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화 〉 [또 다른 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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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구이 덕분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모양인지, 점심 때도 조금씩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알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일이 없었다. 물론 아주 가끔씩 나하고 단 둘이 있을 시간이 줄어들었다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상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갑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에 가까워지자,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든 에일린이 식당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죠?”
“아니, 전혀! 그보다 길을 헤매진 않았어?”
“조금요.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잡화점 옆에 길안내판이 걸려서 있어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어요.”
에일린의 말에 알마가 마치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좋아하며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에일린의 양 손에 들려있는 짐을 챙겨든 뒤에 2층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 됩니다.”
“이 방을 저 혼자서 써도 되는 건가요?”
“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어요!”
방 안으로 들어간 에일린은 활짝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한번 빼꼼 내밀어 보고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작게 ‘드디어 내 방이 생겼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어보니, 고아원에선 여러 아이가 하나의 방을 함께 쓰는 듯싶었다.
‘하긴 그게 제일 보편적이긴 하지.’
아이들을 관리하기도 편할 테고.
내가 이렇듯 짐작하고 있을 때, 옆에 서있던 알마가 잔뜩 들떠있는 에일린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근데 짐은 어떻게 할래? 혼자서 정리할래? 아니면 도와줄까?”
“도와주시면 저야 좋죠!”
“그래? 그럼 유현 씨, 잠깐 1층에 내려가 있어 주실래요? 저 혼자서 에일린을 도와줄게요.”
날 향해 살짝 윙크하는 걸 보니, 여자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눈치껏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했다.
가볍게 식당을 청소하고 요리에 쓸 식재료를 다듬었다. 술의 양도 확인해보고는 부족하다 싶은 건, 창고에서 가져다가 채워 넣었다. 이렇게 일을 끝마치고 나니, 완전히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이런 쪽으로 적성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어쩌면 요리사 레벨과 관련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요리를 잘하게 됐다면, 단순히 요리 레벨이라고만 표기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굳이 직업명 자체를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내가 너무 과대 해석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멸망한 세계가 그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내게 요리사라는 직업을 줬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세계가 구원받길 원했다면 요리사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줘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하필 많고 많은 직업 중에 요리사가 웬 말이란 말인가.
‘요리사로 세계를 구원하는 것보다 그냥 탑을 오르는 자들을 모아서 탑을 정복하는 게 더 쉬울지도.’
문득 유 은혜와 신 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윤이랑 은혜, 이렇게 둘만 잘 키운다면 탑을 정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은혜는 미니맵을 스킬로 보유하고 있었다. 탑을 등반하기에 최고로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2층도 1층처럼 미로로 되어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미니맵은 충분히 좋은 스킬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멸망한 세계의 탑을 정복하고나면 여긴 어떻게 되는 거지?’
탑을 정복하고 난 뒤에도 세계가 멸망한 채라면……?
이런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자, 결국 지금까지 한 모든 걱정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애초에 내겐 선택권이 없는 듯싶었다. 물론 알마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멸망한 세계의 탑을 정복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버릴 수가 없잖아.’
게다가 더욱이 내가 왜 멸망한 세계를 구원하기를 선택했던가? 그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탑 안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잠시나마 흐트러졌던 마음을 바로 고치며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마음을 굳게 먹었을 때, 알마가 에일린을 데리고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유현 씨. 오래 기다렸어요?”
“간만에 한 숨 돌리고 좋았습니다.”
“으으,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너무 일만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알마는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식당 내부를 살펴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니, 정말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왠지 이걸 빌미로 오늘 밤에 이것저것 시킬 수 있을 듯 싶었다.
나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에일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기 처음 왔을 때하곤 다르게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은 겁니까?”
“우리 식당 종업원이잖아요. 예쁘게 입어야지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겠어요? 어때요? 유현 씨가 봐도 이쁘죠?”
“네, 예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옆에 서있던 에일린이 뛸 듯이 기뻐하며 얼굴을 붉혔다.
“저 이렇게 예쁜 옷은 난생 처음 입어봐요.”
“앞으론 자주 입어볼 수 있을 겁니다.”
이렇듯 에일린은 칭찬해준 나는 저녁 장사를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주방을 점검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알마는 에일린에게 식당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종업원이 할 일을 상냥하게 가르쳐 주었다.
덜컹.
“어서 오세요!”
이윽고 손님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에일린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첫 손님을 맞이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고 있긴 했지만, 원래부터 원체 친화력이 좋았던 덕분에 금세 적응해선 손님에게 거리낌없이 대했다.
