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4화 〉 [뜻 밖의 상황]
* * *
∴ ∵ ∴ ∵ ∴
[멸망한 세계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탑을 오르는 자, 김 유현에게 걸려있는 모든 마법이 해제됩니다.]
[상태창이 갱신되었습니다.]
‘마법이 해제됐다고? 내가 언제 마법을……. 아.’
마법이 해제되었다는 알림 문구에 잠시 의아해하던 나는 곧 어떤 마법이 풀린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운피레아가 걸어준 마법이 풀린 거구나.’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바꾼 다음에 얼굴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어쩔 수 없나.’
혀를 내두르며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나는 이번에 새롭게 갱신된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이름 : 김 유현]
[국적 : 한국]
[성별 : 남성 (25)]
[적성 : ]
[칭호 : 용의 반려]
[힘 : 83(+10)] [반사 신경 : 86(+10)] [체력 : 107(+10)] [마나 친화력 : 98(+10)] [행운 : 97]
<보유 스킬="" (0="" 0)=""/>
<보유 장비="" (0="" 0)=""/>
<보유 아이템="" (0="" 0)=""/>
“용의 반려?”
손을 뻗어서 칭호 항목을 건드리자, 용의 반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타났다.
[용의 반려]
[효과 1 : 힘, 반사 신경, 체력, 마나 친화력이 각각 10 상승합니다.]
[효과 2 : 모든 용 계열 종족의 호감도가 한 단계씩 상승합니다.]
[효과 3 : 회복력이 2배 상승합니다.]
“사기네.”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만큼 파격적인 효과들이었다. 이게 정말 맞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입수 난이도를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효과들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기적이란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멸망한 세계의 탑이 도로 뺏어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어둑어둑한 통로를 살펴봤다.
‘1층보다는 밝아졌는데.’
1층에 비해서 2층은 상당히 밝은 축에 속했다. 덕분에 스마트폰의 불빛으로 통로를 비추지 않더라도 충분히 안쪽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살펴본 뒤에 숨을 살짝 들이켰다. 그러자 1층과는 다르게, 인적이 없는 곳 특유의 쾌쾌한 곰팡이 냄새 같은 게 나지 않았다. 그걸로 봤을 때, 비교적 최근까지 무언가가 통로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사람이냐, 마물이냐인데.’
여기가 멸망한 세계의 탑이란 걸, 고려해봤을 때 마물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리 생각하니, 통로의 안쪽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뭔지 모를 기분 나쁜 끈적거림으로 느껴졌다.
‘일단 움직여서 사람들부터 찾자.’
가능하면 미니맵을 스킬로 가지고 있는 은혜부터 찾는 게, 가장 좋을 듯 싶었다. 이렇듯 생각을 끝마친 나는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알림 문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탑을 오르는 자, 김 유현의 입장을 확인합니다.]
[현재 배정된 구역은 C 구역입니다.]
[탑 2층의 오염된 괴물을 처치하십시오.]
([조언] 2층은 총 1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해당 구역의 오염된 괴물을 처치할 시, 다른 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10개의 구역에 존재하는 오염된 괴물을 모두 처치할 시, 2층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뭐야?’
1층과는 확연하게 다른 클리어 조건에 살짝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설마 구역이 10개나 될 줄이야. 이래선 저번처럼 하루만에 뚝딱 깰 수가 없을 듯 싶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C 구역에 은혜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계획이 무너져버릴 줄이야.’
아무래도 은혜를 찾는 건, 힘들 듯 싶었다. 물론 높은 행운 수치 덕분에 어쩌면 은혜도 마침 나와 같은 C 구역에 떨어져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말로 운이 좋았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는 사람들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5분 정도 걷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들어보니, ‘빨리 죽여!’라거나 ‘나보고 대체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서로에게 소리치는 듯 했다.
‘싸우고 있는 건가?’
1층에선 좀비를 상대로 도망치기 바빴던 사람들이 2층에선 서로 협력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건 즉, 그만큼 할만한 상대라는 뜻이었다. 물론 막다른 길에 몰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그렇게까지 급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빠르게 뛰었다.
“뭐해! 빨리 죽이라고!”
역시나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서 싸우고 있었다.
“케륵! 케륵!”
