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5화 〉 [뜻 밖의 상황]
* * *
‘조금 식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먹을만하네.’
이 정도면 5점……. 아니, 잘하면 6점까지도 받을 수 있지 않으려나? 나는 기름에 볶은 고기를 채소와 함께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다은이와 진하가 넋을 빼고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내 물음에 다은이가 배시시 웃으며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네, 묻었어요.”
“응? 정말로?”
“잘 생김이요. 히히.”
“…….”
드디어 애가 돌은 건가.
“형, 다은이가 드디어 돌았나 봐요!”
마침 진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겁하며 소리쳤다.
“야, 윤 진호! 미쳤냐?”
“미친 건 너지! 쪽팔리게 잘 생김이 뭐냐? 잘 생김이!”
“그게 뭐 어때서? 솔직히 네가 봐도 현이 오빠가 잘 생겼잖아.”
다은이의 말에 진호가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더니, 큭! 소리와 함께 고개를 홱 돌렸다.
“치사하게 팩트로 공격하기냐.”
애들의 유치한 콩트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혀를 내두르고는 진호와 다은이를 점잖게 다그쳤다.
“장난 그만 치고 어서 밥이나 먹어라.”
“네.”
다행히도 둘 다 더 이상 말다툼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얌전히 남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이처럼 저녁을 다 먹은 우리는 남자, 여자로 나눠서 가위바위보를 한 다음에 빈 그릇을 가져다 놓기로 했다. 참고로 가위바위보 대표는 진호와 다은이였다.
“우리 삼세판으로 하면 안 될까?”
“얼른 갔다 오셔.”
자신만만하게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했던 진호는 다은이한테 참혹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한 판 지고 나서 비굴하게 삼세판을 요구했지만, 다은이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에 나는 패배한 진호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려주고는 얌전히 빈 그릇을 챙겨 들었다.
“다음엔 꼭 이길게요, 형.”
“그래, 설욕은 해야지.”
피식, 웃으며 적당히 대답해준 나는 진호와 함께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맞아. 형, 내일 정말로 경비 대장한테 갈 거예요?”
“오라고 했으니까 가봐야겠지. 돈도 빌렸고.”
“형을 바라보던 시선이 심상치 않던데…….”
진호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걱정되나 보네?”
“그야 당연하죠. 설마 이상한 짓 당하는 건 아니겠죠?”
“하하…….”
“웃지 마시고요.”
“글쎄, 내일이 되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여자들이 당하는 것보단 남자인 내가 당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
만약에 음침하게 생긴 경비 대장이 여자들 중의 한 명을 콕 집어서 내일 부른다면? 심지어 그게 다은이나 진하라면?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졌다. 그리고 이건 진호도 나와 똑같은지,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형은요? 싫진 않으세요? 혹시 싫으시면 제가 내일 당장 알바든 뭐든 해서 돈 벌어서 갚아볼게요. 마침 페놀 누님도 조수 한 명 구하고 있던데, 제가 잘만 부탁하면 돈을 가불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를 걱정해주는 진호의 말이 기특하긴 했지만, 경비 대장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더욱이 경비 대장은 우리를 관리하는 담당자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오염된 괴물을 찾아내기 위해선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니 되도록 친밀한 관계가 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일단 내일 되거든 다시 생각해보자.”
“네……. 하지만 형, 혼자서 전부 다 할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나는 진호와 함께 주방 앞에 섰다. 그러자 어째선지 주방 앞에 서있던 강석이 우리를 반기며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나무 그릇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다 먹은 그릇은 여기에 두시면 됩니다. 설거지는 여자들이 하기로 했거든요.”
“안 그래도 설거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하하, 뭐든지 뒷정리가 제일 힘든 법이죠. 그래도 현이 씨 덕분에 다들 맛있게 잘 먹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설거지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여자들 쪽이었습니다.”
“나중에 고맙다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그러면 다들 좋아할 겁니다. 아참, 그리고 괜찮다면 이따 밤에 남자들만 따로 모아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인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언제든지 좋습니다.”
“그럼 이따가 부르겠습니다. 그때까진 좀 쉬고 계세요. 아니면 3층에 올라가서 방을 고르셔도 되고요. 참고로 2층은 여자들 방입니다.”
방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 서있던 진호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마음대로 골라도 되는 거예요?”
“먼저 고른 사람이 없다면 상관없지. 아니면 나중에 남자들끼리 모였을 때, 방을 정해도 좋고. 일단 방을 골라서 정해놓아 봐.”
“네, 그럴게요! 아, 이거 다은이하고 진하한테도 제가 말해둘게요.”
“그래 주면 나야 편하지. 아, 근데 여자들 방은 숫자가 부족해서 2인 1실이야. 남자는 1인 1실이고.”
“정말요? 개이득이네요.”
킥킥대며 웃은 진호는 한결 더 신이 난 발걸음으로 다은이와 진하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강석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어주자, 다은이의 얼굴에 살짝 부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아, 나도 혼자서 방 쓰고 싶었는데……. 그냥 3층에 올라가서 방 하나 고를까?”
“어허,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어딜 여자가 3층에 오려고?”
