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573화 (573/599)

〈 573화 〉 [뜻 밖의 상황]

* * *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눈이 퉁퉁 부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목도 쉰 것처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훌쩍, 코울음 소리를 내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풀고 힘겹게 일으켰다. 그러자 나를 안아주고 있던 언니가 팔을 풀어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아?”

그러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그게 너무나도 안심되어서 바보처럼 또 눈물이 났다.

“흐윽!”

“어? 어? 뭐야, 내가 뭐 잘 못 한 거야?”

당황한 언니가 다급히 내 머리에서 손을 떼어내자, 뒤에 서있던 오빠가 낄낄 웃으며 ‘네가 무서웠나 보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언니가 사납게 쏘아보며 ‘죽을래?’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나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어.’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은 나는 언니와 오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기…….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말다툼을 하고 있던 언니와 오빠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맙긴 뭘. 서로 돕고 살아야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말투로 대답한 언니는 몸을 일으키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난 서 미희야. 쟤는 고 성호고. 넌?”

“하, 한 수진이예요.”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열일곱이요……. 언니랑 오빠는요?”

“나랑 쟤, 둘 다 스물넷이야.”

미희 언니가 씩 웃으며 말하자, 성호 오빠가 징글징글하단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언니와 오빠는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 같아 보였다. 문득 호기심이 든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언니하고 오빠는……. 서로 아는 사이세요?”

“응, 같은 학교 나왔거든. 중학교 때부터.”

미희 언니의 말에 성호 오빠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악연이지.”

“그건 내가 할 소리고.”

말로는 악연이라고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강한 신뢰가 느껴지고 있었다. 왠지 언니하고 오빠가 사귀면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이대로 계속 놔둔다면 서로 언젠가 사귀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언니와 오빠를 바라보던 나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건가요?”

“글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나도 여기에 와서 본 사람이라곤 성호랑 너밖에 없어서.”

미희 언니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계속 이야기를 나눠보니, 언니와 오빠 모두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언니와 오빠는 나하고 다르게 탑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함께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도 친한 사람이 있었다면 언니하고 오빠처럼 같이 들어왔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친한 사람을 한두 명쯤 만들어두는 거였는데, 가족과 시간을 보내느라고 그러질 못했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오긴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게다가 설혹 시간을 되돌려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다른 사람과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다들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평범하게 대화하면서 친분을 쌓는다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언니가 지켜줄 테니까. 언니랑 쟤가 얼마나 센지 봤지?”

내가 축 처져있자, 미희 언니가 내 등을 '탁' 치며 말했다. 성호 오빠도 내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일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1층에서도 살아남았는데 2층이라고 해서 뭐 다르겠어? 게다가 2층도 1층처럼 우리가 꼭 안 깨도 되는 것 같았고.”

“아, 맞아! 그러네, 우리가 꼭 깰 필요 없었네? 그럼 그냥 어디 확 숨어있을까?”

성호 오빠의 말에 미희 언니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음식은 어쩌고?”

“하루쯤은 굶어도 되잖아. 1층 깰 때도 몇 시간 안 걸렸던 것 같은데.”

“그거야 1층은 출구만 찾으면 끝나는 거였잖아. 근데 2층은 구역이 열 개나 되는 데다가 오염된 괴물인가 뭔가도 처치해야 하잖아. 이렇게 조건이 많이 붙어있는데 하루 만에 깰 수 있겠냐?”

“그럼 어쩌자고?”

“계속 걸어가야지. 그러다가 괴물을 만나면, 상황 봐서 우리가 죽이자.”

성호 오빠가 호기롭게 말하자, 미희 언니가 살짝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고. 근데 겨우 2층인데, 설마 깨지도 못할 정도로 어려울까? 안 그래?”

오빠의 말에 언니가 허, 하고 어이없단 웃음을 터트리며 핀잔을 줬다.

“야, 이게 무슨 게임이냐? 깨고 말고 하게?”

“상태창까지 나오는 거 보면 거의 게임이지. 솔직히 말해서 너도 상태창 처음 봤을 때, 엄청 좋아했잖아.”

“좋긴 좋았지. 딱 좀비가 나오기 전까지만.”

“아, 그 때 생각하니까 조금 쫄리긴 하네.”

성호 오빠의 말에 미희 언니가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쓸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걸을 수 있겠어? 힘들면 내가 부축해줄까?”

“아뇨!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어요. 다친 건, 팔이니까요.”

내가 얼른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언니와 오빠가 나를 대견하단 식으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도 힘들면 바로 이야기하고. 괜히 억지로 참으면 나중에 더 큰일나니까. 알았지?”

