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4화 〉 [비밀 연구소]
* * *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이왕이면 비밀 연구소의 배후가 누구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이래서야 힘들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다시 하르피아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마치 마물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물들은 하르피아 앞에서 설설 기었고, 가끔씩 죽은 인간의 시체를 들고 와서 발치에 내려놓고 가기도 했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려 마정석 파편을 네 개씩이나 박은 마물이었다.
대규모 오크 군세를 이끌었던 오크 족장 올가조차도 마정석 파편 세 개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하물며 그것보다 하나 더 많이 박은 하르피아가 그보다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연구소 안에 갇혀있던 마물들을 풀어준 게 하르피아 같았다.
‘일단 하르피아와 대화를 해볼까.’
운이 좋다면 하르피아한테서 비밀 연구소의 배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건물 아래로 내려간 나는 하르피아 앞에 선 뒤에 날개를 접었다. 그리곤 야수화, 독수리를 해제함과 동시에 에나를 소환하자 하르피아의 표정이 확 변했다.
“인간? 인간이 나타났다! 여기에 인간이 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던 모양인지, 하르피아가 우리를 보자마자 연구소 안의 마물들을 불러모았다. 덕분에 우린 순식간에 수많은 마물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하지만 딱히 무섭다거나 조바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유현 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에나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아단트의 불완전한 신검이 빛을 발하며 검집에서 뽑혔다.
한눈에 딱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검의 자태에 마물들이 겁을 먹은 건지, 좀처럼 우릴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마정석 파편을 네 개나 몸에 박아넣은 하르피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좋은 말로 할 때, 여기서 당장 꺼져라! 여긴 이제 내 영역이다!”
당장에라도 우릴 공격할 것처럼 마물을 불러모았던 하르피아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나를 내쫓으려고 하자, 살짝 안심이 되었다. 혹시라도 녀석이 끝끝내 마물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우릴 공격했다면, 그 땐 대화고 뭐고 없이 싸워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러면 최소한 대화를 해볼 여지가 생기지.’
나는 에나에게 도로 검을 집어넣게 하고는 하르피아에게 말을 걸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들어와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응? 미안하다고?”
“그렇습니다.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습니까?”
“……?”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하르피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얼굴 한 편에 안도감이 보이는 게, 우리와 싸우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리한 판단이었다. 만약에 에나가 진심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여기 있는 마물들이 모두 다 썰리게 될 테니 말이다.
“사과를 받아주신 거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근데 여긴 왜 온 거냐, 인간? 우리를 죽이려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죽였으니까.”
나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온통 인간 시체뿐이었다. 그걸 보니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오히려 자업자득이란 생각마저도 들었다.
‘내가 그렇게 경고를 해줬는데…….’
이들 모두 마정석 파편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했다. 심지어 마물들을 실험용 쥐 취급하며 마음대로 개조하기까지 했다. 단적으로 빅아이 오우거만 봐도 그러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마물들을 상대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됐다. 그리고 만약에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마물들의 분노가 이해되었다.
나였더라도 마물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저는 여기 있는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
“오히려 죄를 추궁하려고 왔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여러분을 구하러 왔다는 게 조금 더 맞겠군요.”
“우리를 구하려고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저는 마정석 파편이 이런 식으로 쓰이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요.”
나는 하르피아의 두 날개와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저것보다 훨씬 더 작고 가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르피아의 날개와 다리는 마정석 파편에 의해서 크고 흉측하게 변해있었다. 마치 괴물처럼.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르피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설마……. 나한테서 이걸 빼앗을 거야?”
“달라면 줄 겁니까?”
“안 돼! 못 줘! 이건 내 거야! 내 거라고!”
하르피아가 사납게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다른 마물들도 시끄럽게 울부짖었다. 역시 이미 몸에 박힌 마정석 파편을 빼앗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모처럼 얻은 강력한 힘이다. 이걸 손에서 놓기란 절대 쉽지 않을 일일 것이다.
‘이 정도는 이미 상정했던 일이니까.’
애초에 앞서 몇 번이나 겪었던 일이었다. 이런 걸로 당황하기엔 내가 저지른 일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빼앗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던전의 일원이 되십시오. 하르피아, 당신은 물론이고 여기 있는 다른 모든 마물들까지도요.”
“만약에 거절한다면 어쩔 셈이야?”
하르피아가 경계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며 날개를 좌우로 활짝 펼쳤다. 그러자 큰 날개 덕분에 몸집이 상당히 크게 보였다. 꽤나 위협적이긴 했지만, 내게 두려움을 줄 정도까진 아니었다.
“강제로 마정석 파편을 빼앗아야겠죠.”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뺏어봐.”
“꼭 이래야겠습니까?”
“겨우 얻어낸 자유야. 누구도 나한테서 자유를 빼앗아갈 수 없어!”
크게 소리친 하르피아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다른 마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릴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오른팔만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오크였다.
“에나 씨, 마정석 파편만 뽑을 수 있겠습니까?”
“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에나는 오크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누가 봐도 수상쩍을 정도로 울긋불긋 튀어나와있는 혈관이 모여있는 부분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크워어어억!”
오크가 고통에 찬 비명을 터트렸지만, 에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마정석 파편을 뽑았다.
“뺏겼어! 뺏겼다고! 도망쳐!”
“강해! 인간, 강해!”
눈앞에서 마정석 파편이 적출당하는 모습을 본 마물들이 기겁하며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도망치는 건 아니었다. 몇몇 마물들이 호기롭게 우리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에나에게 마정석 파편을 적출당하고 말았다.
‘정확하네.’
불필요한 동작은 없었다. 그녀는 정확히 마정석 파편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손가락을 찔러넣은 뒤에 마정석 파편만 쏙 빼냈다. 아마 에나가 간호사 일을 했다면, 주사를 한 번에 놔준다며 환자들이 좋아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에나를 지켜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서 하르피아를 찾아보았다.
‘이런.’
놀랍게도 하르피아가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설마하니 우두머리라는 작자가 도망부터 칠 줄이야. 영리하다고 해야 할지, 약삭빠르다고 해야 할지. 나는 칠흑의 지팡이를 불러낸 다음에 잠깐 고민을 했다.
‘그냥 이대로 놔줄까?’
자유가 저리도 좋다는데, 당분간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하르피아를 놓아주게 된다면 분명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될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이내 주문을 외웠다.
“어둠의 화살.”
화륵, 검게 타오르는 화살이 순식간에 하르피아를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이에 화들짝 놀란 녀석이 날개를 휘둘러서 어둠의 화살을 막아보았지만, 뒤에 펑! 하고 폭발하는 충격까진 미처 다 막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야수화, 독수리.”
이를 확인한 나는 독수리로 변신한 다음에 하르피아가 추락한 장소로 날아갔다. 다행히도 여긴 사막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하르피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야수화를 해제한 뒤에 모래 위에 쓰러져 있는 하르피아에게 다가갔다.
“기절한 척해도 소용없습니다.”
마정석 파편을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네 개씩이나 몸에 박은 마물이 고작 이 정도로 기절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내 예상대로, 하르피아가 원망 섞인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멀쩡하네.’
에나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운피레아를 부를까? 잠깐 고민하며 하르피아를 바라보는데, 녀석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억울해! 억울하다고! 이대로 복수도 못 하고 죽고 싶지 않아! 삐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