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589화 (589/599)

〈 589화 〉 [뜻 밖의 상황]

* * *

“하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웬 한숨 소리가 나를 반겼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니 다은이가 구석진 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떠안은 것만 같은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기에 저러고 있는 걸까?

나는 수레에 실려있는 식재료를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하아, 그야……. 어? 아! 오빠!”

무의식중에 대답하려다가 뒤늦게 나라는 걸 깨달은 다은이가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이내 자기가 언제 한숨을 쉬었냐는 듯이 헤헤 웃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만 온 거예요?”

“응, 다른 사람들은 경비대 건물에서 일하고 있어.”

“어? 그럼 오빠는요? 오빠는 끝난 거예요?”

“난 밥 챙겨주려고 왔지. 그리고 일도 다 끝났고.”

다은이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며 수레에서 식재료가 담긴 상자를 꺼내자, 그걸 본 그녀가 재빨리 뛰어와선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이거 주방에 옮기면 되는 거죠?”

“잠깐만. 일단 이거 다 꺼낸 다음에 나랑 같이 한꺼번에 옮기자.”

“네! 아……. 근데 혹시 그 여자가 오빠한테 막 이상한 짓 같은 거 안 시켰어요?”

“그 여자?”

“경비 대장이요!”

큰 소리로 대답하며 나를 채근하는 다은이의 태도에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하, 이상한 짓이라고 할 게 뭐가 있다고. 아무런 일도 없었어.”

“정말로요?”

“그래, 정말로. 근데 그보다 넌 왜 아까 전에 한숨을 쉬고 있었던 거야? 무슨 일 있었어?”

내가 화제를 돌리며 역으로 질문을 던지자, 다은이가 곤란하다는 듯이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아, 아뇨……. 무슨 일은 무슨. 별로.”

“말하기 힘든 거야?”

“으음, 그건 아닌데.”

“아니면 말해봐.”

“여자들 문제라서…….”

말끝을 흐리며 나를 힐끔 쳐다보는 다은이의 시선에서 복잡한 심정이 느껴졌다.

“민감한 거야?”

“네, 조금……. 나중에 상황이 정리되면 그 때 오빠한테 가르쳐드릴게요.”

“그래, 알았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다은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기에 일단은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따가 점심 먹을 때, 여자들 분위기를 보면 대충 알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은이와 함께 식재료를 전부 다 옮긴 다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서 점심을 만들었다. 아침때하곤 다르게 여자들이 먹을 것만 만들면 되었기에 비교적 빠르게 요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요리가 거의 다 완성되었을 때쯤, 냄새를 맡은 여자들이 하나둘씩 1층으로 내려왔다.

“와, 엄청 맛있는 냄새가……. 어라? 현이 오빠! 벌써 온 거예요?”

“저도 도와드릴까요? 감자 정도는 깎을 줄 아는데.”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저한테 시켜만 주세요!”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는 날 발견한 여자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서 둘러앉았다. 이에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차시은을 불러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석현이 없으니, 그녀가 대신 사람들을 통제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여자 몇몇이 2층으로 올라가서 차시은을 데려왔고, 날 발견한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다가왔다.

“안 그래도 점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현이 씨 덕분에 걱정을 덜었네요.”

“낯선 곳에서 밥을 굶는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죠.”

“아무튼 밥이 거의 다 됐는데, 사람들 좀 통제해주시겠습니까? 아침에 강석 씨가 했던 것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내 부탁에 시은은 여자들을 한 줄로 세운 다음에 나무 그릇에 음식을 받아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분위기를 살펴봤다.

“잘 먹을게요, 현이 오빠.”

“오빠, 저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오빠가 만들어준 게 너무 맛있어서 자꾸만 먹게 되는데……. 저 이러다가 살찌면 오빠가 책임져주실 거예요? 만약 오빠가 책임져주시면 다 먹을게요.”

“현이 오빠, 이따가 저희랑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자들의 분위기는 평소와 같았다. 주면 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가는 여자들부터 어떻게든 내 관심을 끌어보려는 듯 애교를 부리고 있는 여자들까지. 대부분 젊고 예쁜 여자들이었기에 딱히 싫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경비 대장인 니르케와 한바탕하고 온 뒤라서 그런지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배식을 거의 다 끝마쳤을 때쯤, 다은이가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오빠, 저 잠깐 진하 좀 불러올게요.”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다은이가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진하가 밖에 나간 건가?’

