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4화 〉 [또 다른 이계]
* * *
식재료를 손질하며 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다행히 내가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 싶었다.
‘용사가 강한 건 확실한데.’
오우거를 단신으로 쓰러트린 건, 어디까지 그녀가 이뤄낸 수많은 행보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여신에게 용사로 선택받아서 사도교 무리를 뿌리 뽑았으며, 엘프와 인간의 화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한 마지막 하나 남은 드래곤의 친구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영웅이며, 용사였다.
‘12살에 용사로 선택받았다고 했으니까, 올해로 딱 10년째 용사 생활을 하고 있는 건가?’
10년이면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그녀가 어째서 세계의 멸망을 막지 못한 걸까? 그리고 용사가 막지 못한 걸, 내가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살짝 자신감이 없어졌다.
‘심지어 직업은 요리사…….’
멸망한 세계의 탑은 대체 무슨 생각에서 나를 요리사로 만든 걸까? 설마 탑은 세계가 구원받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납득이 되었다. 더욱이 멸망한 세계의 탑은 처음부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마치 불순물을 떼어내려는 것처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문득, 알마가 내 팔을 툭 치며 물었다. 이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 살짝 웃고는 그녀와 함께 마저 식재료를 다듬었다. 그리곤 모든 일이 끝나자, 우린 기다렸다는 듯이 침실로 들어가선 서로의 몸을 탐하며 잠에 들었다.
‘5일째인가.’
자고 일어나보니, 창문 사이로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도 아직 햇살이 그리 강하지 않은 걸 보니, 이른 새벽인 모양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나는 고개를 돌려서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는 알마를 봤다.
‘조금 더 자게 놔둘까.’
손을 뻗어 알마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쓰다듬은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일으켰다.
“우응.”
하지만 알마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팔에 닿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 절로 침음이 새어 나왔다. 어젯밤에 그렇게 해댔음에도 또다시 하복부로 피가 쏠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발기한 남근을 애써 가라앉히며 알마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오늘 고아원에서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으니까.’
침대를 벗어난 나는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옷을 입고 방을 빠져 나갔다. 그리곤 오늘 데려올 아이가 쓸 방을 정리하기 위해서 나와 알마가 쓰는 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을 적당히 물색해봤다.
‘여긴 방음이 제대로 잘 안 될 테니까.’
괜히 가까운 방을 내줬다가 알마의 신음 소리를 듣기라도 한다면, 다음 날 아침에 서로 얼굴 보기가 민망해질 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을 고른 뒤에 청소 도구를 챙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엄청 쌓여있네.’
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모양인지, 여기저기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에 나는 창문을 열고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침대 시트 같은 건, 따로 보관되어 있어서 비교적 깨끗했다는 것이었다.
“좋아.”
이렇듯 청소를 끝마친 나는 이번에는 식당을 빠져나가서 여관을 찾아갔다. 여관방에 두고 온 짐가방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이따가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서 고아원에 방문할 건데,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갈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오랜만에 찾아오셨네요.”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여관 종업원이 아는 척을 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네, 방은 그대로 있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모습을 보니까, 방을 빼러 오신 것 같네요. 제 말이 맞죠?”
“맞습니다. 어떻게 맞추신 겁니까?”
“제가 여기서 몇 년을 일했는데, 딱 보면 척이죠! 아, 근데 방을 빼실 거면 남은 대금도 챙겨가셔야죠. 이따가 내려오셔서 열쇠를 반납해주시면, 남은 기일 만큼 돈을 되돌려드릴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아, 그래도 혹시 정말로 너무 고맙다면 아주 살짝 팁 좀…….”
“이따가 챙겨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고마워요, 오빠!”
방방 뛸 듯이 기뻐하는 종업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후, 나는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방에 두고 온 가방을 챙기고 도로 내려왔다.
그 후, 열쇠를 반납하면서 남은 기일만큼 돈을 돌려받은 나는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여관 종업원에게 약간의 팁을 주곤 나갔다.
‘생각도 못한 돈이 생겼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방을 뺄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미련을 접었다.
나는 서둘러 여관으로 돌아간 다음에 간단히 몸을 씻고, 가방에서 새로 옷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끼익.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었을 때쯤, 반쯤 헐벗은 알마가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유현 씨,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여관에 잠깐 갔다 왔습니다.”
“아하. 그런데 아까 보니까 2층에서 뭘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오늘 고아원에서 데려올 아이가 쓸 방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저 때문에 깨셨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니, 그보다 저도 깨워주시지…….”
알마가 민망하단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달래주고는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배고플 텐데 뭐라도 먹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해드릴까요? 뭐든 말해보세요. 다 해줄게요.”
“그럼 따끈한 사슴 고기 스튜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맡겨주세요!”
