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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어플-584화 (584/599)

〈 584화 〉 [뜻 밖의 상황]

* * *

“형, 장 보러 가기 전에 물 좀 마시고 가면 안 될까요?”

“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그 경비 대장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뒤뜰에 우물이 있다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다 같이 가서 마시고 가요.”

건물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진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게다가 옆에 있던 다은이도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이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경비 대장이 언급했던 뒤뜰로 가보자, 꽤 오랫동안 방치된 듯 낡고 여기저기 부서진 우물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윽.”

그걸 본 애들이 기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래도 목이 마른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우물 쪽으로 다가가서 나무 뚜껑을 덮고 있는 무성한 풀들을 걷어내고는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이거……. 바닥이 마른 거 아니예요?”

“여기에 바가지가 있는데, 일단 이걸로 물을 퍼봐.”

줄로 연결된 물통을 발견한 다은이가 진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에 물통을 건네받은 진호가 우물 안으로 물통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약간 시간이 지나자, 첨벙하는 소리가 작게 울려퍼졌다. 다행히도 물이 남아있긴 한 모양이었다.

진호는 줄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다가 천천히 끌어올렸다.

“킁킁, 일단 냄새는 괜찮은데……. 아, 이런 거 함부로 마시면 기생충에 감염된다는데 괜찮으려나?”

“알게 뭐야? 당장 목말라 뒈지겠는데. 먹기 싫으면 나 줘.”

“아, 잠깐만. 내가 먼저 마셔보고 괜찮으면 줄게.”

물통 안에 담겨있는 물을 잠시 내려다보던 진호는 곧 용기를 내어서 물을 꿀꺽 들이켰다.

“어때?”

“으음. 흙이 조금 씹히긴 하는데, 일단 마셔도 괜찮은 듯? 자, 여기.”

흙이 씹힌다는 말에 다은이의 표정이 구겨진 종이처럼 찌그러졌다. 하지만 현재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녀는 진호한테서 물통을 건네받은 다음에 물을 세 모금 정도 들이켰다. 그리곤 웩, 소리를 내며 혀를 내밀었다.

“윽……. 아, 진짜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만, 딱 한 잔만 마실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커피만?”

“치킨에 시원한 맥주까지 주면 더 좋고. 자, 여기.”

푸념을 잔뜩 늘어놓은 다은이는 물통을 진하한테 내밀었다. 그리고 이처럼 물통을 건네받은 진하는 슬쩍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먼저 드실래요?”

“난 괜찮아. 먼저 마셔.”

“네.”

고개를 끄덕인 진하는 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셨다. 하지만 흙내가 영 적응되지 않는 모양인지, 딱 한 모금만 마시고는 나한테 건네줬다.

“더 안 마셔도 돼?”

“흙 때문에 더 못 마시겠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색하는 진하의 태도에 쓴웃음을 터트린 나는 물통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셔봤다. 그리고 과연 그 말대로, 물통 안의 물을 마셔보니 흙 같은 작은 알갱이가 입 안에 맴돌며 이빨 사이에 꼈다.

“이거 나중에 끓여 마셔야겠다.”

“그러게요. 위생적으로 진짜 안 좋을 거 같아요.”

내 말에 동의한 애들이 꺼림칙하단 표정을 지으며 우물을 바라봤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는 애들을 데리고 뒤뜰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큰길을 따라 쭉 걸으며 광장을 찾았다. 보통 광장에서 식료품을 포함한 잡다한 물건을 팔기 때문이었다.

“와…….”

길을 걷는 동안, 애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하지만 너무 넋을 빼고 있다간 언제 코가 베일지 몰랐기에 나는 적당히 주의를 주며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광장이라 생각되는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장 보고 가자.”

나는 식재료를 파는 상인에게 다가가서 물건을 살펴봤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상인도 여자였다.

“어디서 피난 온 거유?”

“제가 피난 온 것처럼 보입니까?”

“옷차림만 봐도 척이지. 게다가 생긴 것도 다르고.”

확실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이곳 사람들의 의복과 확연하게 달랐다. 게다가 피부색부터 체형까지, 무엇하나 같은 게 없었다.

“피난 오는 사람이 많은가 보네요.”

“자주는 아니지만, 잊을만하면 몰려오지.”

나는 상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준 뒤에 경비 대장이 준 돈으로 스무 명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식재료를 충분히 샀다.

물론 요리에 필요한 도구들도 다른 상인을 통해 구입했다.

“형,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예요?”

“내일도 먹어야지.”

“아하.”

역시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려고 하니, 식재료의 양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곤란해하자, 다행히도 상인이 우리에게 작은 수레 하나를 빌려줬다.

“다 쓰거든 바로 돌려주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우린 상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식재료를 수레에 싣고서 건물로 되돌아갔다.

“아, 오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에 뿌연 재 같은 걸 묻힌 강석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마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우리가 장을 보는 사이에 건물 안을 청소하느라 제법 고생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위층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아뇨, 별 거 아니었습니다. 그나저나 아직도 청소 중인가 보네요.”

“하하,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게다가 위에 올라가 보니 3층까지 있더군요. 지금 거길 청소하느라 다들 바쁜 겁니다.”

“고생이네요. 아, 그런데 한 수진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은 씨가 2층 방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혹시 걱정되시면 제가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은이 돌봐주고 있다는 말에 나는 안심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시은 씨라면 믿고 맡길만하죠. 그보다 저는 주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진호야.”

“네, 형.”

“수레 좀 돌려주고 올래?”

“네, 맡겨주세요!”

나는 수레에 싣고 온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긴 다음에 주방을 살펴봤다.