그리고 상대는 고블린 한 마리였다.
“으아아아!”
퍽! 퍽!
남자가 고블린의 양팔을 붙잡아 몸을 억누르고 있는 사이에 돌을 든 여자가 고함을 지르며 녀석의 정수리를 마구잡이로 찍었다. 퍽, 퍽,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새빨간 피가 사방에 튀고 고블린의 눈깔이 반쯤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가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그렇게 한참 동안 고블린의 정수리를 돌로 내려찍은 끝에 더 이상 녀석이 움직이지 않자, 여자가 돌을 땅바닥에 떨어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도 완전히 지친 듯, 뒤로 벌러덩 드러누우며 가쁘게 숨을 토해냈다.
“하아, 하아, 하아.”
“진짜 죽을 거 같아. 토 나와.”
진절머리가 난다는 식으로 여자가 말하자, 숨을 헉헉대던 남자가 낄낄대며 대꾸했다.
“그런 거치고는 잘 죽이던데?”
“지랄 말고 다음엔 네가 죽여.”
“괴물은 누가 붙잡고?”
“아오, 어째 한 마디도 안 지냐? 좀 져주면 안 돼?”
“응, 남녀평등이야.”
그렇게 고블린을 처치한 남녀가 서로 낄낄대며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에 내가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말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두 남녀가 한껏 불안한 얼굴을 한 채, 날 향해 쳐다봤고 한창 헛구역질을 하고 있던 여자도 새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었다.
“누구야!”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위압적으로 소리치자, 나는 그들이 나를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윽고 내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자, 세 남녀가 작게 감탄하며 얼굴을 붉혔다.
“더럽게 잘 생겼네. 누구지? 본 적 없는데……. 너흰 본 적 있어?”
“아니, 없어.”
“나, 나도…….”
까칠한 인상의 여자가 다른 두 명에게 물어보자, 남자와 여자애 둘 다 모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문인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 더욱 강해졌다. 아무래도 다들 1층에서 탈출한 직후, 서로 안면을 트면서 친해진 모양이었다.
‘이러면 나 빼고 다들 서로 얼굴을 안다는 건데.’
그나마 은혜와 윤이가 나를 알고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얼굴이 변하기 전이었다. 지금 내 얼굴을 보고도 아는 척을 해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유 은혜하고 신 윤을 아십니까?”
“네? 은혜요? 설마 1층을 깬 유 은혜를 말하는 거예요?”
내 입에서 은혜의 이름이 나오자, 여자가 살짝 당황한 듯 되물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은혜가 무사히 1층을 깬 모양이네요. 저는 그 때, 같이 있었던 현이라는 사람입니다. 혹시 은혜한테서 못 들으셨나요?”
정말로 다행이란 식으로 태연하게 연기한 나는 능청스럽게 물어봤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잠시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던 세 명의 남녀가 거의 동시에 감탄성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은혜 씨가 현이란 남자를 찾는 걸 본 것 같아.”
“첫날에 난리였잖아. 현이 오빠, 현이 오빠 이러면서. 설마, 그 현이 오빠가 그쪽이었어요?”
“와…….”
어느샌가 세 남녀의 시선에서 경계심이 많이 사라졌다. 오히려 호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아, 오세요.”
내가 허락을 구하기가 무섭게 세 남녀가 날 향해 손짓하며 반겨주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죽어있는 고블린을 살펴봤다. 놈은 완전히 숨통이 끊어진 듯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1층은 좀비, 2층은 고블린인가.’
물론 어쩌면 고블린 말고도 다른 마물이 더 있을지도 몰랐지만, 만약에 2층에서 고블린만 나온다고 한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C 구역을 정리할 수 있을 듯 싶었다. 하지만 목숨이 걸려있는 일인 만큼, 혼자서 무리하게 움직이기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안전하게 깨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게다가 다들 착해 보이고.’
살짝 웃은 나는 세 남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세 분이 다인가요?”
“아, 네! 와, 근데 형이 웃으니까 분위기 장난 아니네요. 무슨 연예인 줄 알겠어요. 혹시 어디 소속사 출신이세요?”
남자의 말에 다른 두 여자가 호기심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아뇨, 일반인입니다. 근데 다들 다친 곳은 없나요?”