“너 자꾸 얄밉게 깐죽거릴래?”
“어, 계속 깐죽거릴 건데?”
다은이를 놀리는 게 어지간히도 재밌는지, 진호가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며 약 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아오, 이게 진짜!”
“형, 형! 봤어요? 다은이가 저 때리려고 했어요!”
“야!”
주먹을 치켜드는 다은이의 행동에 진호가 기겁하며 나한테 이르자, 다은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올라갔던 주먹이 슬그머니 내려가는 건 덤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은이를 대신해서 진호의 등을 세게 탁 쳐주었다.
“둘 다 그만하고 올라가 보자.”
이렇듯 두 사람을 중재한 나는 애들을 데리고 건물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은이와 진하는 다른 여자들에게 물어보며 2층에 남은 방을 알아봤고, 나는 진호와 3층의 빈방을 찾아봤다. 다행히도 3층을 돌아다니던 하일이와 마주쳐서 어느 방이 비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형, 골랐어요?”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네. 진호, 네가 먼저 골라.”
“정말로요? 후회하기 없기에요!”
먼저 고르란 말에 진호가 잽싸게 복도 중간에 위치한 방을 골랐다.
나는 적당히 그 옆에 있는 방을 골랐다. 그리곤 각자 방에 들어가서 방안의 창문을 연 다음에 가볍게 청소를 하고는 나무 봉을 거치시켰다.
똑똑.
“현이 씨, 계세요?”
그 때, 문을 두드리는 강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문을 열자, 그가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좀 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그럼 제 방에 먼저 가있으세요. 저는 다른 사람들을 마저 다 부르고 가겠습니다.”
“그거라면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침 진호가 제 옆방이니까요.”
나는 방 밖으로 나온 다음에 옆방의 문을 두드려서 진호를 불러냈다.
“하암, 형?”
“잤어?”
“잠깐 침대에 눕는다는 게, 깜빡 잠들었네요.”
아직도 졸린 모양인지, 진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강석 씨가 불렀어. 남자들끼리 이야기 좀 하자고.”
“그래요? 얼른 가보죠.”
이렇듯 진호를 불러낸 나는 강석이 알려준 그의 방으로 갔다. 이미 방 안에는 동은이 와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 저녁을 잘 먹었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뚝뚝한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적당히 그의 말을 받아주고는 강석을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뒤, 강석이 하일과 석현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방 안에 둘러앉은 우리를 한 차례 훑어보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혹시 다들 내일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는 강석의 말에 우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물론 나는 내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경비 대장을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설마 혼자 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말하는 뉘앙스를 들어보니, 함께 갔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같이 가시게요?”
“그게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고요.”
강석의 말에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옆에 있던 하일도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공포 영화 같은데서도 혼자서 막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실종되거나 살인범한테 살해당하잖아요.”
지금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건 영화잖아.’라며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충분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알겠다는 뜻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다 같이 찾아가 보죠.”
“그러죠. 아, 근데 전부 다 가지는 않을 겁니다. 여자들을 지킬 사람도 필요할 테니, 석현 씨와 하일 씨를 남겨둘 생각입니다.”
나도 내일 건물에 남겨둘 다은이와 진하가 걱정되었기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게 좋겠네요.”
“그리고 또 내일 시간이 된다면 도시 안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오염된 괴물이란 걸, 찾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는 김에 내일 제가 경비 대장에게 부탁해서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아보겠습니다. 마침 우리 담당자가 아닙니까?”
“그래 주시면 우리야 좋죠. 근데 혹시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닙니까? 괜히 이것 때문에 경비 대장이 현이 씨한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잡아먹히기야 하겠습니까?”
하하, 웃으며 대답한 나는 사람들과 함께 내일 할 일을 간단히 정리하고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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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나는 어제처럼 사람들이 먹을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한 발 더 빨리 내려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은이가 쪼그려 앉은 채로 날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오빠, 굿 모닝~.”
“일찍 일어났네?”
“요리하는 거 도와주려고 일찍 일어났지롱.”
배시시 웃은 다은이가 나를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특하네.”
“그렇죠? 제가 최고죠?”
“그래, 최고다.”
다은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준 나는 물로 손을 닦고는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다은이도 나를 도와서 재료를 다듬었다. 확실히 혼자서 하는 것보다 둘이서 하니 속도가 훨씬 빨랐다.
“뭐 만들 거예요?”
“가볍게 샌드위치를 만들까 하는데.”
“손이 많이 가지 않아요?”
“그냥 대충 만들 거야.”
나는 어제 사온 바게트 빵을 세 등분으로 나눈 다음에 반으로 갈라 그 안에 기름에 튀기듯 구운 고기와 채소를 넣었다. 반나절 정도가 지났기에 신선도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처럼 20인분이 준비되어갈 때쯤, 사람들이 하나둘씩 1층으로 내려왔다.
“어라? 현이 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오빠, 좋은 아침이에요. 다은 씨도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나무판 위에 올려져 있는 샌드위치를 하나씩 가져가서 먹었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샌드위치를 가져가서 다 먹고 나자, 강석이 나와 진호 그리고 동은을 불러서 말했다.
“경비 대장한테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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