”
손하일이 웃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박석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요. 어제는 진짜 하루 종일 막막하기만 했는데……. 형, 혹시 이거 꿈은 아니죠? 제 뺨 좀 꼬집어 주실래요?”
“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다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 돈이면 당분간 걱정 없이 지내도 될 것 같은데, 다들 내일 어쩌실 거예요?”
“내일 뭐 어쩌긴. 일해야지. 그리고 현이 형님이 경비 대장한테 빌렸던 돈도 있잖아. 그거 갚고 나면 빠듯할 걸?”
“에이, 그렇게 많이 빌리지도 않았잖아요. 하일이 형,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또 병사 누님들하고 놀려는 거죠?”
“놀긴 누가 놀았다고 그래? 크흠, 우린 어디까지나 일하고 온 거야.”
“흐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짧은 잡담을 끝으로 석현이 주머니의 입구를 풀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꽤 많은 양의 동전이 반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이 정도 양이라면 당분간 돈 걱정 없이 살아도 될 듯싶었다. 게다가 심지어 돈주머니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서 하일과 강석, 동은이 차례대로 돈주머니를 내놓자 탁자가 삐걱 소리를 내며 힘겨워했다.
‘진짜 많이 벌긴 했네.’
경비대에서 일급을 잘못 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호가 내놓은 돈의 양을 보고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동화 5개?’
앞선 네 사람들과는 다르게 진호는 동화 5개만 탁자 위에 올려놨다. 진호도 그게 살짝 민망했던 모양인지,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호가 왜 이렇게 적은 양의 돈을 내놓은 건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일급이란 거겠지.’
반면에 다른 남자들이 받아온 돈은 몸을 판 대가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확실히 성매매가 돈을 잘 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곳에선 합법이기까지 했다. 결코 더러운 돈이 아니었다.
‘호스트바 같은 거 하나 세우면 떼돈 벌겠는데?’
돈방석에 앉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돈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일 뿐, 우리한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돈주머니에서 시선을 떼어내는데, 진호가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왔다.
“현이 형.”
“응?”
“진하랑 다은이는 어디 있어요?”
아까부터 진하랑 다은이가 보이지 않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진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3층에서 수진이를 돌봐주고 있어.”
“수진이요? 아, 어제 구한 애요? 깨어난 거예요?”
“깨어났어. 근데 지금 가진 마. 상처에 약 발라주고 있으니까.”
깨어났다는 말에 진호가 놀라움을 드러내며 재차 물었다.
“괜찮대요?”
“일단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 이따가 같이 올라가 볼래? 한 10분 정도만 더 기다렸다가 올라가 보면 될 거 같은데?”
“그래요? 음, 그럼 일단 형한테 먼저 말할게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걸 보아하니, 순찰 도중에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뭔가 찾은 거야?”
“이걸 찾았다고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 제가 도시 외곽으로 순찰을 나갔던 건 아시죠? 아, 형은 모르시겠구나. 아무튼 제가 도시 외곽으로 순찰을 나갔었는데, 뭘 본 줄 아세요?”
“뭘 봤는데요?”
“투명한 벽이었어요. 그거 있잖아요. 만화에서 쳇, 결계인가! 할 때처럼 앞이 투명한 벽으로 막혔을 때요. 그거처럼 제 앞을 딱 가로막더라고요. 근데 신기하게 저랑 같이 순찰을 나갔던 병사는 벽을 그냥 막 통과하더라고요. 마치 저만 못 지나가게 막는 것처럼요.”
“혹시 다른 곳도 그랬어?”
“네, 대충 여기 도시를 중심으로 둥글게 벽이 쳐져 있는 것 같았어요.”
진호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동전 하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투명한 벽이라.’
나는 차라리 이게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투명한 벽 안에 갇혀있다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오염된 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 수색해야 하는 범위가 무한정 넓다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괴물은 우리와 같은 투명한 벽 안에 갇혀있었다.
“강석 씨도 알고 있어?”
“순찰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말했죠. 근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도요.”
“벽 자체가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 오염된 괴물은 어때? 찾았어?”
“아뇨, 딱히 괴물이라고 할 건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
“제가 보기엔 일단 여긴 안전한 거 같아요.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설마 오염된 괴물이 도시 안에 숨어있진 않겠죠?”
“그거야 모르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나는 강석을 바라봤다. 그는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평소보다 자주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동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다.
분위기가 밝아진 건, 분명 고무적인 일이긴 했지만 문제는 다들 여자한테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강석을 불렀다.
“강석 씨.”
“네? 아,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내일 도시 순찰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시 순찰이요?”
“네, 혹시라도 도시 안에 오염된 괴물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꼼꼼히 찾아봐 주시겠습니까? 다른 분들도요.”
도시 순찰을 부탁하자, 강석을 비롯한 다른 남자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주고받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저기……. 현이 씨.”
“네.”
