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1화 〉 [뜻 밖의 상황]
* * *
“야, 김 다은! 너 미쳤어? 다친 애를 왜 때려?”
한 박자 늦게 진호가 다은이를 말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다은이는 진정할 생각이 없는 듯,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그의 손길을 쳐내며 반박했다.
“지금 내가 안 때리게 생겼어? 기껏 구해줬더니 정신 나간 소리하잖아! 넌 화도 안 나?”
“아니,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다친 애잖아. 게다가 친한 사람이 죽은 건데…….”
“그래서 우리가 봐줘야 해? 오냐오냐, 해줘야 하냐고? 내 말이 틀렸어?”
“그건…….”
차마 틀렸다곤 할 수 없는 모양인지, 진호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다은이의 행동에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던 나는 다은이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다은아, 그만해.”
“하지만, 오빠!”
“기절한 애한테 뭐라 해서 뭐하게?”
“어? 뭐? 기절……. 어, 으…….”
내가 턱짓으로 한 수진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제야 다은이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녀는 진하의 품에 안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수진을 발견하곤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거 설마, 나 때문에 기절한 건 아니지?”
“글쎄?”
“그, 글쎄라니! 그렇게 말하니까 꼭 내가 때려서 기절한 거 같잖아!”
“그러게 살살 좀 때리지 그랬어.”
“아니, 오빠!”
“장난이니까, 진정해.”
펄펄 뛰며 소리치는 다은이를 진정시킨 나는 진하의 품에 안겨있는 한 수진을 살펴봤다. 일단 다행히도 다은이가 때려서 기절한 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몸이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기절한 것 같았다. 애초에 잠깐이지만, 깨어났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누가 업고 가야 할 거 같은데, 어쩌죠?”
그리고 이처럼 내가 한 수진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다들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윽고 하나둘씩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입 밖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음, 뒤에 있는 여자들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석현 씨한테 맡길까요? 어차피 뒤에서 경계만 서고 있잖아요.”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선뜻 나서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이럴 때 강석이 나서진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는 조용했다.
‘방금 전에 한 말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 건가.’
실제로 한 수진을 바라보는 강석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물론 이건 강석 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수진을 돕고 싶어 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얼추 짐작한 나는 가벼운 한숨 후 입을 열었다. 괜히 엄한 사람한테 맡겨서 안 좋은 감정을 더 키우기보다는 내가 직접 하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네? 현이 씨가요?”
내가 하겠다며 나서자, 차 시은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그다지 탐탁지 않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나는 차분히 정론을 펼쳤다.
“제가 여러분들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구한 거니까, 제가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전 레벨 업을 하지 않습니까? 남들보다 체력에 여유가 되니, 그만큼 더 일해야죠.”
“무리하시는 건 아니죠?”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군대에선 20kg이 훌쩍 넘는 군장도 등에 업고 행군을 했는데, 이 정도야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하하, 웃으며 대답한 나는 조심스럽게 한 수진을 일으켜 세운 후 등에 업었다. 다행히도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나는 왼팔을 아래로 내려서 엉덩이를 받쳐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본 다은이가 속상하다는 듯, 툴툴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빠, 그러다가 호구 잡혀요.”
“호구 안 잡히니까 걱정하지마.”
딱 잘라서 말한 나는 강석에게 출발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가 짝짝! 박수를 두 번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선두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는 그를 따라 통로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말이에요. 착하기만 하면 매력이 없어요. 알죠?”
이때도 다은이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매력 없나?”
“읏! 아니, 그건 아닌데. 아아! 웃지 말고 진지하게 좀 들어봐요! 하여간 진짜 사람이 좋기만 해서…….”
다은이의 얼굴이 일순간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이내 그녀는 언제 자기가 얼굴을 붉혔냐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진호와 진하는 뒤에서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수진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가끔씩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염된 괴물이란 거,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문득 진호가 날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다은이가 피곤해 죽겠단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러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쯤 왔으면 알아서 나와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퀘스트 같은 거로 표시라도 해주거나.”
퀘스트란 말에 진호가 나무 봉으로 땅바닥을 세게 찍으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거 좋네! 퀘스트! 퀘스트 창! 임무창!”
“뭐하냐?”
“혹시 퀘스트 창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있어?”
“안 나오네.”
진호가 쩝,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다시 돌아봤다.
‘진짜 끝이 어디려나.’
나도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는 통로뿐. 도저히 끝이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들어온 지 꽤 오래된 탓에 배고픔을 호소하는 사람도 간간이 나오고 있었다.
더욱이 용변을 보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마 여기서 용변을 보고 싶어도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여서 차마 용변을 보지 못하고 참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특히 여자들이 곤란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 통로를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강석이 나한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현이 씨,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니요?”
