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5화 〉 [뜻 밖의 상황]
* * *
“형, 저 좀 도와주실래요?”
“당연히 도와줘야지.”
“고마워요. 다은아, 넌 진하랑 같이 뒤에 가있어. 형이랑 내가 처리할게.”
진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앞으로 나서자, 다은이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뭐? 됐거든? 나도 싸울 수 있어. 그리고 너 아까 전에 남녀평등이니 뭐니, 말했었잖아. 이제 와서 말 바꾸기야?”
“아오, 넌 내가 챙겨줘도 어째 지랄이냐.”
“지랄은 너가 떠는 거고.”
둘은 질리지도 않는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진하가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서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이 다은이의 팔에 닿은 순간, 멀리서 고블린이 고개를 홱 치켜들며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냈다.
“케르륵!”
누가 봐도, 고블린이 우리를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이에 나는 다은이와 진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점잖게 말했다.
“둘이 이제 그만 싸우는 게 어떨까?”
“아. 죄송해요, 형.”
“미안, 오빠.”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래도 아주 생각이 없는 애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살짝 웃는 거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우릴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고블린을 바라봤다.
‘몸집이 생각보다 작네.’
고블린이라는 종족 자체가 원래부터 몸집이 작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몸집이 상당히 작은 축에 속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고블린들은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눈앞의 고블린은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한 채, 우리를 먹잇감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래서야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까처럼 저 혼자서 괴물의 팔을 붙잡을까요? 아니면 같이 하실래요?”
“같이 해보자.”
“네!”
남자가 두 명인데, 굳이 위험 부담을 혼자서 끌어안을 필요는 없었다. 물론 내가 보유한 능력치를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나 혼자서도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굳이 여기서 힘자랑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같이 처리하면 자연스럽게 동료애도 생길 테고.’
나는 진호의 발걸음에 맞춰서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케르륵! 케르륵!”
그러자 고블린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울부짖었다.
“어? 형, 저 녀석 겁먹은 거 같은데요? 하긴 다구리 앞에선 장사가 없긴 하죠.”
“너무 방심하진 마.”
“네, 조심할게요. 아, 제가 왼쪽 팔 붙잡을게요.”
고블린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한 진호가 나한테 슬쩍 눈짓을 보내더니, 냉큼 손을 뻗어 녀석의 왼팔을 붙잡았다. 나도 신호에 맞춰 고블린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케르륵! 케르륵! 케르륵!”
이처럼 나와 진호가 고블린의 양팔을 붙잡자, 녀석이 거세게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 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몸집에서 나오는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보니, 녀석의 배가 홀쭉 들어가 있는 게 상당히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
“다은아, 죽여! 빨리!”
그 때, 진호가 다급함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가끔씩 고블린의 발버둥에 무게중심을 잃고 좌우로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잘 좀 붙잡고 있어 봐!”
“나도 이게 최선이거든?”
퍽!
손에 돌멩이를 쥔 다은이가 고블린의 정수리를 강하게 찍었다. 그러자 퍽, 소리와 함께 새빨간 피가 튀었다.
“케엑! 케륵! 케르륵! 케륵!”
고블린이 고통에 게거품을 물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고, 그걸 본 진호가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다은이를 재촉했다.
“한 대 더 쳐! 아직 안 죽었어!”
“나도 알아!”
퍽! 퍽!
돌멩이가 고블린의 정수리에 찍힐 때마다 내 손에 붙잡혀 있던 녀석의 팔에 힘이 없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네다섯 번쯤 찍혔을 때, 드디어 죽은 건지 고블린이 혀를 길게 내밀고서 몸을 축 늘어트렸다.
“하아, 하아.”
“죽은 거 맞지?”
“어, 죽었어. 확실해.”
다은이의 물음에 진호가 질렸단 표정을 지으며 고블린을 놓아주었다. 이에 나도 붙잡고 있던 팔을 놓자, 고블린의 몸이 풀썩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 셋은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다들 다친 데 없지?”
“네, 없어요. 형은요?”
“없어. 다은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은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도요. 아주 멀쩡해요.”
이처럼 다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마지막으로 진하를 바라봤다. 겉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는 죽은 고블린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헛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은이도 진하가 걱정된 모양인지,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등을 두드려주었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지.’
