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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어플-579화 (579/599)

〈 579화 〉 [뜻 밖의 상황]

* * *

“다들 조금만 더 힘냅시다.”

강석이 사람들이 다독이며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출구가 가까워졌다는 희망 덕분인지 그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뒤따르는 사람들도 어두워진 주변 환경에 위축되지 않고,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좋은 현상이었다. 물론 이 기세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게다가 당장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도 별로 없고.’

가진 식량이나 물이 없는 만큼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우리였다. 물론 정말로 급하다면 고블린을 죽이고 고기를 얻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이 과연 그걸 먹으려고 할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도 고블린의 고기를 먹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강석의 선도를 받아 통로를 걷던 우리는 몇 차례 더 고블린과 조우해서 전투를 치렀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나오지 않았지만, 피로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실력이 좋은 강석과 동은, 진호가 고생하게 됐다.

“으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진호가 걱정된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괜찮아?”

“아, 괜찮아요. 형은요?”

“나도 아직까진 버틸만해.”

아직까지라는 말에 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아직까지라……. 우리 이러다가 출구를 발견하기도 전에 다들 지쳐서 쓰러지는 거 아니예요?”

“그러지 않기를 바래야지.”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돌아봤다. 아무리 전투 직후라곤 하지만 사람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진호의 말대로 출구를 발견하기도 전에 다들 지쳐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강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그러자 차 시은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귀를 기울여 보니, 슬슬 여자들도 전투에 참여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다만, 차 시은은 그의 의견이 부정적이었다.

“강석 씨가 말씀하셨다시피 괴물들이 처음보다 더 강해졌잖아요. 근데 그런 괴물을 상대로 한 번도 싸워 본 적 없는 여자들이 잘 버틸 수 있을지……. 오히려 더 큰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되요.”

“저도 그게 걱정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한계입니다. 너무 지쳤어요.”

“차라리 여기서 푹 쉰 다음에 출발하는 건 어떨까요?”

“괴물들이 우리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거라서 그건 힘들 겁니다.”

“하아, 그럼 일단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해볼게요. 혹시 다은 씨처럼 직접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석이 간절하게 말해보지만, 차 시은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두세 명만이라도 좋습니다.”

강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여자들 쪽으로 걸어가서 자기 쪽으로 불러모았다. 강석은 그 모습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며 초조해했다. 그리고 이건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나와 함께 쉬고 있던 남자들도 강석과 똑같이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이 형, 들었어요? 여자들이 더 올지도 모른대요.”

문득 진호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

“도움이 될까요? 다은이도 힘들어하는데.”

진호가 살짝 말끝을 흐리며 진하와 함께 바닥에 앉아있는 다은이를 쳐다봤다. 확실히 다은이가 남자 못지않게 잘 싸우는 편이긴 했지만, 체력이 뒤받쳐주지를 못해서 전투가 끝나면 항상 저렇게 퍼져버렸다.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지 않을까?”

“음, 하긴……. 형, 말을 들어보니까 그게 맞네요. 아! 여자들이 뽑혔나 봐요!”

내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진호가 돌연 목소리를 높이며 여자 무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여자 다섯 명이 차 시은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차 시은은 우리에게 여자 다섯 명을 소개시켜주며 말했다.

“다행히도 이분들이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우선 도희 씨, 자기소개 좀 해주실래요?”

“하 도희예요! 다들 잘 부탁드려요.”

시은의 말에 도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굉장히 세련되면서도 화려한 외관을 가진 여자였다. 게다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들 통로를 한참 동안이나 걷느라 몰골이 말이 아닌데, 도희라는 여성은 특이하게도 땀을 흘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비교가 되면서 예쁘장한 그녀가 남자들의 주목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와, 진짜 이쁘네요. 무슨 사람 얼굴이 저렇게 작아? 형, 봤어요?”

진하와 썸을 타고 있는 진호도 감탄하며 그녀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봤다.

“너 그러다 침 떨어지겠다.”

“쓰읍, 제가 언제 침 흘렸다고…….”

“나중에 진하한테 혼나기 전에 침 좀 닦아.”

“네? 아, 아니! 여기서 왜 진하 이야기가 나와요? 아니, 형. 진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비밀이에요.”

내가 진하의 이름을 꺼내자, 진호가 화들짝 놀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한테 거듭 부탁했다. 진하한테는 제발 비밀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글쎄, 이미 진하는 진호의 모습을 본 듯 싶었다.

슬쩍 뒤돌아보니, 다은이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진호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진하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다들 자기소개가 끝난 것 같으니까, 나무 봉을 쓰는 법을 간단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멀리서 괴물을 밀치기만 하면 되니까, 너무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때, 강석이 짝짝 손뼉을 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여자들에게 나무 봉을 하나씩 건네줬다. 그리곤 학원 선생님답게,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나무 봉에 익숙해질 수 있게 해줬다.