“조금 걱정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하네요.”
그 모습에 알마가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종업원을 잘 뽑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알마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를 마주보며 한 차례 웃은 나는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옆에 있던 알마도 더이상 서빙에만 전념할 필요가 없었기에 내 옆에서 요리를 함께 만들었다.
물론 손님으로 식당 안이 가득 찼을 땐, 어쩔 수 없이 알마가 주방을 비울 수 밖에 없었다. 에일린 혼자서만 서빙을 하기엔 너무나도 벅찼으니 말이다.
‘그래도 첫날 치곤 잘하고 있네.’
게다가 알마하고도 궁합이 잘 맞았다. 누가 보면 사이좋은 자매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알마와 에일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또다시 주문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는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요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식당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흐아, 죽을 거 같아요.”
마지막 손님까지 내보내고 식당 문을 닫자, 에일린이 울상을 지으며 의자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이에 옆에 있던 알마가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도 팁은 많이 받았잖아?”
“히히, 그건 그래요.”
“어때? 보람차지 않아?”
“너무 좋아요.”
알마의 말에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동화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듯이 헤벌쭉 웃으며 발을 허공에 동동 굴렸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게,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동화를 바라보며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뭘 사다줘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유현 씨도 고생하셨어요.”
“알마 씨도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그녀가 슬그머니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오며 말했다.
“말로만요?”
그 말에 나는 에일린 몰래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줬다. 그러자 금세 알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에, 에일린이 보면 어쩌려고요.”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키스해준 게 기쁜 모양인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매일매일 이랬으면 좋겠네요.”
그러다가 문득 소원을 빌 듯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그녀가 원하는대로,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그럴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내 대답대로,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무척이나 평온하면서도 바쁜 하루가 되었다.
평소와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에일린이 알마와 함께 낮시간동안 쇼핑을 하러 나갔다는 것 정도일까? 덕분에 나 혼자서 식당을 지키게 되었지만, 낮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간만에 차분하게 요리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득이 됐다.
“상태창.”
[김 유현]
요리사 레벨 : 8
미식가 레벨 : 6
도축자 레벨 : 1
요리 연구가 레벨 : 6
마지막으로 요리 연구가의 레벨이 하나 더 오르는 소소한 성과를 얻었다. 요리사 레벨이 9를 찍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첫날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0일 1시간 12분 남았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용사 파티의 요리사가 되어서 세계를 구해야 합니다.]
[용사가 사망할 경우, 다시 처음부터 도전할 수 있습니다.]
‘1시간 12분 남았구나.’
7일째 되는 날, 나는 여전히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주방 너머로 식당 안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모른 채로 손님들에게 음식을 서빙해주고 있는 알마와 에일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마지막은 아닐테니까.’
용사가 죽고 나면 세계가 멸망하고, 나는 다시 용사의 일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알마는 나를 잊겠지.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다시 만나면 되니까. 그녀가 잊었던 추억은 다시 쌓으면 된다.
‘설령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알마가 죽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니까.’
[용사가 사망했습니다.]
이렇듯 마음을 굳게 먹고 있을 때, 눈앞에 새로운 알림창이 나타났다.
‘뭐?’
용사의 사망 소식에 깜짝 놀란 나는 아까부터 계속 띄워두고 있던 알림창을 확인했다.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0일 1시간 3분 남았습니다.]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1시간을 남겨두고서 용사가 사망했다. 그리고 용사가 사망하면서 또다른 알림창이 눈 앞에 나타났다.
[용사의 사망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3일 뒤에 다시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눈앞의 사물들이 흐릿해지더니 암전되는 것처럼 꺼졌다. 사방이 온통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나는 눈을 감고, 차분히 심호흡했다. 그러자 조금씩, 밝은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를 느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이전에 있던 주방이 아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하, 3일 뒤에 재도전이라니.”
나는 전혀 예상지도 못 한 상황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러면 또 탑 안으로 들어가야하잖아.’
혹시나 싶은 생각에 매니저 어플을 실행해서 탑의 정보를 확인해봤지만.
[현재까지 출현한 탑의 숫자 : 1 (자세히 보기 접기)]
[탑의 위치 : 1. 대한민국 경기도 (1층까지 공략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다음 층 개방 일시 : 1. 대한민국 경기도 (2층 개방까지 2일 21시간 21분 남았습니다. 2층 개방 시, 탑을 오르는 자 278명이 강제적으로 소환됩니다.)]
달라진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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