다행히도 여긴 청소가 끝난 모양인지 제법 깔끔했다. 그리고 불을 피울 수 있는 화구도 있었다. 물론 멸망한 세계에서 봤던 알마의 식당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20인분을 감당할 수 있을 듯 싶었다.

나는 양 팔을 걷어붙인 다음에 식재료를 손질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본 강석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이 씨가 요리하시게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요리를 할 줄 아시나 보네요.”

“좋은 스승님 밑에서 배웠거든요.”

강석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한 나는 상인에게 부탁해서 얻은 물로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식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양이 제법 많긴 했지만, 신체 능력이 워낙에 좋아져서 별로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요리인데.’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는 시스템의 부재가 너무나도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어차피 완벽하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냥저냥 먹을만하기만 하면 됐다.

‘물론 이왕에 만들 거 맛있는 게 훨씬 낫지만.’

나는 남은 식재료를 손질한 다음에 화구에 불을 붙이고, 큰 냄비에 기름을 둘러서 고기와 야채를 볶았다.

다행히도 식재료가 신선했기에 뭘 더 가미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가볍게 향신료와 소금 정도만 넣어줘도 충분히 맛있는 요리가 완성됐다. 그리고 이처럼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풍기자, 위에서 청소하던 사람들이 군침을 삼키며 1층으로 내려왔다.

“다은아, 진하야. 미안한데 배식 좀 도와줄래?”

“네, 오빠!”

“강석 씨, 사람들을 모아주시겠습니까? 줄 좀 서게 해주시고요.”

내 부탁에 강석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처럼 모은 사람들을 일렬로 줄 서게 만든 다음에 나무 그릇에 배식받게 했다. 다행히도 내가 만든 요리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 강석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현이 씨는 진짜 못 하는 게 뭐예요?”

“못하는 거 빼고 다 할 줄 압니다. 자, 다른 사람들도 배식 받아야하니까 얼른 가세요.”

나는 사람들의 농담을 적당히 받아주고는 계속 배식을 이어나갔다. 그리곤 먼저 배식을 받고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펴봤다.

“…….”

다들 말 없이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맛이 없다고 불평 불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맛이 없을 수 없는 요리이기도 했다. 더욱이 다들 배고픈 상태이지 않던가? 나는 흐뭇하게 웃고는 배식을 마저 이어나갔다. 그리고 배식이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수레를 돌려주러 갔던 진호가 돌아왔다.

“너 왜 이렇게 늦었냐?”

한참 뒤에나 돌아온 진호를 다은이가 띠겁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진호가 살짝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다 이유가 있어서 늦은 거지.”

“이유?”

“그래, 내가 페놀 누님하고 친해져서……. 아, 여기서 페놀 누님은 우리한테 수레를 빌려주신 상인인데, 아무튼 내가 수레를 돌려주러 갔다가 잠깐 가게 일을 돕게 됐는데 거기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들었거든?”

“무슨 이야기?”

“도시 안에 남자들이 없었던 거 말이야.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괴물이랑 싸우다가 다 죽었다고 하더라.”

“괴물? 우리가 탑 안에서 싸웠던 괴물?”

“아니, 설명을 들어보니까 우리가 죽였던 괴물보다 더 크고 강한 것 같더라. 여기 사람들도 남자들 싹 다 죽고, 용사라는 사람이 겨우겨우 막아냈다고 하더라.”

용사?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용사는 아니겠지?

나는 혹시나 싶은 생각에 진호한테 물어봤다.

“혹시 용사의 이름이 뭔지 들었어?”

“네? 아, 그러고 보니까 용사 이름이……. 세, 어쩌고였던 거 같은데. 세니아였나? 아, 세르니아! 세르니아라고 했어요.”

“…….”

세르니아라면 나를 용사 파티에서 추방시켰던 용사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곳이 멸망한 세계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긴 멀쩡한 거지? 게다가 용사가 겨우 막아냈다니? 난 영락없이 별개의 세계인 줄로만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세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용사 덕분에 도시가 안전해졌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다른 곳에서 계속 피난민이 몰려오는 걸 보면, 다른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에요.”

진호의 말이 끝나자, 다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용사라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대?”

“아무도 모른다던데? 근데 냄새 되게 좋은데, 음식 아직 남아있지? 누가 만든 거야? 설마 너가 만든 건 아니지?”

“내가 만든 거면 뭐 어쩌려고요?”

“네가 만든 게,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거 모르냐? 아무튼 누가 만든 거야? 엄청 맛있을 거 같은데.”

“내가 만든거거든?”

“아, 지랄말고.”

“미친 새끼.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냄비를 사이에 두고서 실랑이는 벌이는 다은이와 진호의 태도에 나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음식 가지고 장난 치지 마라. 그리고 내가 만든 거니까, 그냥 먹어.”

“어? 현이 형이 만들었어요? 진짜로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나는 남은 음식을 네 개의 그릇에 나눠 담고는 적당한 자리로 옮겨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몇몇 사람이 날 향해 잘 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들 배부르게 잘 먹은 모양이었다. 그걸 보니, 괜히 뿌듯한 마음이 일어났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오빠.”

그렇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무 숟가락을 떠서 고기를 한 입 먹은 진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이거 정말로 형이 만들었다고요? 형, 요리사였어요?”

“요리사는 무슨. 네가 배고프니까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거야.”

“아니, 그것도 있긴 하지만 진짜 맛있는데요? 이거?”

“그래,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부족하면 더 먹어.”

“네!”

큰 소리로 대답한 진호는 행복하단 얼굴로 계속 음식을 먹었고, 다은이와 진하도 이제야 좀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음미하며 먹었다. 나는 좋아하는 애들을 살펴보다가 천천히 나무 숟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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