“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괴물한테 물어뜯긴 팔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여기서 우는 소리를 낼 순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성호 오빠의 말대로 음식을 찾는 게 중요했다.

하루 이틀 정도는 음식 없이 버틸 수 있을진 몰라도, 삼 일째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또 물도 필요했다. 미희 언니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나보고 걸을 수 있겠냐고 물어본 것일 것이다.

잠깐의 휴식을 끝으로 우린 다시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가는 중간에 또다시 멀리서 코를 킁킁대며 돌아다니고 있는 작은 괴물과 마주치긴 했지만, 이번에도 언니와 오빠가 아주 손쉽게 죽였다.

“얘는 몽둥이를 들고 있네? 이거 나 쓴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죽은 괴물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손에 넣은 언니가 싱글벙글 웃으며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그리고 이처럼 무기를 손에 넣은 언니는 오빠와 함께 적극적으로 괴물을 사냥했다. 계속 한 마리씩 괴물이 나오고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왠지 이 기세라면 C구역에 있는 오염된 괴물로 처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니와 오빠의 얼굴에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다시 10분쯤 지나자, 우리의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케르륵! 케륵!”

“케륵!”

처음에는 한 마리씩만 보이던 괴물들이 갑자기 두세 마리씩 몰려다니더니, 어느 순간부터 대여섯 마리씩 무리를 이루며 우리를 찾아다녔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코를 킁킁대는 짐승의 소리만 들려도,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덕분에 우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쫓기듯 왔던 통로를 되돌아가야만 했다.

“허억, 헉. 징그러운 새끼들.”

“우리가 괜히 벌집을 쑤신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하지마.”

성호 오빠의 걱정에 미희 언니가 톡 쏘아붙이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리고 이처럼 괴물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잠깐 숨을 돌리려는데, 또다시 멀리서 코를 킁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겠네.”

“어쩌지? 튈까? 수진아, 더 뛸 수 있겠어?”

언니가 걱정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허억, 헉. 네, 괜찮아요. 네, 더……. 뛸 수 있어요. 하아.”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은 무리였다. 처음에는 그저 욱신거리는 정도에 불과했던 팔이 지금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데다가, 오한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못 뛰겠다고 하면, 언니하고 오빠한테 민폐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애써 괜찮은 척하며 대답했는데, 성호 오빠가 내 상태를 눈치챈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미희야, 그냥 여기서 처리하자. 더 도망치는 것도 힘들 것 같고……. 게다가 우리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우릴 쫓아오는 괴물의 숫자가 더 많아지고 있잖아. 그러니까 더 쌓이기 전에 여기서 처리하자.”

오빠의 말대로 코를 킁킁대는 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들렸다.

열 마리? 어쩌면 그것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왈칵 몰려왔다.

“그래, 그러자. 수진아, 넌 뒤에 가서 숨어있어. 금방 끝낼 테니까.”

“어, 언니…….”

내가 미희 언니의 팔을 붙잡으며 부르자, 옆에 서있던 성호 오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미희 말대로 뒤에 가서 숨어있어. 싸우는 건, 우리한테 맡기고. 게다가 너 지금 머리가 불덩이 같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뭐? 힉! 이게 뭐야? 너 지금 엄청 열나잖아. 괜찮은 거 맞아?”

오빠의 말에 미희 언니가 내 이마에 손을 대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이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언니와 오빠를 안심시켰다.

“저,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괜찮기는 무슨! 내가 힘들면 말하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어휴, 안 되겠다. 얼른 뒤로 가서 쉬고 있어. 괴물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혹시 괴물한테 들키면 바로 소리치고. 알았지?”

“네.”

“좋아, 얼른 가봐.”

고개를 끄덕인 언니가 내 등을 살짝 밀며 말했다. 그리고 이처럼 밀려난 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서 통로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사실 숨었다고 말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몸이 훤히 드러난 상태였지만,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었다.

“하아.”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에서 나는 열 때문인지, 눈앞이 핑핑 돌았다. 괴물에게 물렸던 팔도 너무 아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가 아픈 만큼, 언니와 오빠가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언니하고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무사히 돌아온 언니와 오빠를 웃으면서 반겨주고 싶었다. 나는 언니, 오빠가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오빠하고 언니, 모두 괴물들한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아니야!’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곤 손으로 귀를 막고 숫자를 셌다. 일부터 십까지. 다시 십부터 오십까지. 오십부터 백까지 셌을 무렵, 나는 슬쩍 눈을 뜨고 귀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삐이­, 하고 이명이 울렸다.

“아윽.”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아픈 팔을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언니와 오빠를 찾기 위해서 힘겹게 한 걸음을 발을 뗐다. 그러자 멀리서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끈적끈적해서 기분 나빴다.

