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8화 〉 [뜻 밖의 상황]
* * *
“괜찮습니까?”
나는 니르케의 목을 끌어당겨 안으며 물어봤다. 그리고 이런 내 물음에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가느다란 팔로 나를 있는 힘껏 꽉 끌어안았다.
“네가 보기에 내가 괜찮아 보이냐? 하아, 어디서 이런 요물이 들어온 건지……. 허리가 아주 빠질 것 같다.”
괜히 엄살을 부리며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이는 니르케의 태도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키스를 받아주었다.
“다음엔 좀 살살해야겠네요.”
“그래, 살살 좀 부탁하마. 나도 아직은 젊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후우, 내가 한창 젊었을 때 나흘 동안 남정네들이랑 뒹굴러도 멀쩡했는데…….”
“아직도 충분히 젊으십니다.”
“흥, 입에 발린 소리는…….”
퉁명스럽게 말하곤 있었지만, 니르케의 입꼬리가 눈에 띌 정도로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왼팔을 들어 올려 나를 품에 끌어안은 뒤에 한동안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내 뺨에 입맞춤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음, 원래는 이러면 안 되지만……. 내 애인이 되는 건 어때? 내가 경비 대장의 권한으로 특별히 거기서 빼내 주도록 하지. 솔직히 말해서 거기 시설이 별로이지 않나? 우물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지 오래됐고, 건물은 노후화되어 있어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 그에 반해서 내 애인이 된다면 깨끗한 침실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지. 물론 지금처럼 내가 원할 때……. 해야겠지만.”
니르케가 노골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뱀처럼 뻗은 손이 허벅지를 더듬다가 남근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잡혀있는 남근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듯, 꿀꺽 군침을 삼키며 주물럭거렸다.
“지금 당장 대답해드리기엔 조금 곤란한 것 같습니다.”
“흠, 왜지?”
“돌봐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난민들을 말하는 건가? 그들이라면 다른 사내가 이끌고 있지 않던가?”
“그렇긴 해도, 얄밉게 저 혼자서만 쏙 빠질 순 없지 않습니까?”
“다른 이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는 건가? 후후, 남자들은 참으로 피곤하게 사는군. 좋아, 시간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시간이 점심때인 것 같은데 식사는 어쩌겠나? 함께 먹을 텐가?”
“그것도 괜찮겠지만, 그러면 건물에 남은 사람들이 굶을 테니…….”
“누가 보면 자네가 사람들을 전부 다 먹여 살리는 줄 알겠어. 흠, 어쩔 수 없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니르케가 서랍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그걸 나한테 건네주며 말했다.
“덕분에 꽤 즐겼으니……. 이걸로 맛있는 거나 사먹게.”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 않고.”
니르케가 건네준 돈주머니는 상당히 묵직했다. 분명 적잖은 금액이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돈주머니를 잘 챙긴 뒤에 몸을 일으킨 다음에 내일을 기약하고는 경비 대장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후,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창밖에서 여성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다보자, 정원 수풀 속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윽! 아앙, 더 세게 가슴을 움켜쥐어도 좋아! 그래! 그렇게! 아으읏!”
“크윽!”
여자의 복장을 보아하니, 여기서 일하는 병사인 듯 싶었다. 그리고 여자의 아래에 깔린 채, 무식하리만큼 커다란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남자는 놀랍게도 강석이었다.
그도 나처럼 지금까지 여자와 섹스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순찰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잠깐 즐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변에는 이미 거사를 치른 듯 만족한 얼굴로 누워있는 여자들이 다섯 명도 더 넘게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으려나.’
고자가 아닌 이상, 젊고 예쁜 서양 미녀들의 유혹을 견뎌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동은과 진호가 걱정되었다. 강석조차도 저런데, 남은 두 사람은 어쩌고 있으려나.
살짝 걱정된 나는 동은과 진호를 찾기 위해서 건물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사 휴게실로 보이는 장소에서 여러 명의 여자들과 함께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동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으읏! 쌀 거 같아? 쌀 거 같으면 빼지 말고 안에 싸줘!”
“동은아, 누나랑 키스하자. 자, 츄~. 츄웁, 하자. 하음.”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어떻게든 동은과 섹스를 하려고 찰싹 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는 그런 여자들을 밀쳐내지 않고 가능한 전부 다 받아주려고 하고 있었다.
‘엄청 좋아하네. 음, 뭐……. 저러는 것도 남자의 로망 중에 하나니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은을 보고 있자니, 잠시 이대로 놔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휴게실을 뒤로 하고서 진호를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건물 어디에서도 진호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병사 한 명을 붙잡아서 물어보니, 진호는 부대장과 함께 도시 외곽으로 순찰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의외네. 아니면 진하 때문인가.’
물론 어쩌면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밖에서 몰래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진호라면 어쩌면 정말로 진하를 위해서 참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진호의 정조 관념에 감탄하며 경비대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 후, 시장에 들러서 점심에 먹을 식재료를 구입한 나는 페놀에게 수레를 빌린 뒤 거주지로 되돌아갔다.
