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3화 〉 [뜻 밖의 상황]
* * *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강석이 사람들을 모아두고서 질문을 던졌다. 이 때, 나는 한 수진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멀찍이 뒤로 물러나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차 시은이 가장 먼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도시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게 어떨까요? 솔직히 말해서 다들 너무 지쳤어요. 여기서 뭘 더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요.”
차 시은의 말에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강석은 방금 전, 경비 대장이 말한 1년 동안 지정된 구역에서만 지내야 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우려를 드러냈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요? 1년 동안 지정된 구역에서만 지내야 된다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탑 안에 사는 사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함정이었다면 진작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꾸밀 필요 없이요.”
“음, 그건 그렇지만……. 근데 만약에 도시 안에 들어갔다가 정말로 1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거나 그러면 어쩌죠?”
“담당자라는 사람을 찾아가 봐야겠죠. 아까 들어보니까 도시 특별법이라고 하던데, 제가 볼 때 여기서도 나름의 법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차근차근 알아보다 보면 뭔가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강석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더 이상 우려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차 시은의 말에 동조하며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맞아요. 이제 더이상 못 걷겠어요.”
“배고프고, 목마르고……. 괴물들한테 쫓기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그냥 좀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요?”
다들 도시 안으로 들어가길 원하는 눈치였다. 강석은 사람들을 한 차례, 쭉 훑어보고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의견도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잠깐 고민한 뒤에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다들 너무 지쳤어.’
지치고 배고픈 건 둘째 치더라도, 다들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 당장 탈수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걸 거부한다면 분명 사람들이 분열할 것이다.
“그럼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거로 결정하겠습니다.”
이윽고 결단을 내린 강석이 경비 대장에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아. 그럼 날 따라오게. 내가 직접 안내해주지.”
경비 대장이 씩,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시선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경비 대장의 시선이었던 모양이었다.
“잘 생긴 남자는 진짜 오랜만이네.”
“킥킥, 조만간 또 보겠네.”
“귀염둥이, 우리 대장님한테 안 따먹히게 조심하라고.”
아니, 경비 대장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병사들도 나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은근슬쩍 나한테 다가와서 몸을 건드려보려는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곧, 지독한 악취를 뿜어대고 있는 한 수진한테 가로막혀서 뒷걸음질 쳤다.
“우욱!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윽! 구린내!”
병사들이 기겁하며 나한테서 멀찍이 도망쳤다. 덕분에 병사들에게 둘러싸이는 일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성문을 통과해서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중세 영화 속에서나 볼만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딱히 특별한 건 없네.’
이미 몇 차례나 이계 퀘스트를 통해서 이계를 오고간 경험이 있었기에 나한테 있어서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기에 다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보고 있었다.
“와, 꼭 영화 세트장에 와있는 것 같아요.”
“혹시 이종족은 없는 건가? 엘프나 수인 같은 거.”
“이거 사진으로 찍어도 되려나?”
몇몇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다. 다들 지치고 배고픈 와중에도 할 건 다 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SNS에 올릴 법한 자세로 셀카를 찍고 있기까지 했다.
“다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이처럼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강석이 짝짝! 손뼉을 치며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덕분에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소란을 떨던 사람들이 도로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경비 대장을 얌전히 따라갔다.
“또 피난민이 온 건가?”
“이번엔 남자가 꽤 많아.”
큰 도로를 따라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자,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시 주민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이었다는 점이었다.
‘남자가 거의 없어.’
아주 가끔씩 남자와 마주치긴 했지만, 그마저도 어린 남자애거나 노인뿐이었다.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남자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자, 안으로 들어가지.”
그때, 앞쪽에서 경비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우리를 허름한 건물 안으로 밀어 넣었고, 우리는 한두 명씩 짝을 이뤄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내가 들어갈 차례가 되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비 대장이 날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윽, 아까부터 계속 맡고 있긴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맡으니까 더 지독하군. 후, 넌 못 들어간다.”
경비 대장이 왼손으로 자신의 코를 막으며 질 나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경비 대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물론 나이가 좀 많아 보이긴 했지만, 서양인의 노화가 빠르다는 걸 감안하면 생각보다 젊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까지 한 나는 다음으로 몸매를 살펴봤다.
‘갑옷 때문에 알아보기가 힘드네.’
가슴이 클까, 작을까? 가능하면 작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린 다음에 경비 대장에게 말했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호오, 눈치가 빠르군.”
눈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나를 쳐다보는 경비 대장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욕정이 가득 실려있었다. 저런 식으로 나를 끈적하게 쳐다보는데, 못 알아차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가르쳐주시면 이따가 찾아가겠습니다.”
“좋아, 일단은 들어가라. 나중에 가르쳐주지.”
내 태도가 마음에 든 듯, 경비 대장이 흔쾌히 몸을 비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별다른 소동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안은 밖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낡아 있었다.
구석에는 얼룩덜룩한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탁자 위에는 뿌연 먼지가 쌓여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우윽!”
“거기 창문 열어요! 빨리!”
게다가 내가 한 수진을 업은 채로 안으로 들어가자, 건물 안이 순식간에 악취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에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정신없이 들이켰다.
“진짜로 미치겠네.”
“속이 안 좋아.”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연히 내 등에 업혀있는 수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내쫓자는 매정한 말까지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이 건물을 사용하면 된다. 뒤뜰에 우물이 있으니 거기서 물을 사용하면 되고,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도록. 인원은 매일 밤, 내가 점검하러 올 거다. 질문 있나?”
“경비 대장님이 우리 담당자인 겁니까?”
강석이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지자, 경비 대장이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래. 그러니 내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경비 대장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무리 도시 안에 남자가 적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져도 되는 건가? 이건 마치 남자가 해야 할 역할을 여자가 하고 있는 것 같은…….
‘설마 남녀 역전 세계관?’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물론 경비 대장이 유독 이상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내 얼굴이 너무 잘 생겨진 탓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생각하기엔 여자 병사들의 태도와 도시 안의 남녀 성비가 너무나도 이상했다.
나는 잠시 경비 대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알겠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뭐지?”
“식재료를 살 돈이 없는데, 돈 좀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장 다들 지치고 배고픈 상태였다. 물이야 뒤뜰에서 우물을 퍼서 마시면 된다지만, 배고픔은 뭔가를 먹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금 당장 가진 돈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상대는 경비 대장이 유일했다.
“좋아, 빌려주지.”
다행히도 경비 대장은 흔쾌히 내 요청을 받아주었다. 그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내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탁자 위에 올려뒀다.
“……이거면 한 끼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아, 그리고 필요하다면 일자리도 소개해주지. 마침 성문을 지킬 병사가 필요하거든.”
“내일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나는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고, 경비 대장은 내 대답에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무사히 식재료를 살 돈을 얻은 나는 강석과 차 시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식재료는 제가 사올테니, 두 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건물 안을 청소해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현이 씨한테 부탁드릴 참이었습니다. 근데 혼자서 장을 다 보실 수 있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사람을 더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럼 진호랑 다은이, 진하 좀 데려가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강석의 허락이 떨어지자, 근처에 서있던 애들이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나한테 다가왔다. 물론 가까이 오기가 무섭게 수진이한테서 나는 악취에 눈살을 와락 찌푸리긴 했지만,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전처럼 헛구역질까진 하지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터트리고는 등에 업고 있던 한 수진을 강석과 시은에게 맡겼다. 그 후, 장을 보기 위해 애들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