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0화 〉 [뜻 밖의 상황]
* * *
“케엑!”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덕분에 순식간에 다른 고블린의 이목이 나한테 집중됐다. 녀석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날 향해 적의를 쏟아냈다.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육이 긴장되고, 숨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고작 이걸로 멈출 순 없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켠 나는 내 앞을 막고 있는 고블린을 향해 나무 봉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파각! 소리와 함께 나무 봉이 부러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당연히 얻어 맞은 고블린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저 멀리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켁! 켁!”
이를 본 몇몇 고블린들이 겁을 먹은 듯,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지금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핀 나는 아직 전의가 꺾이지 않는 거로 보이는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가슴팍을 노리고 나무 봉을 찔러 넣은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블린이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뒤로 넘어졌다. 뒤늦게 쿵, 하고 땅바닥에 뒤통수를 찧는 소리도 들렸다. 놈이 거품을 물며 부들부들 몸을 떠는 걸 확인한 나는 다음으로 여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고블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륵! 케르륵…….”
“켁. 케륵!”
고블린들이 더 크게 동요했다. 이전과 같은 노골적인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녀석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나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살펴봤다.
‘인질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에 고블린들이 여자를 인질로 썼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속으로 안도한 나는 다시 다리에 힘을 줘서 고블린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고블린들 또한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저항했다.
퍽!
또다시 묵직한 타격음이 통로 안에 울려 퍼지고, 등 뒤에서 정신을 차린 듯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정신 차려요! 이대로 현이 씨, 혼자서 싸우게 할 생각이에요? 어서 움직여요!”
“젠장, 미치겠네!”
“현이 형, 기다려요!”
“오빠, 우리랑 같이 싸워요! 혼자 싸우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강석의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블린들이 더더욱 날뛰며 어떻게든 나를 쓰러트리려고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이럴 땐 도망쳐야 하는 게 맞지 않던가? 하지만 녀석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절대로 뒤돌아 도망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게 강제로 떠밀리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탑 때문이겠지.’
나는 날 둘러싸려는 고블린들을 하나둘 쓰러트리며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고, 이윽고 강석을 선두로 사람들이 내 옆에 서자 순식간에 주변에 어지러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악을 쓰며, 2인 1조가 되어 고블린들을 구석으로 몰랐고 고블린들은 어떻게든 사냥당하지 않으려는 듯 발악을 했다.
“내려쳐! 어서!”
“동은이 오빠, 피해요!”
“케엑!”
이런 상황에서 경험치 몰아주기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고블린의 숫자를 하나라도 더 줄이고자 전력으로 나무 봉을 휘둘러서 쓰러트렸고, 나는 혹시라도 다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바쁘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구해줬다.
그리고 이처럼 고블린들과 뒤엉켜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고블린의 시체로 뒤덮였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스물에 가까운 고블린의 시체를 보고 있자니 약간 속이 울렁거렸다.
“하아! 하아! 우윽.”
“우엑.”
내가 이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몇몇 사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또 몇몇은 긴장이 확 풀린 듯,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기까지 했다. 나는 다친 사람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쓰러져 있는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으, 으으…….”
여자의 상태는 보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어깨와 팔에 심한 상처가 나있었고, 피부에는 구타를 당해서 생긴 멍과 손톱에 할퀴어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건, 몸에서 심한 열이 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급한 대로 윗옷을 벗은 다음에 밑부분을 길게 찢어서 붕대로 썼다.
“현이 씨, 어때요?”
그 때, 강석이 나한테 다가와서 물어봤다. 이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상처 때문인지 열이 심합니다. 혹시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그게, 저도 돕고 싶지만 약이 없어서…….”
혹시나 싶은 생각에 물어봤지만, 그라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급한대로 지혈만 해주고는 벗은 옷을 여자에게 입혀주었다. 아까 고블린들한테 옷이 찢긴 탓에 거의 다 벗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입고 있던 옷을 주고나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피부 위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추운 건 아니었기에 딱히 무리는 없었다.
“몸……. 좋으시네요.”
“네?”
“아, 아뇨.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기가 한 말을 황급히 얼버무린 강석은 이내 주변에 죽어있는 남녀를 살펴봤다.
두 사람 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당한 모양인지, 시체가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다. 다만, 죽은 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았다.
‘만약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그랬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다 못 해, 나 혼자서 움직였다면? 하지만 그건 결국 결과론에 불과했다. 더욱이 나 혼자서 움직였다면 강석 일행이 버티질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이 씨, 혹시 자책하고 계십니까?”
문득 강석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강석 씨는요?”