“아, 현이 씨! 오셨어요? 어? 근데 혼자 오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서있는 하일과 마주쳤다.
나는 잠시 수레를 세워둔 뒤에 그의 질문에 대답해줬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일을 좀 하고 있습니다. 근데 하일 씨는 그거……. 양동이 들고 어디 가는 겁니까?”
“이거요? 2층에 여자들이 물 좀 떠달라고 부탁해서 떠다가 주는 중이었어요.”
“아니, 왜 자기 손으로 직접 하지 않고 하일 씨한테 부탁을…….”
하일의 말에 내가 어이없단 식으로 되묻자, 그가 어깨를 쫙 펴며 말했다.
“여자잖아요. 그리고 제가 책에서 읽어봤는데, 여자가 남자한테 호감이 있으면 일부러 사소한 부탁 같은 걸 해서 자주 만나려고 한 대요.”
“……?”
뭔가 엄청난 비밀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하일의 태도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 그리고 혜미란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저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선 물 좀 끓인 다음에 방까지 가져다 달라는 거 있죠? 물 끓이는 게 좀 귀찮긴 했는데, 그래도 제가 끓여준 물로 씻고 나온 걸 보니까 괜히 제가 다 뿌듯하더라고요.”
“뭐……. 뿌듯하다니 다행이네요.”
“게다가 다른 여자들이 저 보고 오빠, 오빠하면서 이것저것 부탁하는데……. 음, 현이 씨도 그걸 보셨어야 했는데. 아니, 평소에도 자주 보시려나? 아무튼 여자들한테 관심 좀 받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처음엔 영문도 모를 곳에 떨어져서 불안하고 힘들기만 했는데. 하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실은 속으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인지 하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괜히 하일에게 미안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일도 경비대 건물로 데려가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힐링하고 오라고 보낼까?’
아니, 보내는 김에 아예 석현도 함께 보내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보아하니 둘 다 여자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고 아침부터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석현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석현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석현이요? 석현이는 지금 건물 뒤에 있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어요. 여자들이 더럽다고 청소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여자 화장실을요?”
“네.”
“아무리 그래도 여자 화장실은 여자들이 청소해야죠.”
“음, 그게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석현이가 여자들한테 점수 좀 따고 싶다고 자진해서 한 거예요. 절대로 억지로 시킨 거 아니에요.”
“…….”
어떻게든 여자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하일과 석현의 태도에 미안한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렇게까지 여자한테 굶주린 줄 알았다면 진작 데려가는 거였는데……. 나는 안타까움에 젖은 표정을 그를 내려다봤고, 하일은 그런 내 시선에 무안해진 모양인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화두를 돌렸다.
“크흠, 아무튼 지금쯤 끝나지 않았을까요? 제가 가서 불러올까요?”
“아뇨, 일단 양동이 내려놓고 저랑 같이 가죠.”
“네? 굳이 그럴 필요가…….”
“얼른 내려놔요.”
“아, 네…….”
내가 하일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단호히 말하자,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놨다. 이를 확인한 나는 하일을 데리고 화장실이 있는 건물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에서 청소를 이제 막 마친 듯, 청소 도구를 정리하고 있는 석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석현 씨.”
“네? 아, 현이 씨. 언제 오셨어요?”
“방금 막 왔습니다. 그리고 둘 다 지금 바로 경비대 건물로 가보세요. 위치는 어제 우리가 들어왔던 성문 쪽으로 걸어가면 그곳에 있는 병사가 가르쳐줄 겁니다.”
“지, 지금 바로요?”
내 말에 둘 다 당혹감에 가득찬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동시에 얼굴에 아주 약간이지만 불만이 서리는 게 보였다. 심지어 하일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보고 있기까지 했다.
설마 내가 여자들을 독차지하려고 자기들을 경비대 건물로 보낸다고 생각하는 건가? 실제로 하일은 내게 혜미란 이름의 여자를 언급하며 은근슬쩍 어필하기까지 했다. 혜미는 건드리지 말라고. 물론 내 생각이 너무 지나친 걸 수도 있겠지만, 불안에 떨며 건물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하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결코 지나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아주 푹 빠져있네.’
혀를 내두른 나는 하일의 불안감을 달래주고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아침부터 고생하셨으니까, 경비대 건물로 가서 좀 쉬고 오라고 보내드리는 겁니다.”
“네? 경비대 건물로 가는 건데 어떻게 쉬어요?”
“그냥 가보면 압니다. 거기에 동은 씨랑 강석 씨도 있으니까, 가서 물어봐도 됩니다.”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나는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괜찮겠지만, 그랬다간 분명 이야기가 길어질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원래 선물은 깜짝 선물이 가장 감동적인 법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며 밖으로 내보냈고, 하일과 석현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이윽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경비대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저래도 이따 밤에는…….’
나는 달라질 두 남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식재료가 담긴 수레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