자기 가슴을 탁치며 대답한 알마는 곧장 앞치마를 둘러 입고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는 그릇 두 개가 그녀의 양손에 들린 채로 나왔다.
[사슴 고기 스튜]
맛 : 6점
향 : 6점
상품 가치 : 6점
평가 : 혹시 당신은 사랑이 최고의 조미료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면 일단 한 입 먹어보세요. 그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누가 뭐라 해도, 애정이 듬뿍 담긴 사슴 고기 스튜입니다.
‘향이 1점 올랐네.’
상품 가치는 여전히 6점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처음 먹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맛있게 느껴졌다. 정말로 사랑이란 조미료가 가미되어서 그런 걸까? 물론 단순히 시스템의 말장난일지도 몰랐다.
‘그냥 정성이 더 들어가서 그런 거겠지.’
나는 알마가 만들어준 사슴 고기 스튜를 맛있게 다 먹고는 그녀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설거지를 한 뒤에 식당 안을 간단히 청소했다. 그리곤 청소가 거의 다 마무리 되어갈 때쯤, 보기 드물게 이쁘게 차려입은 그녀가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음, 어때요? 이상하진 않나요?”
“이쁩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유현 씨도 멋져요.”
내게 다가온 알마는 살짝 흐트러져 있는 내 옷깃을 말끔히 정돈해주고는 생긋 웃었다. 이에 나는 마치 보답하듯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고는 식당을 빠져나갔다.
“고아원이 크군요.”
알마의 안내를 받아서 찾아간 고아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놀라자, 알마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영주님의 부인이 후원해주시는 고아원이거든요. 아마 도시 안의 고아들은 대부분 여기 출신일 거예요.”
나는 알마의 설명을 들으며 고아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우리처럼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서 찾아온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녀복 차림의 여성에게 안내를 받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 때, 또다른 수녀복 차림의 여성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이에 알마가 종업원으로 쓰기 위한 아이를 찾고 있다고 대답하자, 여성은 곧 능숙하게 우리를 데리고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아이를 원하시나요?”
“성격이 밝은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종업원으로 쓸 거니까요. 아, 그리고 여자아이로 해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알마의 대답을 들은 여성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을 흔들어서 사람을 불렀다. 그리곤 에일린이란 이름의 아이를 데려오게 시켰다.
그 후, 여성은 서류 하나를 가져와서 에일린에 대한 인적사항을 하나씩 이야기해주며 주의를 주었다.
“올해도 15살이 된 아이예요. 성격이 밝아서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요. 종업원으로 쓰실 거라고 하셨으니, 충분히 잘 적응할 거예요. 그런데 혹시 어떤 종업원으로 쓰실 건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식당 종업원이에요. 주로 저녁에 일을 시킬 거고요.”
“확인차 묻는 거지만, 위험한 일을 시키시는 건 안 됩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제가 직접 찾아갈 겁니다. 만약에 그 때, 에일린이 학대를 당했다거나 불운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면 영주님의 이름 아래에 처벌을 받게 되실 거고, 심한 경우에는 도시에서 추방되실 수도 있어요. 이해하셨나요?”
“네, 이해했어요.”
이처럼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에일린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 아이였는데, 눈동자엔 장난기가 가득해서 어쩐지 악동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에일린이에요!”
“반가워, 에일린. 난 알마야. 이쪽은 유현 씨고.”
“와, 두 분 혹시 부부이신가요? 전 분명히 종업원으로 고용된다고 들었는데…….”
“부, 부부는 아냐! 아직은!”
“아하.”
부부란 말에 알마가 당황하며 소리치자, 에일린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크흠, 소개가 끝났으면 서류에 성명과 주소를 기입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에일린, 매번 말하는 거지만 기운찬 것도 좋지만 가끔은 얌전하게 지내렴. 알겠니?”
“네, 선생님.”
에일린이 설교를 받는 와중에 필요한 서류에 서명을 모두 끝마친 알마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알마 씨, 마지막으로 신분을 증명하실 수 있는 패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유현 씨라고 하셨던가요? 함께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의 말에 나와 알마는 각자 신분 증명패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알마 씨, 유현 씨. 앞으로 에일린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듯 모든 절차를 끝마친 우리는 먼저 식당으로 돌아갔다. 에일린은 본인의 짐을 모두 챙긴 뒤에 점심쯤에 찾아간다는 말을 했다.
“기운찬 아이라서 다행이네요. 잘 적응할 것 같아요.”
“장난기가 조금 심해보이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돌아가는 길에 알마가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나는 살짝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알마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다들 저 나이대에는 원래 저래요. 저도 그랬는 걸요.”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에일린은 알마에게 맡겨도 될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