“아까부터 계속 괴물이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혹시 우리가 다 잡은 건 아닐까요?”
확실히 그의 말을 들어보니, 방금 전의 전투 이후로 더 이상 고블린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럼 이 앞에 오염된 괴물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럴 확률이 높으니까 일단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이동하는 건 어떨까 싶은데……. 현이 씨,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강석이 힐끔, 내 등에 업혀있는 한 수진을 바라보며 물어봤다. 여자애 때문에 혹시라도 내 컨디션이 망가졌으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거뜬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습니다. 문제 될 것도 없고요.”
“그럼 다행이네요.”
휴, 작게 안도의 숨을 내뱉은 그는 짝짝! 박수를 두 번 치고는 사람들한테 쉬고 갈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앉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15분 정도 쉰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이네요.”
다시 걷기 시작한 지, 10분 정도 됐을 때 철로 된 문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걸 본 진호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보스 방으로 들어가는 문 같네요.”
“그럼 여기 안에 오염된 괴물인가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네.”
진호와 다은이가 문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강석이 날 향해 눈짓하며 의견을 구했다.
“어쩔까요? 좀 쉬었다가 문을 열까요? 아니면 바로?”
“다들 괜찮다면 바로 엽시다. 여기서 더 쉬면 오히려 몸이 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그 여자애는 잠깐 뒤에 있는 여성분들한테 맡깁시다. 시은 씨, 도와주시겠습니까?”
강석이 차 시은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가 다른 여자들을 데리고 나한테 다가왔다. 이에 나는 등에 업고 있던 한 수진을 그녀들에게 넘겨주고는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그 후, 강석과 함께 문을 열었다.
쿠구궁.
오랫동안 문을 연 적이 없었는지, 철제문이 바닥을 긁으며 뿌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열리기 시작한 문틈 사이로 눈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이라고?’
게다가 동굴 특유의 눅눅한 습기가 아닌 숲속에서 맡는 것만 같은 시원하면서도 청량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서 새어 들어왔다.
강석도 그걸 느낀 듯,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좀 더 힘을 주어서 문을 밀었다.
“아!”
마침내 문이 다 열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놀랍게도 보스 방이 아닌 바깥의 풍경이었다.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본 어두운 통로가 아니었다. 울창하게 뻗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있는 숲이었다.
“밖이라고?”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선뜻 먼저 나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이게 함정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었다. 이에 나는 강석과 눈빛을 주고 받고는 먼저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의 활약을 바탕으로 탑을 오르는 자의 적성을 결정합니다.]
[탑을 오르는 자, 김 유현의 적성은 기만자입니다.]
[적성 : 기만자를 부여받습니다.]
[상태창이 갱신됩니다.]
[스킬 슬롯을 4개 부여받습니다.]
[스킬 : 연기(랭크 D)를 획득합니다.]
[스킬 : 진실 속 거짓(랭크 C+)을 획득합니다.]
‘뭐?’
띵, 소리와 함께 눈 앞에 익숙한 알림 문구들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상태창을 연 다음에 확인해 봤다.
[이름 : 김 유현]
[국적 : 한국]
[성별 : 남성 (25)]
[적성 : 기만자]
[칭호 : 용의 반려]
[힘 : 83(+10)] [반사 신경 : 86(+10)] [체력 : 107(+10)] [마나 친화력 : 98(+10)] [행운 : 97]
<보유 스킬="" (2="" 4)=""/>
<보유 장비="" (0="" 0)=""/>
<보유 아이템="" (0="" 0)=""/>
‘이런 식이었나…….’
적성으로 기만자를 받을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입맛이 조금 썼지만, 이내 나는 침착하게 스킬들도 살펴봤다.
[스킬 : 연기(랭크 D)]
[효과 : 능숙하게 거짓을 연기할 수 있습니다. (행운에 따른 보너스 효과가 존재합니다.)]
[스킬 : 진실 속 거짓(랭크 C+)]
[효과 : 거짓말에 진실을 섞었을 때, 상대방이 속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행운에 따른 보너스 효과가 존재합니다.)]
‘진짜로 기만자네.’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돌리는데, 나를 뒤따라 밖으로 나온 강석이 감탄성을 터트리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도 나처럼 눈앞에 나타난 알림 문구를 본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상태창을 읊조리더니, 이윽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이 씨도 보셨습니까?”
“네, 봤습니다.”
“하, 적성이라니……. 전 지휘관이란 걸 받았는데, 현이 씨는요?”
“전 레벨 업 플레이어라는 적성을 받았습니다.”
[연기 스킬이 발동됩니다.]
[행운에 따른 보너스 효과가 부여됩니다.]
[행운이 당신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습니다. 상대방이 당신의 연기력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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