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6화 〉 [뜻 밖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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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이야기했던 대로 석현과 하일, 두 사람만 건물에 놔둔 채로 경비 대장을 만나러 갔다.
이때 다은이가 자기도 함께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긴 했지만,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차시은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일부러 남겨두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건 핑계에 불과했다.
‘경비 대장이 단순히 대화나 좀 나누자고 날 부르는 게 아닐테니까.’
불순한 시선만큼이나 엉큼한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거의 반강제로 다은이를 남겨두고는 다른 남자들과 함께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멀리 보이는 성문을 향해 나아가자, 그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여자 병사가 우리를 발견하곤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대장님이 불러서 온 거지?”
“네, 그렇습니다.”
“좋아. 저기 건물 하나 보이지? 저기로 들어가 봐. 그리고 다른 남자들은……. 뭐, 상관없겠지.”
아주 잠깐 곤란하단 표정을 짓던 여자 병사는 이윽고 경비 대장이 머물고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를 보내줬다. 이에 우리는 곧장 몸을 돌려서 여자 병사가 가르쳐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음? 손님인가? 아아, 어제 온 피난민들이군.”
“후후, 다들 잘 생겼네. 좀 어려 보이는 게 흠이긴 하지만……. 뭐, 가끔은 나쁘지 않을지도.”
“오늘은 냄새가 안 나네? 깨끗이 씻었나 봐?”
건물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야릇하게 웃었고, 강석을 비롯한 남자들은 이 상황이 영 적응되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살다 살다가 이렇게 많은 여자들한테 낯뜨거운 시선을 받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은근 기분 좋지 않아요?”
동은이 반쯤 기가 막힌단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걷고 있던 진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말에 동은이 썩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진호가 킥킥대며 웃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우리 놀러 온 거 아닙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석이 눈을 부릅뜨며 경고하자, 진호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 도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복도에 서있던 여자 경비가 윗옷을 풀어헤친 다음에 한쪽 가슴을 살짝 보여주자 다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우뚝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따 봐, 귀염둥이들.”
심지어 여자 경비가 윙크까지 하며 속삭이자, 다들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동은의 얼굴이 가장 붉었다. 동정인 걸까? 아니면 어쩌면 이런 쪽으로 유독 약한 걸지도 몰랐다.
‘강석 다음으로 듬직해 보였는데.’
의외의 면모에 놀라고 있을 때, 진호가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형! 현이 형! 방금 봤어요? 가슴 겁나 크던데요? 젖꼭지도 완전히 분홍색이었고! 저 핑두는 실제로 처음 봐요!”
“…….”
“백마가 그렇게 쩐다는데, 혹시…….”
진호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우리를 지나쳐간 여자 병사의 등 쪽으로 향했다. 이에 나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진하가 들으면 화내겠다.”
“네? 아, 아니! 진하가 왜 여기서 나와요?”
“둘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 아니……. 그게, 좋아한다기보단……. 으음, 좋아하긴 하는데…….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아신 거예요?”
“척보면 척이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진호의 등을 두어 차례 더 두드려준 나는 강석과 동은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가죠.”
“아, 아……! 네! 그러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석과 동은이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정면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까 본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지, 복도를 걷는 내내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진호에게 해줬던 것처럼 등이라도 두드려줄까 싶었지만, 아까부터 진호도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만뒀다.
‘뭐, 어차피 아까 병사가 가르쳐준 경비 대장의 사무실도 거의 다 왔고.’
고개를 돌린 나는 일행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서 경비 대장의 사무실 앞에 섰다. 그리곤 손등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와는 다르게 갑옷을 벗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경비 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 일찍 왔군! 오후쯤 되어서야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경비 대장이 날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리곤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어제 맡았던 악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귀엽긴. 몸단장이라도 하고 온 건가?”
“보기 좋은 빵이 먹기도 좋은 법이니까요.”
원래는 떡이지만.
“후하핫, 그래! 그렇군! 아주 좋은 말이야.”
내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경비 대장이 허벅지를 탁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저한테 따로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아아……. 할 말! 있지, 있고 말고! 근데 그 전에 자네가 데려온 친구들은……. 여기서 다 같이 즐기기엔 장소가 좀 비좁은 것 같군. 그리고 나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고.”
