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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어플-528화 (528/599)

〈 528화 〉 [비밀 연구소]

* * *

복도를 따라 저택 내부 깊숙이 들어간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중간중간에 합성 좀비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긴 했지만, 이프리의 유물 지팡이 덕분에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여기 아래인가?’

그렇게 미니맵을 보면서 이동하다 보니, 우린 어느샌가 목표물이 있다고 표시되어있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미니맵에 표시된 점 옆에 화살표가 아래 방향으로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혹시나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없을까 싶어서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선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따로 찾아야 될 듯 싶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에나와 운피레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에나가 손을 들어 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한 에나는 한 걸음,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뭘 하려는 거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에나가 왼손을 뻗어서 내 허리를 감쌌다.

“에나 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 팔로 나를 단단히 끌어안은 그녀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있던 아단트의 불완전한 신검을 오른손으로 뽑았다.

스르릉. 오랜만에 뽑힌 신검이 새하얀 검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냈다. 확실히 영웅 등급의 장비라서 그런지 때깔이 참 고왔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돌연 에나가 신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무너질 겁니다.”

그 후, 에나가 아단트의 불완전한 신검을 검집에 수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내가 놀란 눈으로 에나를 바라보자, 에나가 마치 자기만 믿으란 듯이 왼팔에 더욱더 힘을 주며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더불어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그걸 보아하니 나를 안고 싶어서 이런 일을 저지른 듯싶었다.

‘귀엽긴.’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다음에 에나를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맡겼다. 그리고 이처럼 저택 지하로 추락한 우리는 곧 마정석 파편을 먹었다고 생각되는 여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쿠웅!

“뭐, 뭐야!”

돌무더기와 함께 떨어진 우리를 가까스로 피한 여성이 기겁하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저 여자가 라인펠덴 가문의 영애인가.’

이계 퀘스트에선 심연의 마녀라고 지칭되어 있었는데, 그런 것치곤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외모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마녀라기보다는 정숙한 귀족 영애에 가까운 얌전한 옷차림입니다.

오히려 너무 껴입어서, 살짝 더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건, 이것 나름대로 신선한데.’

그리 생각하며 영애의 옷차림을 살펴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서 외모를 살펴봤다. 아까 돌무더기와 함께 추락하면서 흙먼지가 많이 휘날렸기 때문에 외모를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뭐, 예쁘긴 하네.’

과연, 이계 퀘스트가 아름답다고 지칭할만 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 버린 내 눈에는 그다지 특출날 게 없어 보였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저렇게 옷을 껴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륨감이 엿보이는 가슴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보통 병약하다고 하면 빈유가 정석이 아닌가?

병약 미소녀 + 빈유.

이건 전 인류를 관통하는 암묵적인 룰이었다.

‘감히 그걸 깨다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찮은 벌레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것이냐!”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더니,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심연의 마녀가 대뜸 호통치며 우릴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말에 나는 혀를 차며 주변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러자 인체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이는 시체 조각들과 핏물이 담겨져 있는 거로 보이는 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건지, 한눈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나는 혹시나 생존자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 주변을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철창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실험용으로 살려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를 확인한 나는 지체 없이 이프리의 유물, 지팡이를 사용했다.

“권능, 소생. 소생의 빛.”

권능을 발현함과 동시에 소생의 빛을 사용하자, 날 중심으로 10미터 이내의 모든 사람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팔다리가 잘린 채로 고기처럼 갈고리에 걸려있던 사람의 몸에선 팔과 다리가 재생되고 있기까지 했다.

‘효과가 너무 좋은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장비 효과에 감탄하는데, 돌연 심연의 마녀가 머리털을 쭈뼛쭈뼛 세우며 소리쳤다.

“아아악!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야, 이 따스한 기운은……? 기분 나빠! 기분 좋아! 아냐, 기분 나빠! 나빠야 하는데 어째서……!”

심연의 마녀는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양팔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듯 감싸 안으며 덜덜 떨었다. 그리고 이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상처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며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거, 검은 머리에 여기사? 설마, 현자님? 현자님이 오신 건가!”

“살았어! 살았다고!”

“커억! 누, 누가 이 갈고리 좀 빼줘!”