나는 진하가 진정할 때까지 잠깐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이러는 사이에 진호가 죽은 고블린의 시체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이 열심히 뒤지는 그의 행동에 궁금증이 생기긴 했지만, 굳이 입을 열어서 묻진 않았다.
‘내가 묻지 않아도…….’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진하를 진정시킨 다은이가 극혐하는 표정으로 진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너 뭐해? 시체를 왜 뒤적거려? 사이코패스야?”
다은이가 인상을 팍 쓰며 묻자, 진호가 잠깐 손을 멈추고 억울하단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혹시 녹색 보석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녹색 보석?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다은아, 잘 생각해 봐. 마물 사냥꾼들이 사냥하는 괴물하고 우리가 죽인 괴물하고 생긴 거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데, 마물 사냥꾼이 잡은 건 녹색 보석을 주고 우리가 죽인 건 녹색 보석을 안 준다는 게 이상하잖아. 안 그래?”
“뭐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거야? 완전히 다른데. 너 못 봤냐? 마물 사냥꾼들이 잡는 건, 엄청나게 큰 괴물이잖아. 우리가 잡은 이딴 조그만 괴물 말고.”
“그렇긴 해도 최소한 좁쌀만 한 녹색 보석 하나쯤은 줄법하지 않냐? 아니면 하다 못 해 경험치 같은 거라도 좀 주던가. 어째 여기 들어와서 받은 게, 상태창 꼴랑 하나냐? 심지어 별로 도움도 안 되는데.”
툴툴대며 고블린의 시체를 뒤지던 진호가 손을 허공에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어?”
“없더라. 혹시 배를 갈라보면 있지 않을까?”
“미쳤어?”
“그냥 해본 소리야. 아, 진짜 아깝다. 우리도 마물 사냥꾼들처럼 녹색 보석을 얻을 수만 있으면 금방 떼부자가 될 텐데.”
정말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진호의 태도에 다은이가 기겁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러니까 더 억울하지 않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얻는 게 하나도 없잖아.”
“에이, 씨. 니가 그 소리 하니까 갑자기 급 억울해지네.”
“그치?”
드디어 다은이가 공감해주자, 진호가 낄낄대며 웃었다.
나는 그 둘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젓고는 어둑어둑한 통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괴물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빨리 여기서 나가자.”
“어디로요?”
나가자는 말에 진하가 반응하며 나한테 물어봤다. 이에 나는 정면의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가야겠지. 뒤는 내가 왔던 길이니까. 너희 혹시 저기서 온 거야?”
“아뇨, 저희도 형이랑 같은데서 왔어요.”
“그럼 저기로 가는 수밖에 없네.”
이렇듯 길을 결정한 우리는 무작정 통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갈림길이 나오긴 했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괜히 오른쪽, 왼쪽 꼬아서 이동했다간 정말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통로를 걷는 동안 우린 도합 세 차례 고블린과 마주쳤는데, 다행히도 그때마다 별다른 상처 없이 녀석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그 덕분일까? 진호와 다은이의 얼굴에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C 구역에 떨어진 사람이 몇 명쯤 될 것 같아?”
통로를 걷던 중에 진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다은이가 잠깐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차분히 대답했다.
“글쎄? 살아남은 사람이 270명쯤 된다고 했으니까, 한 구역당 27명쯤 있지 않을까?”
“그럼 우리 말고도 23명이나 더 있다는 거네? 다들 대체 어디쯤에 있는 거지?”
“뭐, 찾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우리도 오빠랑 만났잖아.”
다은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하자, 나는 동의한다는 뜻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저기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때, 진하가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공터 같은 장소에 사람들이 두셋씩 무리를 지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도 우리를 발견한 모양인지,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와,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어떻게 말 꺼내기가 무섭게 딱 만나냐?”
그 모습을 본 진호가 살짝 감탄하며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 그러자 공터에 앉아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우리를 맞이해줬다.
“어서 와요. 다들 다친 데는 없죠?”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의 면면을 살펴보고는 다친 사람이 없는지부터 물어봤다. 이에 진호가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무도 안 다쳤어요.”
“다행이네요. 음, 윤 진호 학생 맞죠? 거기 있는 건, 김 다은, 이 진하 학생이고요.”