“꼭 오염된 괴물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
“그게 그렇잖아요. 어차피 여기서 우리가 오염된 괴물을 찾아내서 죽이더라도 아직 다른 구역에 오염된 괴물이 많이 남아있는 데다가, 설혹 운이 좋게 전부 다 처치하더라도 2층 다음에는 3층이 있잖아요. 분명 3층은 여기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할 텐데,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강석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2층이 1층보다 어려웠듯이, 분명 3층도 2층보다 더 어려울 테니까. 위험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지내는 게 안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당장 오염된 괴물이라는 변수가 남아있는 이상,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어차피 우리가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지 않아도, 다른 구역에서 오염된 괴물을 처치한 사람들이 넘어올 겁니다.”
내가 딱 잘라서 말하자, 강석이 살짝 숨을 들이켜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현이 씨, 만약에요. 만약에 살아남은 게, 우리들 뿐이라면요? 솔직히 말해서 현이 씨도 괴물을 상대하면서 버거웠잖아요. 레벨 업 스킬을 가지고 있는 현이 씨가 힘들어했을 정도인데, 다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전 다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통로 밖으로 탈출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추측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다른 구역에서 사람들이 넘어오면, 그때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는 거로요.”
한눈에 딱 봐도, 그는 더 이상 목숨 걸고 싸우고 싶어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심정이 이해되었기에 차마 심하게 질책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키며 질문을 던졌다.
“현실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겁니까?”
“현실……. 좋죠. 현실로 돌아가고야 싶죠. 누가 싫겠어요? 저도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고 싶어요. 근데 현이 씨도 우리랑 같이 봤잖아요. 괴물한테 죽은 사람들이요. 그게 우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솔직히 말해서 현실로 돌아가는 게, 목숨보다 소중한가요? 전, 저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요.”
“…….”
강석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근처에 있던 하일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현이 형, 우리가 꼭 나설 필욘 없지 않아요? 그냥 다른 사람들이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되잖아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여기도 현실만큼 좋잖아요. 물론 편의 시설이라던가, 즐길만한 오락거리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우리가 언제 이렇게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즐겨 보겠어요? 안 그래요?”
하일의 얼굴에선 욕망이 들끓었다.
어찌 보면 성욕에 잡아먹혔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로 태어난 이상, 한 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누가 지금 이 상황을 싫어하겠는가? 심지어 하나 같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서양 미녀들이었다.
“그건 그렇지.”
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옆에 있던 진호가 일순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형들, 지금 제정신이에요? 제가 오늘 밖에서 보고 온 거, 다 들으셨잖아요! 우리 지금 갇혀있는 거라고요! 오염된 괴물을 찾아내서 죽이지 않은 이상, 평생 죽을 때까지 여기에 갇혀 살아야 한다고요!”
진호가 크게 소리치며 호소하자, 하일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단호히 말했다.
“진호야, 잘 생각해봐. 우리가 여기에 갇혀있긴 해도, 딱히 불편할 건 없잖아.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고, 먹을 게 부족한 것도 아니야. 오히려 여기가 더 안전하고, 돈도 벌 수 있어. 게다가 여자들도 우릴 좋아하고. 안 그래?”
“그게 뭐 어때서요? 형은 가족이 보고 싶지도 않아요?”
“가족 좋지! 근데 가족이 우리 목숨을 지켜주는 건 아니잖아?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가족이 중요해?”
“하일이 형……. 왜 이렇게 변했어요? 무슨 사람이 하루 사이에…….”
“변한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말하는 거지. 현이 형도 말해보세요.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하일이 나를 바라보며 자기편을 들어달라며 눈짓을 주었다. 이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둘 다 진정 좀 해라.”
“아니…….”
“하일아, 솔직히 말해서 지금 한 말을 2층에 있는 여자들한테 똑같이 말할 수 있어?”
“…….”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우리끼리 하는 것도 문제야. 차라리 지금 여자들을……. 아니,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여자들을 모아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만약에 여자들이 하일이, 네 말에 동의하면 나도 그 땐 다른 구역에서 사람들이 넘어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게.”
이건 사실상 진호의 편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들이 하일이나 강석의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긴 남자들한테나 파라다이스지, 여자들한텐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현이 형, 그건…….”
“우리가 왜 여자들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죠?”
우리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동은이 하일의 말을 중간에 자르게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오염된 괴물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고, 그걸 처치하는 것도 우리잖아요. 심지어 우리가 오늘 벌어온 돈으로 여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거고. 근데 여자들은요? 물론 몇 명이 우릴 도와주고 있긴 한데, 그건 진짜 몇 명 뿐이잖아요. 걔네 빼고 다른 여자들이 뭘 했기에 의견을 물어봅니까? 정 그렇게 오염된 괴물을 죽이고 싶으면 걔네 보고 직접 죽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전부 다 해야 하는 겁니까?”
동은의 말에 하일과 석현이 공감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걔네가 우리한테 뭐 시키는 거 말고, 자기들이 알아서 한 적이 있긴 해요? 괴물을 죽이는 것도 우리가 하고, 청소도 우리가 하고, 돈도 우리가 벌고.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데요?”
“게다가 어제 했던 청소도 사실상 남자들이 거의 다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오늘도 오전 내내 우리를 부려먹기만 하고……. 대체 걔네가 할 줄 아는 게 뭔데요?”
둘 다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여자들을 이전처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도 않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본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네.’
남녀 역전 세계라는 달콤한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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