정적만이 존재했던 저택 지하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이 틈에 운피레아가 슬그머니 내 어깨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나를 올려다보는 운피레아의 눈동자에는 절대로 괜찮으실 리가 없어. 라는 확신이 가득차 있었다. 어쩐지 오해가 더 깊어진 것 같긴 했지만,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운피레아의 손등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심연의 마녀한테서 마정석 파편을 뽑아낼 겁니다. 그러니 준비를.”

“네, 맡겨주세요. 주인님은 좀 쉬고 계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운피레아는 곧장 심연의 마녀를 제압할 준비를 했다. 이에 에나 또한 그녀를 돕기 위해서 움직였고 이를 느낀 심연의 마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저리 가! 나한테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후웅!

손을 휘두르면서 마법을 쓴 모양인지,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운피레아와 에나를 덮쳤다.

“바람 정령이여.”

허나, 마녀가 흩뿌린 검은 안개가 우리를 덮치는 일은 없었다. 운피레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정령을 불러서 바람을 일으키자, 검은 안개가 힘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나가 빠르게 달려들어선 마녀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퍽!

“컥!”

그 순간, 마녀의 허리가 꺾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너무나도 쉽게 제압되어서 약간 맥이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영웅급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인데 어떻게 이기겠어.’

심연의 마녀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재앙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혀를 내두른 나는 갈고리에 걸린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끄으윽!”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꺼내드리겠습니다.”

“커억! 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높이 걸려있지 않아서 손쉽게 갈고리를 빼낼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히 괴로워하긴 했지만, 계속 매달려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리고 이처럼 어깨에 걸려있던 갈고리를 빼낸 남성은 내게 감사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다른 사람을 구하는데 집중하죠. 바로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인께선 혹시……. 현자님이십니까?”

“부끄럽지만 세간에선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남성은 나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처럼 갈고리에 걸려있던 사람들을 모두 다 구해낸 나는 굳게 닫혀있는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현자님, 열쇠는 저기에 걸려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철창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열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에 나는 곧장 열쇠를 챙긴 뒤에 철창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끼이익, 소리와 함께 마지막 철창이 열리자 중년의 사내가 날 향해 달려들며 입을 열었다.

“제, 제 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딸을 찾는 걸 보아하니, 바로 이 사람이 라인펠덴 공작인 모양이었다.

“고명한 하이 엘프를 불러왔으니 괜찮을 겁니다.”

“아아…….”

내 설명을 들은 가주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모양인지, 털썩 주저앉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한창 치료 중일 텐데, 한 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아, 아! 네, 그래야지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라인펠덴 가주는 서둘러 나와 함께 심연의 마녀가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메, 멜라니?”

싸늘한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있는 영애의 모습에 라인펠덴 가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불운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주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와 운피레아를 번갈아 보았고, 이에 운피레아가 얼굴을 마주 볼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가주의 다리가 허물어졌다.

“……아, 안 돼. 멜라니……. 내 딸……. 내 딸이…….”

가주가 흐느껴 울자, 운피레아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마정석 파편은 뽑아냈지만, 인간이 버티기엔 너무…….”

“설마 죽은 겁니까?”

“아직은…….”

운피레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희망을 느꼈다. 아직 살아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내가 영애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돌연 가주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현자님!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염치없는 부탁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만 더 기적을……! 저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해주셨던 것처럼 제 딸을 치료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가라면 뭐든 치를……!”

짝!

그렇게 라인펠덴 가주가 날 향해 애원하고 있는데, 돌연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놀랍게도 가주의 뺨을 때린 건, 운피레아였다.

“당신들을 구한 고위 신성 마법을 직접 경험하고도 정녕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겁니까? 이만한 고위 신성 마법을 연달아 사용해달라니! 안 그래도 현자님은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 계속 무리하셨는데!”

“하, 하지만…….”

“딸을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또한 한 아이의 어미니까요. 하지만 이러면 안 됩니다. 자신이 못한다고 해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다니요! 하물며 당신은 이미 한 차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또다시 같은 잘못을 하려는 겁니까? 이런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하지만, 하지만 도저히 제 힘으로는…….”

“딸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운피레아의 말에 가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내 바짓가랑이를 놔줄 뿐이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래도…….’

마음 같아선 당장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영애의 숨이 완전히 멎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권능, 소생. 소생의 빛.”

권능과 함께 소생의 빛을 사용함과 동시에 따스한 빛이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그 빛은 곧 영애의 몸을 덮었다.