“어? 우릴 아세요?”
“명단에서 봤어요. 제가 기억력이 조금 많이 좋은 편이거든요. 근데 저 분은……. 한 번도 못 봤네요. 누구시죠?”
여성이 의심 섞인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묻자, 진호가 재빨리 입을 열어서 나를 소개해줬다.
“현이 형이에요. 그 있잖아요. 1층 깼던 유 은혜라는 사람이 찾던 남자요.”
“아……. 그쪽이 현이 씨인가요? 처음 뵐게요. 저는 차 시은이라고 해요.”
자신을 차 시은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날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나는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고자 살짝 웃으며 악수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 현이라고 합니다.”
“어, 음……. 잘 왔어요. 조금 있다가 이동할 거니까, 그동안 잠깐 편하게 쉬고들 있어요.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차 시은의 배려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그동안 쌓였던 긴장을 풀었다.
나도 오랜만에 긴장을 풀며 주변을 살펴봤다. 공터에 있는 사람 수를 세어보니 총 스물한 명이었다. 그중에 남자는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왠지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숫자였다.
“와, 이제야 살 것 같네요. 진짜 인간은 무리를 지어서 살아야 하는 동물인가 봐요. 우리 넷이서만 있었을 땐, 엄청 불안했는데 이렇게 사람들하고 모여있으니까 마음이 놓이잖아요.”
“우리가 무슨 짐승이야? 동물, 동물 이러게? 그리고 난 솔직히 현이 오빠랑 이렇게 넷이서만 있었을 때가 더 편했던 거 같아.”
“아니, 넌 또 왜?”
“너 지금 사람들이 우리 엄청 쳐다보는 거 안 느껴져?”
“그거야 현이 형이 잘 생겼으니까 쳐다보는 거지.”
진호의 말대로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의 대부분이 날 향하고 있었다. 특히나 나를 쳐다보는 여자들의 시선에선 꿀이 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추은아, 다하다.”
“아, 지랄하지 말라고.”
그렇게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우릴 처음 반겨주었던 차 시은이 다부진 체격의 남자와 함께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좀 있다가 출발할 거예요. 현이 씨라고 했죠? 남자들은 앞에서 싸워야 하는데, 괜찮나요? 아니면 혹시 다른 거 할 줄 아는 거 있으세요? 의대를 나왔다던가.”
“아뇨, 몸만 좀 쓸 줄 압니다.”
“그럼 진호 씨하고 같이 이분을 따라가 주세요. 앞으로 할 거 가르쳐주실 거예요.”
차 시은의 말에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절 따라오세요. 안 그래도 남자가 부족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남자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굉장히 친절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우리한테 호의적이었다.
그는 우리를 데리고 장소를 옮겨, 남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세 명 정도 되는 남자가 모여있었다.
“진짜로 남자가 부족했네요…….”
나하곤 다르게 공터의 사람들을 세어보지 않았던 모양인지, 진호가 질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런 진호의 말에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제 여섯 명이 됐으니까, 그럭저럭할만할 겁니다.”
“여자들은 안 싸우는 거예요?”
“진호 씨가 한 번 물어보실래요? 혹시 괴물하고 싸우고 싶은 여자가 있냐고요.”
“…….”
남자의 말에 진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남자가 여섯이나 모였는데, 뭐든 되지 않겠습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워봐야죠.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시은 씨한테 부탁해서 여자 몇 명 뽑고요.”
“네…….”
“자자, 너무 축 늘어지지 말고 다들 자기소개 좀 합시다. 일단 저부터 할게요. 전 김 강석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서른이고, 학원 강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인치고는 상당히 다부진 체격이어서 헬스 트레이너나 이런 쪽 일을 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학원 강사였다.
“전 김 현입니다. 스물다섯이고, 대학생입니다.”
“윤 진호입니다! 스무 살입니다! 대학생이고요.”
나와 진호가 자기소개를 하자, 다른 세 명의 남자도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이 동은이요. 스물여섯이고.”
“박 석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손 하일이라고 합니다. 저도 대학생이에요.”
같은 대학생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하일이란 이름의 학생이 유독 우리를 살갑게 대해줬다. 진호도 하일이 마음에 든 듯, 하하 웃으며 악수까지 나누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