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4화 〉 [뜻 밖의 상황]
* * *
“우후후훗.”
“신령님? 잠깐만요, 신령님?”
여성의 애타는 부름에도 신령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내가 마음에 든다는 듯, 강하게 끌어안은 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신령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곤란하단 어투로 말했다.
“신령님이 저를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네요.”
“너,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신령님이 나를 떠나실 리가 없잖아!”
여성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순간 지하철 안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너무 큰 소리로 떠드는 건, 안 좋은데요.”
“지금 그걸 신경 쓸 때야?”
씩씩대며 나를 다그치는 여성의 태도에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고는 신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령님, 다시 저 분에게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우후훗. 후흥.”
내 부탁에 신령은 곤란하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내 부탁을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내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모양이었다. 이것도 매니저 어플의 영향인 걸까? 나는 신령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싫으시다는 것 같은데요?”
“으으!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졸지에 신령을 잃게 된 무당이 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더더욱 웅성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우릴 쳐다봤다. 심지어 몇몇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동영상 촬영을 하려고 했다.
‘촬영은 좀…….’
괜히 이런 일로 인터넷에 얼굴이 팔리면 곤란했기에 나는 무당의 손목을 붙잡아서 마침 정차한 역에 내렸다.
“자, 잠깐? 무슨 힘이 이렇게 세?”
이 와중에 무당이 발버둥 치며 빽빽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지하철에서 끌어내리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지하철에서 내린 나는 구석진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 다음에 입을 열었다.
“신령님을 돌려드릴 테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뭐? 그게 정말이야? 하지만 신령님도 네 말은 안 듣잖아…….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신령을 돌려주겠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인지, 무당이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하지만 곧 아까 전의 상황이 떠오른 듯, 자조 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에 나는 무당의 손목을 놓아주며 대답했다.
“방법이야 있죠.”
다만 문제는 나도 이것에 대해서 확신이 별로 없었다.
“엉터리 최면 시계 소환.”
얼마 전에 얻었던 엉터리 최면 시계를 소환한 나는 무당과 신령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과연 먹힐까? 그보다 사람도 아닌 신령에게 통하기는 할까? 하지만 여기서 아무리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이 나도 이렇게 계속 신령을 달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물론 신령이 내 곁에 머물면서 나를 지켜준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득보다 실이 더 많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나 내가 다른 여자와 엮이게 되었을 경우, 신령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독점욕이 엄청 강한 것 같으니까.’
실제로 내가 무당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 신령의 눈초리가 일순간 사납게 변했었다. 물론 이후에는 내 의도를 눈치채곤 도로 표정을 풀긴 했지만.
‘굳이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이렇듯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엉터리 최면 시계의 시계줄을 붙잡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이 시계를 봐주시겠습니까?”
“뭐야? 너 지금……. 설마 최면술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지?”
무당이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자,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뻔뻔하게 말했다.
“맞는데요.”
“허! 그게 통하겠냐? 설령 통한다고 하더라도 신령님한테 통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급기야 무당의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성은 마치 머리가 아프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가 이윽고 손을 내려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곤 살짝 눈동자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신령님을 살펴보더니, 결국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시계를 봐주기 시작했다.
“신령님이 보시니까, 나도 본다. 그래, 본다.”
“음후후.”
신령님과 무당의 눈동자가 회중시계를 따라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신령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령님, 다시 무당에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흐음, 음……. 곤란한 걸. 후후, 아주 곤란한 부탁이야.”
내 부탁에 드디어 신령님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커다란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예상한 대로 연륜이 묻어나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흡사 지체 높은 집안의 어르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내 눈앞에 서있는 건, 많이 쳐줘봐야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시였다.
나이 많은 할머니처럼 말하는 30대 미시라니.
조금 흥분하고 말았다.
“그치만 이런 귀여운 재롱을 부려가면서까지 부탁을 하는 거니까……. 들어줘야겠지?”
이처럼 내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을 때, 신령님이 드디어 결정을 내리고 무당한테로 돌아갔다. 그러자 여성이 뛸 듯이 기뻐하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정말로 되잖아?”
“최면술이니까요.”
내가 살짝 웃으며 대답하자, 무당이 조금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니, 그 최면술이라는 거 말이야. 엉터리 아냐?”
“엉터리라뇨? 설마 안 걸린 건 가요?”
“어? 그야 당……. 읏.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으, 그래! 걸린 것 같네.”
“그렇죠?”
“그래…….”
무당은 누가 봐도, 최면에 걸린 척 연기해주는 게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최면에 걸린 척 해주는 거니까, 최면에 걸린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녀에게 최면을 건 김에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나저나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뭣 좀 물어봐도 될까요?”
“뭘 물어보려고? 이상한 거 물어보는 거면 대답하지 않을 거야.”