혹시 이 때, 여자들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포기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다들 잘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속성으로 얼추 다 가르쳐주었을 때쯤, 멀리서 킁킁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고블린들이 보였다.

이를 본 강석이 마침 잘됐다는 듯, 남자들을 불러모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일단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니까, 처음에는 짝을 이뤄서 싸웁시다. 우선 도희 씨는 하일이랑 짝을 이루고…….”

그는 두 명씩, 짝을 맞추며 여자들을 배정해줬다. 다행히도 강석, 동은, 하일, 진호, 다은이로 다섯 명이 딱 맞았다.

“현이 씨는 혼자서만 싸우는 건가요?”

그러던 중 도희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현이 씨는 레벨 업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따로 움직여야 합니다.”

“스킬이요? 와, 좋은 건가 봐요?”

“좋기야 좋죠.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움직입시다. 괴물 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요.”

다시 손뼉을 친 강석은 사람들을 이끌고 고블린 쪽으로 다가갔다. 나도 고블린을 처리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인원수가 갑자기 확 늘어나니까, 통로가 조금 비좁게 느껴지네.’

열 명이 넘는 인원이 통로에 일렬로 서자, 조금 번잡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통로가 넓었기에 움직이는 것에는 따로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세 마리의 고블린 중에 한 마리를 적당히 유인한 다음에 구석에서 처리하고는 사람들이 나무 봉으로 몰아놓은 고블린을 죽였다.

‘그래도 사람이 많아지니까, 확실히 편하긴 하네.’

세 마리의 고블린을 모두 처리한 나는 슬쩍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여자 앞에서 멋있는 척 나름 폼을 잡는 하일이부터 실수한 걸 지적하는 동은, 생각보다 잘 싸운다며 칭찬해주는 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에는 싸움이 끝난 직후, 바로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쉬기 바빴던 사람들이 지금은 제법 활기 넘치는 얼굴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여자가 꼈다고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바뀌나?’

괜히 남자가 단순한 생물이라고 놀림 받는 게 아니었다. 쓰게 웃은 나는 홀로 외롭게 서있는 진하에게 다가가서 적당히 말동무를 해주고는 강석의 신호에 맞춰서 다시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아까 보니까 되게 잘 싸우시던데, 밖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동은 씨, 아니. 동은 오빠.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앞으로 계속 쭉 짝이 될 것 같은데.”

“대학생이었어요? 어느 대학이요? 전…….”

통로를 걷는 동안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며 친근감을 조성했다. 남자들도 자기한테 다가오는 여자를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특히나 하일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다은이는…….’

남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다은이를 찾아봤다. 그러자 짝을 이룬 여자와 진하, 이렇게 셋이서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도 이쪽도 별 문제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좋은 분위기 덕분인지, 통로를 걷는 동안 몇 번 더 고블린 무리와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다지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짝은 이룬 여자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일부러 강한 척을 하기까지 했다.

조금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힘들어서 축 처져있는 것보단 보기 좋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석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오히려 흐뭇하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이 통로, 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지?’

아무리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고는 하지만 통로가 너무 길었다. 슬슬 출구가 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 전에 이 구역에 있는 오염된 괴물부터 처리해야 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도중, 문득 내 귀에 케륵, 켁.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들어도 최소 열 마리는 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를 들은 듯, 잡담을 멈추고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들었어요?”

하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러자 강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봉을 세게 움켜쥐었다.

“대충 들어보니까 열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다들 어쩌겠습니까? 부딪혀 보겠습니까? 아니면…….”

“당연히 싸워야죠.”

강석이 말끝을 살짝 흐리는 순간, 동은이 끼어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와 같은 의견이었다.

지금까지 세 마리씩만 등장하다가 갑자기 열 마리 넘게 나타났다. 그 말은 즉, 이 구역의 오염된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다른 분들은…….”

강석이 나를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고, 나는 동의의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지금 싸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현이 씨까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싸워봅시다.”

이윽고 결단을 내린 강석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앞장서서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벅. 저벅.

“케륵! 켁! 케르륵!”

점점 가까워지는 고블린의 울음소리는 평소에 듣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마치 남성이 사정을 하는 것처럼, 쾌감에 허덕이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게다가 사방에서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꿉꿉한 밤꽃 냄새가 섞여서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우리 이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걸까?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진호와 다은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사람들을 앞질러서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장소에 도착한 나는 와락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케륵! 케륵!”

찌익!

저 멀리 죽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 옆에는 고블린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두 사람 다 사람의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앞쪽, 바로 내 눈앞에서 고블린들이 여자를 둘러싼 채로 옷을 찢듯이 벗기고 있었다.

“현이 오빠, 미쳤어요?”

“형!”

몸이 먼저 반응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눈앞의 여자를 구하고자 고블린에게 달려들었고, 녀석들은 내가 휘두른 나무 봉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와 등을 내줘야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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