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2화 〉 [뜻 밖의 상황]
* * *
“레벨 업 플레이어라니. 이름만 들어도 엄청 좋아 보이네요. 하하!”
강석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니, 오히려 레벨 업 플레이어라는 말에 엄청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그가 날 보며 좋아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다 괜찮으신 거예요?”
“아, 네! 다들 넘어오세요!”
강석이 손짓하며 문 안쪽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자, 그제야 하나둘씩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 뭐, 뭐야?”
“창병? 이건 또 무슨…….”
“적성이란 게 생겼는데, 다들 저처럼 생긴 건가요?”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나와 강석이 겪은 현상을 똑같이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에 강석이 전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다들 거기 계속 서있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비켜주세요. 자자, 다들 뒤에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강석의 재촉에 그제야 사람들이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고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람들이 나오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이 마저 빠져나왔다. 당연히 여자들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알림 문구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예요? 언니도 보여요?”
“응, 나도 보여. 이거.”
“전 일반인이라고 떴는데, 언니들은요? 뭐라고 떴어요?”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혹시라도 이 소리를 듣고 주변에서 고블린이 몰려오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숲은 안전한 모양인지, 꽤 소란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가오는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문을 여는 즉시, 오염된 괴물과 마주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차 시은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질문을 던졌다.
“강석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예요?”
“저도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현이 씨는요?”
시은이 나를 바라보며 물어봤지만, 나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나는 아는 게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걸 본 그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큰일이네요. 아는 게 하나도 없다니. 아! 혹시 우리가 탑 밖으로 나온 건 아닐까요?”
“탑 밖이라. 잠시만요.”
차 시은의 말에 강석이 주머니 안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을 꺼내서 확인해 봤다. 그러나 여전히 전파가 잡히질 않는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신호가 잡히질 않는 걸 보면 아직도 탑 안인 것 같습니다.”
“그냥 숲속이라서 신호가 안 잡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시은 씨는 혹시 저렇게 생긴 나무를 한국에서 본 적이 있으세요?”
문득 강석이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나무 넝쿨을 엮어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나무가 우뚝 서있었다. 또한 가지 사이에는 자줏빛을 띈 배 모양의 열매가 맺혀있었다. 맹세컨대 저렇게 생긴 열매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여기가 탑 안이라고요? 누가 봐도 밖으로 나온 것처럼 보이는데…….”
여전히 탑 안이라는 사실에 시은이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있을 때, 또다시 등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꺅꺅대는 여자들의 비명 소리까지 들리고 있었다.
“우욱!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우엑, 누구야? 누가 이런 냄새를……. 꺅! 쟤한테서 나는 냄새잖아!”
“누가 얘 좀 치워줘!”
비명과 고성이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강석이 뒤돌아서며 여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다들 왜 소란……. 우윽!”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여자들에게 다가가던 강석이 갑자기 코를 움켜쥐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이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서히 코를 찌르는 지독한 악취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취의 진원지는 놀랍게도 기절한 한 수진이었다.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여자들도 그 사실을 깨닫고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진을 거의 내동댕이치듯이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주, 죽은 건 아니죠?”
수진을 둘러싼 여자 중에 한 명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어 물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렇게 빨리 시체 썩는 냄새가 날 리가 없잖아요!”
“그럼 이 냄새는 대체 뭔데요? 누가 가서 쟤 숨 쉬나 확인해봐요!”
여자의 외침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악취가 워낙에 심하다 보니, 아무도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를 본 나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한 수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조금 전에 내동댕이쳐지면서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살펴봤는데, 다행히도 바닥이 풀밭이어서 딱히 다친 데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고.’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보니,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살아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근데 냄새는…….”
“한 수진 양한테서 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근데 이유는……. 음, 혹시 뭔가 악취하고 관련된 스킬을 받은 게 아닐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악취가 스킬이라니. 지가 스컹크야 뭐야.”
“구려.”
드문드문, 킥킥대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이 수진이를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가만히 있던 강석이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큼큼, 일단 다들 진정하고 자기가 받은 적성하고 스킬을 확인해보세요. 그리고 다 확인한 다음에 저한테 알려주시겠습니까? 혹시 우리가 여기서 탈출하는데 도움이 될만할 게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강석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이 상태창을 열어서 적성과 스킬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사람들이 하나둘씩 강석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적성과 스킬을 알려주었다. 다만 처음에 알림 문구에서 언급했던, [지금까지의 활약을 바탕으로 탑을 오르는 자의 적성을 결정합니다.]라는 말대로 뒤에서 별다른 활약 없이 조용히 따라오기만 했던 여자들은 일반인, 평범한 시민 같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적성을 부여받았다.
당연히 스킬도 별다른 건 없었다.
반대로 나와 함께 앞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창병, 모험가 등등 나름 전투 계열 적성을 부여받았다.
“저는 척후병을 받았어요.”