경비 대장이 음흉하게 웃으며 진호와 강석, 동은을 번갈아 보자 다들 소름 끼친다는 듯 몸서리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어째서인지, 내가 서있었다.
경비 대장이 그렇게나 싫은 걸까? 물론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던 다른 여자 병사들과 비교한다면 여러모로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나이부터가 차이나니까.’
지금까지 우리와 마주친 대부분의 병사는 이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반면에 경비 대장은 삼십 대 중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젊은 여자를 선호하는 남자의 특성상 경비 대장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를 애타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들을 구제해주고자 입을 열었다.
“제가 일행들과 함께 여기에 온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네. 실은 경비 대장님에게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이렇게 다 함께 온 겁니다. 물론 제가 염치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도 경비 대장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 점에 대해선 정말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
나는 감사의 뜻에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곤 경비 대장의 표정을 슬쩍 살펴봤다. 다행히도 그녀의 얼굴에는 불쾌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근데도 제가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온 건, 경비 대장님이 아니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희의 담당자가 아니십니까?”
담당자라는 말에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인지, 경비 대장이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흠……. 요컨대 지정된 구역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자리를 소개받고 싶습니다.”
나는 두 가지 용건을 경비 대장에게 밝혔고, 그녀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금세 해결책을 내놓았다.
“어떠한 이유로 거주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건지는 몰라도, 도시 안으로 들어온 자네들을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밖으로 내보낼 순 없네. 하지만 만약에 자네들이 임시로 도시 경비 일을 맡아준다면, 선임 병사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도시 내외의 순찰 임무를 맡을 수 있도록 손을 써주겠다. 물론 일급도 주도록 하지.”
이 정도면 훌륭한 조건이었다.
나는 강석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고, 다들 불만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 된 것 같아요. 병사들과 함께 다니면 괴물들한테 당할 확률도 줄어드는 거잖아요.”
“게다가 운만 좋으면 오염된 괴물인가 뭔가도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처치할 수도 있고요.”
강석의 말에 진호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동은도 말 없이 동의하고 있었다. 이처럼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 나는 도로 경비 대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경비 대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가? 잘 됐군. 근데 나도 한 가지 묻지. 왜 거주지를 벗어나려고 하는 건가? 혹시 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내가 진지하게 충고 하나 해주지. 도시에서 추방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짓을 당하기 전에 허튼 생각을 접는 게 좋을 거야.”
경비 대장이 우리를 한 명씩 바라보며 경고했다. 이에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비 대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니니까요.”
“떳떳하다는 건가?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고개를 끄덕인 경비 대장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종을 들어서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딸랑, 딸랑 소리가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짧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지금부터 저기 서있는 세 명을 임시 병사로 고용할 셈이다. 자네가 저들을 데리고 가서 간단히 교육을 시킨 다음에 병사들과 함께 도시 내외의 순찰을 시키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자네들, 날 따라오도록!”
경비 대장의 명령에 단발의 여성이 강석과 진호, 동은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에 남자들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해줬다.
탁.
그리고 이윽고 문이 닫히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집무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크흠,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군.”
그 때, 경비 대장이 헛기침을 하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욕정이 깃들어있었다. 게다가 뺨도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서 빨리 나를 덮치고 싶다며,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딱 남녀역전 세계관인데.’
피식, 웃은 나는 경비 대장에게 다가간 다음에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살짝 일으켜 세우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른 피난민도 이런 식으로 불러내서 즐기신 겁니까?”
“읏, 무슨 힘이…….”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죠.”
나는 나긋하게 속삭이며 그녀를 탁자 위에 눕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키스를 하자, 단단하면서도 까칠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평소엔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맛이었다. 하지만 역시 내 취향은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입술이었다.
“흐으읍! 후아, 아……!”
진한 키스 후에 고개를 떼어내자, 얼이 빠진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경비 대장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쪽으로 경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익숙지 않아 보였다.
혹시 마틸다처럼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주려고 아껴두는 타입인 걸까?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음부를 어루만졌다.
“하윽!”
손끝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뭐 따로 애무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너, 너 뭐야? 무슨 남자가……. 여자처럼 행동해?”
“……?”
뭐야? 진짜로 남녀역전 세계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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