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화 〉 [또 다른 이계]
* * *
“벌써 아침이네.”
창밖을 내다보자, 짐 마차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돌바닥으로 된 길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짐칸에 신선한 채소가 가득 실려있는 걸 보아하니 아침 시장으로 들어가는 상인인 모양이었다. 그 밖에도 드문드문 인적이 보였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선 아침을 알리는 신전의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저히 일주일 뒤에 멸망할 세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평화롭네.”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켠 나는 여관 밖으로 나간 다음에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저녁에 먹은 요리와 새로 구상한 레시피들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장을 찾아가서 채소와 고기를 살펴보자, 눈앞에 또다시 알림창이 나타났다.
[양배추]
신선도 : 98%
상품 가치 : 상
평가 : 농부가 정성껏 키운 양배추. 아삭한 식감과 은은한 단맛을 품고 있다. 어떤 요리에든 어울리는 재료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터무니없을 정도로 편리한 능력이었다. 요식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정도로 사기인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요리사가 아닌 일반인인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능력이지.’
약간의 죄악감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당장 내게 필요한 능력이었기에 아낌없이 활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능력 덕분에 요리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게, 몸으로 체감되었다.
‘지금이라면 7점짜리 스튜를 만들 수 있을지도?’
그리 생각하며 요리 재료를 잔뜩 산 나는 알마의 식당을 찾아갔다.
“세상에, 그게 다 뭐예요?”
“오늘 만들어 보고 싶은 요리가 많아서 따로 재료를 사왔습니다.”
“우리 식당 식재료를 써도 되는데…….”
“그러면 너무 민폐지 않습니까?”
“헤, 누가 보면 제가 공짜로 가르쳐주는 줄 알겠네요.”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식당 주방에 가져온 식재료를 종류별로 나누어서 쌓아놓고는 손과 얼굴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곤 주방 한켠에 걸려있는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어제 요리를 하느라 더러워졌던 앞치마는 알마가 깨끗이 세탁을 해준 모양인지, 몰라보게 깔끔해져 있었다.
“오늘은 뭘 만들어 보게요?”
“이것저것 만들어 보고 싶은 게 조금 많긴 한데……. 일단 가볍게 스튜부터 끓여볼까 합니다. 아침 식사 전이죠?”
“해주게요?”
“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사슴 고기 스튜를 끓이는데 필요한 식재료를 꺼냈다.
[예상 결과]
맛 : 6
향 : 5
‘왜 그대로지?’
요리사 레벨이 오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게 현재 내가 만들 수 있는 최대 한계인 걸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다 제쳐두고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원래 이런 건, 몸으로 직접 부딪쳐보는 게 가장 좋으니까.’
나는 레시피가 알려주는 대로 사슴 고기를 균일하게 자르고, 기름을 두른 솥에 고기를 넣어 잘 익을 때까지 구웠다. 약간 걸쭉한 맛을 내기 위해서 밀가루도 세 스푼 정도 집어넣고, 물과 우유를 일정 비율로 넣어서 끓이자 금세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부글부글, 끓는 솥 안에 잘 썬 당근과 채소를 집어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튜가 완성됐다.
[사슴 고기 스튜]
맛 : 6점
향 : 5점
상품 가치 : 6점
평가 : 아침에 편하게 먹기 좋은 스튜입니다. 질 좋은 고기와 채소를 사용한 게, 눈에 띄는 장점입니다.
“다 됐습니다.”
“음, 냄새 좋다. 얼른 한 그릇 주세요.”
“네.”
나는 국자로 스튜를 떠서 그릇에 담은 다음에 알마와 함께 식당 테이블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어제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어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진짜 어제 처음 봤을 땐, 영락없이 초보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근데 오늘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요리사 같고……. 유현 씨는 참 신기한 사람이네요.”
내 정체가 전혀 가늠이 안 된다는 듯,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알마의 태도에 어색하게 웃은 나는 그릇에 담긴 스튜를 빠르게 먹어치웠다. 그리곤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디저트를 만들 건데, 드실 수 있겠습니까?”
“디저트는 언제나 환영이죠.”
알마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곧장 주방에 들어가서 빵집에서 사온 빵을 꺼냈다. 아쉽게도 노점에서 먹었던 못난이 빵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맛은 똑같을 테니 상관없을 듯싶었다.
[예상 결과]
맛 : 5
향 : 6
다행히도 예상 결과는 어제 노점에서 사먹었던 산딸기 잼을 뿌린 못난이 빵과 같았다.
나는 레시피가 시키는대로 산딸기를 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에 설탕과 함께 냄비 안에서 끓였다. 끓는 동안 중간중간 저어주자, 새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많은 양을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잼은 금세 완성되었다.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물게 나오긴 했지만…….
‘맛은 괜찮은 거 같은데.’