그리고 맨 뒤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던 석현은 척후병 적성을 받았다. 그리고 이건 그가 뒤에서 놀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강석도 이를 눈치채고는 수고했다는 뜻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입을 열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근데 척후병이면 뭔가 정찰에 관련된 스킬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 혹시 뭐 쓸만한 거 없습니까?”
“음, 그게 두 개 받긴 했는데. 하나는 좋은 시력이고, 또 하나는 지도 그리깁니다.”
“지도 그리기요? 혹시 이 주변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건가요?”
“당장 그릴 수 있는 건 아니고, 일단 제가 주변 지형을 봐야 해요. 그래야지 지도를 그릴 수 있는데……. 아, 제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변을 한 번 봐볼까요? 어렸을 때부터 나무를 자주 타봤거든요. 저 정도쯤은 그냥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금방 보고 오겠습니다.”
괜찮다는 말을 남긴 석현은 곧장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르게 올라가던지,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와, 나무를 엄청 잘 타네요.”
“그러게. 저렇게 보니까 사람이 되게 멋있게 보이네.”
사람들이 감탄하는 사이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온 석현이 자신의 옷에 묻어있는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보고 왔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도시 같은 게 보였어요.”
“도시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석현의 대답에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며들었다.
“네, 그 왜 있잖아요. 중세 영화에서 보면 엄청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요. 그게 있던데요? 아, 그리고 길은……. 잠깐 바닥에 그릴게요.”
석현은 발로 땅바닥을 헤집은 다음에 나뭇가지로 대충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몇 번 대충 그었을 뿐인데도 금세 제법 그럴듯한 지도가 그려졌다. 확실히 스킬의 성능이 좋긴 했다.
“진짜로 가깝네요. 혹시 괜찮다면 석현 씨가 길 안내 좀 해주실래요?”
“네, 저한테 맡겨주세요.”
“그리고 현이 씨, 그 여자애를…….”
강석이 날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차마 악취를 풍기는 여자애를 등에 업고 걸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가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내가 등에 업고 갈 생각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으음,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강석을 뒤로하고서 나는 수진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등에 업자, 진호와 다른 애들이 쪼르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요? 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인데.”
“진짜 독하네. 시체 썩는 냄새도 이것보단 향기로울 것 같은데…….”
“우윽.”
심한 악취에 진호와 다은이가 자기 코를 붙잡으며 눈살을 찌푸렸고, 진하는 아까부터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난 걱정하지 말고 먼저 앞으로 가있어. 난 좀 떨어져서 걸을 테니까.”
“아니, 우리가 어떻게 형을 놔두고…….”
“내가 보기 힘들어서 그래.”
딱 잘라서 말한 나는 일부러 애들을 먼저 앞으로 보냈다. 다행히도 애들도 내 뜻을 알아준 모양인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벌린 채 느긋하게 따라가자, 저 멀리 녹색으로 자욱한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여기가 숲이 끝나는 지점일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 듯, 더욱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서 숲을 빠져나갔다.
“진짜로 도시네요?”
“도시가 나올 줄이야. 게다가 사람도 보여.”
숲을 빠져나가자, 석현이 말했던대로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도시 주변에선 농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농기구로 밭을 가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어쩌죠?”
석현의 물음에 강석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결정을 내린 듯 단호히 말했다.
“일단 도시로 가봅시다.”
“말이 통할까요?”
“말이 안 통하면 바디 랭귀지라도 해봐야죠.”
그렇게 우린 걱정과 우려를 안고서 도시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도시 성문 앞에 서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두 명이 창을 높이 치켜들며 우리를 가로막았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병사들이 전부 다 여성이었다는 점이었다.
“뭐야, 피난민들인가? 복장하고 생긴 걸 보니까, 꽤 멀리서 찾아온 것 같은데……. 어이, 대장님을 불러와! 피난민이 찾아왔다고. 음? 그러고 보니 이번엔 남자가 제법 많은데?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다행이야.”
다행히도 말이 통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런 일에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저기…….”
“어허, 얌전히 있어.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강석이 무어라 말을 걸려고 하자, 여자 병사가 창끝으로 위협하며 입을 다물게 했다. 결국 우리는 무언가 명확한 해답도 얻지 못한 채,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5분 정도 기다리자, 경비 대장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타나서 우리를 맞이해줬다.
“피난민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누구인가?”
여성의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석 쪽으로 모였다. 이에 강석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접니다.”
“그런가? 그럼 잘 듣게. 현재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도시 특별법에 의거하여 피난민은 1년 동안 지정된 구역 안에서만 지내야 하네. 동의하나? 만약 거부한다면 다른 도시를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자, 어쩌겠나?”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듯 싶었다.
강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여성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도시 안으로 한 번 들어가면, 1년 동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겁니까?”
“그렇네. 단, 생계 활동을 위해서라면 담당자의 허락 아래에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지. 혹시 더 궁금한 게 있나?”
“담당자는 누구입니까?”
“도시 안으로 들어온다면 금방 보게 될 걸세.”
경비 대장은 귀찮아 죽겠단 표정을 지으며 대충 대답했고, 이에 강석은 잠시 사람들과 상의를 해보겠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