“현자님?”

그와 동시에 라인펠덴 가주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나는 정말로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웃고는 손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엔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키고 있는 영애가 있었다.

가주는 내 의도를 알아챈 듯, 서둘러 딸에게 달려갔다.

“아, 아버님?”

“멜라니!”

가주가 딸의 몸을 끌어안자, 영애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아버님인가요?”

“그래! 그래, 맞다! 맞고 말고. 오, 세상에……. 멜라니, 정말로 네가 살아나다니…….”

가주는 자신의 딸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에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딸의 얼굴을 더듬으며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영애인 멜라니도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지는 모양인지, 살짝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가족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 모양인지, 조금 뒤에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윽, 흑. 아버님…….”

그렇게 한참 동안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트리던 영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버님, 저 때문에…….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거죠?”

“아니다, 꿈이다. 끔찍한 악몽이었던 거야.”

악몽이었다는 가주의 말에도 영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틀려요. 저……. 조금씩, 기억이 나고 있어요.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제 손으로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저, 전 이렇게 살아있으면 안 돼요! 제가……! 제가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살라는 건가요?”

“딸아, 그건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란다!”

“아니에요, 아버님. 제 잘못이에요. 제가…….”

순간, 멜라니 영애가 가주의 품에서 벗어나며 결심을 굳힌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표정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기껏 살려놨더니 자살이라니. 그런 짓을 하게 놔둘 순 없었다.

나는 영애에게 다가가 손목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영애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 하지만…….”

“분명 영애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영애를 구하기 위해서 나섰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영애를 구하려다가 죽은 겁니다.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이분들의 의지를 헛되이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제가 정말로……. 살아도 되는 걸까요? 저 때문에 고통받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지금도, 지금도 그분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와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저는 그분들에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영애가 두 손을 덜덜 떨며 말하자, 내 옆에 있던 운피레아가 그 심정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맞아요, 우린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러니 그걸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나요? 설마 영애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망칠 생각인 건가요?”

“아, 아뇨…….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걸 알고 있지만……. 제가, 그래도 되는 걸까요?”

“네, 그럼요. 그리고 영애를 구하려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모두……. 현자님께서 구원해주셨어요.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운피레아의 말에 영애가 작게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봤던 그 빛이……. 기억나요. 무척이나 상냥하고, 포근해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영애는 마치 그때의 회상하듯, 눈을 살짝 감았다가 이윽고 도로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혀, 현자님…….”

“네.”

“저기, 그……. 감사합니다. 절 구해주셔서……. 그리고 저 때문에 희생당한 분들의 영혼을 구원해주셔서……. 흐윽, 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는 영애의 행동에 나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천천히 갚아 나아가시면 됩니다.”

“갚으면서…….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좋습니다. 영애께서 생각하시기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하시면 됩니다. 그걸로 조금씩, 조금씩 갚아 나아가시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 언젠가 고개를 떳떳이 들 수 있게 될 겁니다.”

“아…….”

영애의 턱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들어 올리자, 영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답답한 듯, 양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꾸욱 누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영애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고 싶지만, 지금은 또 다른 이계 퀘스트를 하러 한시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영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영애라면 분명 잘 해내실 거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아…….”

“그리고 공작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가주가 아쉽단 표정을 지었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실제로도 급했다. 가주도 내 사정을 짐작한 모양인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영애는 이대로 나와 헤어지기 싫은지, 자기도 모르게 내 손목을 붙잡고 말았다.

“아.”

깜짝 놀란 영애가 황급히 등 뒤로 손을 숨기자, 나는 그녀의 아쉬움을 달래주고자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또 찾아오겠다는 말에 영애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네, 그리고 그날 영애께서 제가 말했던 대로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계신다면 한 가지 상을 드리겠습니다.”

“상, 상이라뇨! 아니에요. 저는 그저 현자님께서 또 찾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손을 들며 극구 사양하는 영애의 태도에 쓴 웃음을 지은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상에 대한 건……. 언제든 생각이 바뀌거든 편하게 말해주세요.”

영애에게 여지를 남겨준 나는 운피레아한테서 마정석 파편을 건네받고는 이계 퀘스트 종료 화면을 띄웠다.

[축하합니다!]

[마정석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계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종료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엄지로 네를 누르자, 순간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아파트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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