“어, 언니……? 오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어서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케륵…….”

그 때, 멀리 않은 곳에서 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통을 참는 것처럼 억눌린 소리였다. 상처를 입은 걸까? 그렇다면 언니랑 오빠가 이겼다는 걸까?

“케르륵. 케르륵……!”

한계에 가까워진 짐승이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 이긴 거구나. 언니와 오빠가 이긴 거다. 짐승을 쓰러트리고 숨통을 끊으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아, 다행이다.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싫어…….”

미희 언니?

언니의 목소리였다.

대체 뭐가 싫단 거지? 설마 오빠보고 괴물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걸까? 가여워서? 하지만 그런 거 치고는 언니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짙은 혐오감도 느껴졌다. 항상 당당했던 언니의 목소리가 울음 소리로 젖어 있었다.

“시, 싫어……. 커흑!”

“케륵. 케르륵……! 케륵!”

“아, 아아…….”

비릿한 냄새가 텁텁한 동굴 공기에 섞여 풍겨져 왔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언니가 괴물들에게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럼 오빠는? 오빠는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괴물들에게 둘러싸인 채,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미희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의 머리에선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깨는 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살점이 크게 뜯겨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성호 오빠는…….

“아…….”

오빠가 괴물들에게 뜯어먹히고 있었다.

아그작. 아그작. 섬뜩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원한 적도 없었다.

꿈일 거야.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뒷걸음질 친 순간, 툭 하고 돌멩이가 뒤꿈치에 차였다.

“케륵? 케륵!”

그 순간, 괴물 한 마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주변에 있단 다른 괴물들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십 개의 샛노란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도, 도망쳐……. 커흑!”

언니가 나한테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주변에 서있던 괴물들이 언니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목덜미를 날카로운 이빨로 깨물었다.

새빨간 피가 사방에 튀고, 언니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언니의 머리를 발로 짓밟은 괴물이 침을 질질 흘리며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었다. 언니는 반항하지 못하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자그맣게 신음만을 흘렸다.

“그만……! 제발, 그만해!”

그 모습을 본 내가 괴물들에게 애원해보지만.

“케르륵! 케르륵!”

돌아오는 건, 조롱뿐이었다. 녀석들은 마치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만해! 이제 그만해, 제발……!”

꿈이라면 깼으면. 제발 꿈이었으면.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보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들은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고, 나는 도망칠 생각도 못 한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아…….”

“케륵!”

괴물이 내민 손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아악!”

비명이 저절로 터져 나올 만큼 아팠다. 눈물이 시야가 뒤덮고, 그 사이로 쓰러져 있는 미희 언니와 성호 오빠가 보였다. 둘 다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괴물들은 언니와 오빠를 둘러싸고서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언니, 오빠…….’

처음부터 나도 함께 싸웠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나도, 이런 나라도 뭔가 했다면…….

“케르륵!”

찌익!

괴물이 손을 내밀어 옷을 찢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름 끼치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괴물이 입을 크게 벌려 내 어깨를 깨물었다.

“아아악!”

화상을 입는 것만 같은 통증에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괴물은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살점을 물어뜯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옆에 있던 괴물이 내 머리를 발로 밟았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또다시 미희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 언니…….’

언니가 죽은 것처럼 보여서 도저히 소리 내어 부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불렀는데, 언니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홀로 남겨진다는 공포에 괴물들에게 애원해봤다.

“어, 언니를 살려주세요! 제발, 이렇게 빌 테니까! 살려주세요, 언니를……! 아악!”

“케륵! 케륵!”

하지만 녀석들은 더 이상 언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샛노란 눈동자가 내 몸을 훑고, 끈적한 침이 피부 위로 떨어졌다.

혐오감에 몸서리쳐도, 도망칠 수 없다.

‘아…….’

끝없는 절망감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질 정도였다.

‘내가, 내가 강했다면…….’

그랬다면 언니하고 오빠가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후회가 끝도 없이 몰려왔다. 분함에 몸부림도 쳐보고, 주먹을 휘둘러 보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괴물들의 조롱과 발길질뿐이었다.

찌익!

죽은 언니를 탐하던 괴물들이 나한테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옷을 찢고, 녀석들이 들이민 이빨이 살점 깊숙이 박혔다. 끔찍한 고통에 이젠 비명을 내지를 힘마저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끅끅대며 숨을 힘겹게 들이켜는 게 고작이었다.

“현이 오빠, 미쳤어요?”

“형!”

그 때, 멀리서 누군가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콰직!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남자가 나무 봉을 휘두르면서 괴물들을 하나둘 쓰러트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