“최면에 걸렸는데도요?”
“아니, 그러니까 그거……. 으으, 그래. 알았어. 뭐든지 물어봐. 이번 한 번만이야.”
작은 한숨과 함께 무당이 질문을 허락하자, 나는 일단 그녀의 이름부터 물어봤다.
“이름이 뭔가요?”
“박 혜수.”
“나이는요?”
“서른 하나.”
“정말로요? 엄청 젊어 보여서 이십 대 초반인 줄 알았는데…….”
“나처럼 신통력을 가진 무당은 노화가 엄청 느려. 그래서 젊어 보이는 것뿐이야.”
“신기하네요.”
살짝 감탄한 내가 혜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령님이 살짝 심통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더라도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신령님도 굉장히 젊어 보이세요.’라고 속삭였고 그 말을 들은 신령님은 다행히도 금방 화를 푸셨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만약에 신령님이 진짜로 노해서 저한테 벌을 주셨으면 전 어떻게 됐나요?”
“으음, 만약에 정말로 신령님이 벌을 주셨다면……. 한동안 이유 모를 열병에 시달리며 끙끙 앓아야 했겠지. 그리고 속된 말로 재수가 엄청 안 좋아졌을 거야.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길에서 넘어진다거나, 요리하던 냄비를 실수로 떨어트린다거나 말이지. 최악의 경우에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당해서요?”
“죽을 수도…….”
“…….”
“아니, 이건 진짜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라서……. 신령님, 제 말이 맞죠? 그렇죠?”
내가 말없이 혜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신령까지 끌어들이자, 여태까지 조용히 있던 신령이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혜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아이의 말이 맞단다.”
“들었지? 신령님, 말씀대로 별일 없었을 거야.”
별일 없었을 거라곤 하지만, 만약에 신령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면 한동안 이유 모를 열병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내일 있을 일정에도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괘씸한 마음에 나는 회중시계를 보란 듯이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어쨌든 제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거죠?”
“아, 아니……. 그게…….”
“그게 뭐요? 설마 최면에 걸렸는데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니, 그러니까 그거 최면……. 에휴, 최면……. 그래. 맞아. 죽을 수도 있었어. 근데 어디까지나 극히 낮은 확률이니까.”
“낮긴 해도 죽을 순 있다는 거잖아요.”
“응, 그렇긴 한데…….”
“그럼 저도 정당방위로 나쁜 짓을 해도 되는 거네요?”
“나쁜 짓?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건데?”
“모텔로 가서 알려드릴게요.”
“뭐? 모, 모텔?”
모텔이란 말에 혜수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옆에 서있던 신령님이 질투가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에 나는 살짝 웃으며 신령에게도 말을 걸었다.
“물론 신령님도 함께요. 신령님도 벌을 받으셔야죠.”
“나, 나한테까지……. 정말 나쁜 아이구나. 음후훗.”
나를 나쁜 아이라고 탓하면서도 묘한 웃음소리를 내는 신령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가 정말로 나쁜 아이인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근처의 모텔을 검색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3번 출구 근처에 마침 모텔이 있네요. 거기로 가죠.”
“아, 아니……. 잠깐, 나 아직 할 일도 남아있는데.”
“최면이 덜 걸렸나? 이것 좀 보실래요?”
나를 거부하며 뒷걸음질 치는 혜수의 태도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회중시계를 흔들자, 그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안 통한대도!”
“정말로요?”
“으, 으으! 아니, 아!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그래, 알았어! 따라갈게. 따라갈 테니까, 회중시계 좀 치워!”
“걸린 거 맞죠?”
“걸렸어! 그래, 걸렸으니까 그만 좀 흔들어. 정신 사나우니까!”
고함과 함께 어깨에 힘을 뺀 혜수는 나를 따라 순순히 지하철 3번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3번 출구로 나온 우리는 모델 안으로 들어가서 방을 대실하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긴장했어요?”
“기, 긴장 같은 거 안 했거든?”
“전 긴장했는데. 손이라도 잡아주실래요?”
“하? 뭐?”
“최면술이 덜 걸렸나?”
“아니, 그것 좀 그만하라니까. 으! 그래, 알았어. 잡아줄게. 잡는다!”
내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자, 혜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내 손을 와락 붙잡았다. 이거 참 놀리는 재미가 있는 무당 누나였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혜수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는 멈춰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후, 카드키를 사용해서 방 안으로 들어가자, 혜수가 어깨를 한층 더 움츠리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 반응……. 처녀구만.’
기분 좋게 웃은 나는 혜수와 신령님을 데리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둘을 침대 위에 나란히 앉혀두고는 회중시계를 꺼내 흔들었다.
“둘 다 옷 벗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