왜 밖에 나간 거지? 나는 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얌전히 다은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은이가 진하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에 내가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자, 진하의 얼굴에도 약간의 미소가 어렸다.

“잘 다녀오셨어요, 오빠?”

“응, 덕분에.”

“근데 진호는요?”

“진호는 병사들하고 같이 도시 외곽으로 순찰 나갔어. 혼자 간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병사들과 함께 순찰을 나갔다는 말에 진하가 약간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진호가 좋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진하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나무 그릇에 음식을 담아주었다.

‘응?’

그런데 그 때, 진하의 몸에서 희미하지만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건 한수진한테서 나던 악취였다. 이 냄새가 왜 진하한테서 나는 거지? 나는 잠시 진하를 쳐다보다가 슬쩍 차시은을 바라봤다.

‘한수진은 시은 씨가 돌보고 있던 게 아니었나?’

나는 진하 다음으로 차시은의 그릇에 요리를 덜어주며 입을 열었다.

“차시은 씨.”

“네?”

“한수진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아, 아……. 네, 아직…….”

내 질문에 차시은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래요? 이거 큰일이네요.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다니……. 잠깐 상태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심하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도 여긴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이니까, 병원 정도는 있을 겁니다.”

“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있냐니요?”

“눈에 띄게 심한 상처도 없고, 그냥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는데……. 그 있잖아요.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니까 아무래도 충격이 심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더더욱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보단 조금 더 시간을 두고서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허둥대며 어떻게든 나를 단념시키려는 차시은의 태도에서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저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겁니까?”

“숨기는 거라뇨! 그런 거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차시은의 태도에 나는 옆에 서있던 다은이와 진하를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을래?”

“…….”

“이게 숨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아, 안 그래?”

거듭된 내 설득에 다은이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한수진, 걔 깨어난 거 맞아요.”

“몸 상태는?”

“괜찮아요. 괜찮은데……. 문제는 걔가 깨어나고 나서 악취가 더 심해졌다는 거예요.”

“심해졌다고?”

“악취가 복도까지 새어 나오더라고요. 사람들도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참아보려고 했는데, 냄새가 워낙에 심하다 보니까 걔를 창고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왔어요. 물론 시은이 언니는 어떻게 다친 애를 창고로 내보내냐면서 반대를 하긴 했는데, 계속 이야기가 나오니까 결국 다수결로 정하게 됐어요.”

다은이의 말에 기가 막힘을 느꼈다. 물론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친 애를 냄새가 난다는 이유 하나로 창고로 내쫓는다는 말인가? 나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래서 한수진을 창고로 내쫓은 거야?”

“네…….”

“3층에 빈방 많은데, 거기로 올려보내도 되잖아. 왜 하필 창고야?”

“처음엔 3층 빈방에 올려보내 봤었는데, 냄새가 아래층까지 내려오는 바람에…….”

“그럼 남자가 지내는 3층하고 여자들이 지내는 2층을 서로 바꾸면 되잖아.”

“그건 싫다고 하더라고요.”

다은이가 다른 여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시선에 여자들이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친 애를 창고로 보내?”

“…….”

“하아.”

한숨을 내쉰 나는 남은 음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오빠, 어디로 가려고요?”

“창고에 있다며? 밥은 먹여야지.”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다은이가 나서며 내 옆에 서자, 진하도 졸졸 따라와서 입을 열었다.

“저, 저도요.”

“마음대로 해.”

나는 다은이와 진하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간 다음에 허름한 헛간 같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악취가 더 심해지긴 했네.’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보다 더 강해진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지푸라기 위에 담요를 올려두고서 누워있는 한수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도 혈색은 좋아 보였다.

“아…….”

나를 발견한 수진이가 작게 외마디 탄성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봤다. 이에 나는 냄비를 가지고 가서 근처에 내려놓은 다음에 빈 그릇에 요리를 담아줬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 아? 네, 괜찮아요. 근데 저기…….”

“응?”

“그러니까……. 어제 제가 한 말 있잖아요……. 그게, 그러니까…….”

어제 나한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인지, 그녀가 괴로움 섞인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이에 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만약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그것보다 이것 좀 먹어볼래? 먹을 수 있겠어?”

“…….”

내가 그릇을 내밀며 묻자, 잠깐 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수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끄덕였다. 이에 나는 살짝 웃고는 그녀의 손에 그릇을 쥐여준 뒤에 숟가락을 건네줬다.

“일단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다은이랑 진하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