설탕을 아낌없이 뿌렸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빵 위에 잼을 듬뿍 끼얹어서 완성하자,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산딸기 잼을 듬뿍 뿌린 빵]
맛 : 7점
향 : 4점
상품 가치 : 5점
평가 : 달콤한 맛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디저트. 잘 익은 산딸기만 사용했기 때문에 신맛보단 단맛이 더 강하다. 어쩐지 향이 다른 산딸기 잼보다 약하지만, 그래도 맛은 다른 것에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는다.
“음.”
예상 결과보다 맛은 하나 오르고, 향은 하나 떨어졌다. 그나마 상품 가치는 저번에 노점상에서 팔던 것과 똑같이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조금 싱숭생숭하긴 했지만, 일단 완성했으니 알마에게 가져갔다.
알마는 식당 내부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거의 다 끝냈는지 이마에 흐른 땀을 산뜻하게 닦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오, 다 완성된 거예요?”
“네.”
“와! 이거 엄청 오랜만에 보네요. 진짜 그립다~. 어렸을 땐, 매일 먹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져온 디저트를 본 알마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반겨주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디저트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럼 잘 먹을게요!”
의자에 앉은 알마는 산딸기 잼을 얹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잼을 워낙에 많이 뿌려서 입가에 조금 묻긴 했지만, 알마는 그것마저도 아깝다는 듯 혀로 핥아서 깨끗이 먹었다.
“……흐아~! 피로가 싹 풀리네요. 원래 이런 맛이었던가? 당장 내일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이 만든 ‘산딸기 잼을 듬뿍 뿌린 빵’으로 알마를 만족시켰습니다.]
[요리사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요리사 레벨이 상승합니다.]
‘오…….’
상대방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면 요리사 경험치가 상승하는 걸까? 이건 또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가만, 그럼 이제까지 내가 만들어준 음식은……. 별로였다는 뜻인가?’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점심 이후로 요리 연습을 한다고 알마에게 몇 번 음식을 대접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 다 사슴 고기 스튜였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알마에게 조금 미안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음식을 몇 번이고 계속 먹었으니,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미안한 마음에 알마를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산딸기 잼을 뿌린 빵을 한 입 먹었다. 잼 때문에 눅눅해진 빵이 뭉개지듯 입안으로 들어왔다. 정말이지, 혀가 놀랄 정도로 달았다.
‘단맛 때문에 향을 느낄 새가 없네.’
일부러 신선한 산딸기만 쏙쏙 골라서 사왔는데, 아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보상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 달고 맛있었다. 물론 이게 설탕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디저트를 다 먹은 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알마는 손님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구석진 장소에 있는 식당인만큼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찾아오는 손님도 알마와 개인적으로 친해보이는 노부부들 뿐이었다.
‘식당이 유지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장사가 안되네.’
혹시 알마가 건물주인 건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털어내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기 볶음밥]
맛 : 5점
향 : 5점
상품 가치 : 5점
평가 : 평범한 고기 볶음밥
가장 처음 만든 건, 고기즙을 뿌린 볶음밥을 변형시킨 고기 볶음밥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평범한 고기 볶음밥이 나왔다. 물론 당연하게도 맛이 상승했다. 기존에는 맛 4점에 향 6점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향이 오히려 떨어졌네?’
무엇이 향을 떨어트린 걸까? 혹시 고기즙이 진짜로 고기를 넣은 것보다 훨씬 더 향을 잘 내는 건 아닐까?
나는 이번엔 기존 레시피대로 고기즙을 뿌린 볶음밥을 만들었다.
[고기즙을 뿌린 볶음밥]
맛 : 4점
향 : 6점
상품 가치 : 5점
평가 :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볶음밥입니다. 값싸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맛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기 향이 그걸 훌륭하게 메워주고 있습니다.
다시 만든 요리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평가가 적혀있었다.
그땐, 그냥 값싸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볶음밥이라고만 적혀있었는데 말이다. 뭔가,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의문을 가진 채, 요리를 만들어서일까? 어쩌면 멸망한 세계가 내게 주는 힌트 같은 걸지도 몰랐다.
‘힌트라.’
아직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계속 요리를 하며 알아가는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나는 시장에서 나온 식재료들로 계속 요리를 하며 경험치를 쌓고, 요리사 레벨을 올리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5레벨로 오른 요리사 레벨은 좀처럼 6을 찍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결국, 저녁이 될 때까지 더 이상의 수확을 얻지 못한 나는 지금까지 만든 요리를 알마와 함께 나눠 먹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도시의 거리는 저녁에 가까워졌음에도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응?”
그렇게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문득 내 눈에 하나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낯이 익은 여성이 칼을 들고 서있는 동상이었다. 어디서 본 건가 싶어서 골똘히 생각하자,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용사구나.’
용사, 세르니아를 닮았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대로, 동상의 주변에 선 사람들이 용사의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걸 보니 이제야 세계가 멸망의 기로에 서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직 용사가 세계를 구하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동상을 세우다니.’
설레발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조금 들긴 했지만, 용사의 모습을 띤 동상에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불안을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은 기껏 해봐야 용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 * *