“저도요. 근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가 뭐 마물 사냥꾼들처럼 특별한 힘을 가진 능력자도 아니고, 어떻게 전부 다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우리 코가 석 자인데. 휴.”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비틀거리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에 고개를 돌려 보니, 다은이가 조금 화난 표정으로 서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오빠, 정말로 미쳤어요? 아무리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다짜고짜 그렇게 막 뛰쳐나가면……! 다신,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맞아요, 형. 너무 위험했어요.”
“지금까지 현이 씨 덕분에 잘 살아남긴 했는데,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우는 사람, 화내는 사람, 웃는 사람. 다들 저마다 표정이 달랐지만, 그래도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안함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운 줄 알면 됐어요.”
고맙다는 내 말에 다은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힐끔 나를 쳐다보는데, 어째선지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이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더 뒤에 서있는 다른 여자들의 얼굴도 빨갰다. 이에 고개를 살짝 숙여보니, 그제야 내가 윗옷을 벗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흠흠, 근데 형 옷은 어쩌고 왜 벗고 있어요?”
“필요한데 썼지.”
내가 손으로 바닥에 눕혀둔 여자를 가리키자, 다들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까요?”
“차 시은 씨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아, 그러네요. 제가 가서 불러올게요.”
차 시은의 이름이 나오자, 진호가 서둘러 통로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자 무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약간 시간이 지나자, 차 시은이 진호와 함께 나타났다. 그녀는 기절한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아니나 다를까 금방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한 수진 양이네요. 그리고 저기 죽은 여자분은 서 미희 씨고……. 남자분은 우윽. 죄송합니다. 제가 비위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하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잠깐 헛구역질을 한 시은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은근슬쩍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마저 입을 열었다.
“……흐읍, 하아. 이제 좀 괜찮네요.”
차 시은이 진심으로 편안해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것도 내 몸을 보면서. 이러니까 살짝 부담되어서 뭐라도 몸에 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옷이라곤 넝마처럼 찢어진 옷들밖에 없었다.
더욱이 죽은 남자의 옷은 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어서 그다지 입고 싶지 않았다.
“저기 죽어있는 남자 분은 아마 고 성호 씨일 거예요. 저번에 봤을 때, 미희 씨랑 계속 쭉 붙어 다녔으니까요.”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은의 추측에 진호가 호기심을 견디지 못 하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모든 사람을 한 장소에 몰아넣었던 1층하곤 다르게 2층에선 친분이 있는 사람끼리 이동시켰어요. 저도 그랬고, 진호 씨도 그랬잖아요.”
“아……. 하긴.”
“다른 분들도 다 그랬다니까, 미희 씨랑 성호 씨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겁니까?”
그 때, 동은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마치 사람이 죽었는데도 계속 통로 안쪽으로 들어갈 거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강석도 그의 뉘앙스를 눈치챈 듯,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긴 했어도, 우리가 죽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한텐 현이 씨가 있고요.”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하자, 다들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진호의 표정이 가장 신나 보였다.
“맞아요, 다들 아까 현이 형이 싸우던 거 봤죠? 레벨 업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살짝 주책맞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정말로 레벨 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뭐. 결과적으론 레벨 업보다 훨씬 더 좋은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으, 으으…….”
그리고 이처럼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니, 바닥에 누워있던 여자. 한 수진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수진을 간호하고 있던 진하가 한 손으로 등을 받쳐주며 물었다.
“으으, 여긴 대체……. 아. 아! 아, 오빠랑 언니는요? 오빠랑 언니는 어딨어요?”
정신이 들자마자, 오빠랑 언니부터 찾는 그녀의 행동에 진하가 곤란하단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자, 자연스럽게 한 수진의 시선이 어느 방향으로 옮겨졌다.
“아, 아, 아아……!”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엔 서 미희와 고 성호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두 사람의 죽음을 확인한 수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더니 이윽고 나한테 왔다. 그녀의 시선에는 원망이 엿보였다. 마치 우리를 탓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오빠랑 언니가 안 죽었을 텐데.”
“…….”
“진짜로, 진짜로 조금이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니가 살아있었는데! 흐윽, 차라리 이럴 거면 오지라도 말지! 왜 날 구해서……!”
짜악!
우릴 향해 원망의 말을 쏟아내던 수진의 고개를 홱 돌아갔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린 사람을 올려다봤고.
“그게 왜 우리 탓이야? 현이 오빠랑 우리가 기껏 목숨 걸고서 구해줬더니, 뭐? 차라리 이럴 거면 오지라도 말지? 지금 장난쳐?”
다은이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한 수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