“네, 네. 전 괜찮아요. 다은이랑 진하는? 너네는 다친데 없어?”
다은이란 이름으로 불린 여성은 까칠한 인상의 여자였고, 진하는 아까 헛구역질을 하던 여자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두 여자 모두 다친 곳이 없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괜찮대요. 형은요?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제가 스무 살이니까, 어지간하면 형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제가 스물다섯이니까, 더 많긴 하네요.”
“아, 그럼 편하게 불러주세요. 말하는 것도요. 진호라고 부르시면 돼요.”
진호의 말에 다른 여자애들도 자기소개를 했다.
“김 다은이에요. 나이는 쟤랑 똑같고, 대학 동기예요.”
“이 진하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오빠.”
착하게 생긴 것만큼이나 애들 모두 붙임성이 좋았다. 아니면 잘 생겨진 얼굴 덕분인가? 아무튼 나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한 명 한 명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김 현이라고 해. 나이는 스물다섯이고.”
“오빠는 어쩌다가 탑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난 그냥 길을 걷다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너희는?”
내 소개를 끝마치자마자 질문을 던지는 다은이의 태도에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리곤 애들을 바라보며 되묻자, 진호가 잔뜩 신이난 얼굴로 말했다.
“저도요. 진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그나마 다은이랑 진하가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에 저 혼자서 탑에 빨려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으.”
진호가 소름 끼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그걸 듣고 있던 다은이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너 꼭 말하는 게, 우리가 다 함께 끌려와서 다행이란 식으로 말하는 거 같다?”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너도 탑에 처음 빨려 들어왔을 때, 주변에 나랑 진하 있어서 안심했지? 아니야?”
“으음, 그렇긴 하지만…….”
“이게 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산 거 아니냐? 아, 혹시 현이 형은 유 은혜랑 같이 들어온 거예요?”
아까부터 보니, 진호는 나와 은혜의 사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들에게 있어서 1층을 깬 유 은혜는 영웅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아니, 난 따로 들어왔어. 탑 안에서 우연히 만나서 친해진 거지.”
“엄청 운명적이네요.”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진하가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이게 운명적인 건가? 하긴,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서 죽을 뻔했던 은혜와 윤이를 내가 구해준 것이니, 운명적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터트리고는 애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너희들 뭐 무기가 될 만한 건 없어? 밖에 나가서 하나도 안 가져온 거야?”
내가 알기론 정부에서 탑을 오르는 자들에게 방탄복과 총기 등을 지급해준 거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애들의 상태는 비무장 상태였다. 무기는커녕, 방탄복조차도 입고 있지 않았다.
“아, 그거요? 총이랑 이것저것 받긴 했는데, 2층에 입장하자마자 모두 뺏겼어요. 허락되지 않은 물건이라고 하던데요? 아, 생각하니까 열 받네. 대체 무기도 없이 어떻게 깨란 건지.”
진호가 씩씩대며 말하자, 곁에 있던 다은이가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는 어디서 뭐 하고 있었어요? 보니까 1층 깼을 때, 밖으로 나온 것 같지 않던데.”
다은이가 의심 섞인 목소리로 나를 추궁하자, 나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 은혜와 윤이를 구하고 모래로 된 늪에 빠졌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애매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여기에 와있더라고.”
“어? 그러면 형, 설마 1층에서 죽었던 거예요?”
“글쎄? 마지막에 숨이 조금 막히긴 했는데, 정말로 내가 죽었다는 감각은 없어서……. 뭐랄까,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만약에 1층에서 죽었던 사람이 2층에서 부활한다면, 조만간 나 같은 사람을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오오…….”
부활이란 말에 애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하지만 너무 내 말을 맹신하는 건, 곤란했기에 일부러 짐짓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니까, 죽지 않게 조심해. 목숨은 소중하니까.”
“네.”
그래도 다들 말이 통해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몇 번 더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코를 킁킁대는 소리가 들렸다.
킁킁. 케르륵. 케륵.
그 순간, 다들 입을 꾹 다물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찍이 한 번 들어본 소리인 모양인지, 진호와 다은이가 각오를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하는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웃으며 서로를 소개하고 수다를 떨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현실의 괴리감 때문인지, 다들 말은 안 해도 무척이나 힘겨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